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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3) (143/210)


143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3)
2023.02.23.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마라. 아닌 말로, 내가 죄 없는 사람 때렸냐? 다 맞을 짓을 해서 맞은 거지.”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백작에게 포션을 던져주며 프레이가 한 말이었다. 백작은 작은 유리병을 어리둥절해 하며 보다가, 자이안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게 치료제라는 걸 깨달았다.

치료제를 가장한 독일지도 모른다, 하는 의심이 순간 들었으나 백작은 망설임 없이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삼켰다.

“이해하오. 내가 아비로서 좀 못난 놈이기는 했지.”

배와 얼굴의 고통이 한결 줄어들었다. 얼굴을 만져보니 붓기가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프레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흥. 이제 와서?”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사과조차 하지 않고 뻔뻔하게 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자이안의 호구 같은 성격은 순전히 나이아에게서만 물려받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백작의 영향도 적지 않아 보였다.

“앞으로 많이 바빠지겠군.”

백작이 한숨 섞인 투로 말했다. 마물에게 점령당해 반파된 제1 저지선의 뒷수습은 물론이고, 자이안이 돌아온 이상 가문에 대해서도 처리할 게 많았다. 특히 왕실과 미오네를 설득할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호재였다. 자이안이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돌아왔다. 불치병을 극복하고, 일기당천의 강력한 동료들과 함께.

그 힘이 일리움을 위해 쓰일 것이라 증명할 수만 있다면 설득은 생각보다 훨씬 쉬워질지도 몰랐다. 어긋나 있던 많은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기회. 백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

뒤이은 자이안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미오네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자이안이 말했다. 감정의 기복이라곤 느낄 수 없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며, 백작은 불현듯 두 가지 상반된 예감에 동시에 사로잡혔다.

지금 여기서 반드시 자이안의 얘기를 들어야 한다. 동시에, 결코 그의 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

“그동안 꼬박꼬박 제 편지를 받았다고 그러셨죠. 그건 모두 가짜입니다.”

“……뭐라고?”

“미오네는 저를 암살하려 했습니다. 시체를 찾지 못한 저를 죽었다고 여기고, 그동안 아버지께 거짓말을 해온 겁니다.”

“…….”

백작은 왕실과 미오네에 대한 신뢰가 부질없는 사상누각이 되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 * *

시리도록 화창한 아침이었다. 미오네는 테라스를 꾸민 분재를 손수 관리하며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안뜰에서 바란드가 마법을 배우고 있었다. 스승은 한때 보석탑의 정교수급 마법사였다던 떠돌이. 뒷조사를 통해 미리 신분을 확인하고, 바란드에게 허튼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뒤에 고용했다.

검술에 이어, 바란드는 마법에서도 특출한 재능을 드러냈다. 아직은 작은 불씨를 일으키거나 물방울을 만들어내는 기초적인 마법에 불과하지만, 겨우 8살 어린아이가 그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사실 바란드의 혈통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당대 알레프 백작은 무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강력한 번개 마법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크게 이름을 떨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리움 왕실 역시, 피를 통해 대대로 강력한 마법의 힘이 계승되는 일족이다.

‘그나저나 토리안은…….’

바란드의 성장은 순조롭지만,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심복인 토리안이 잠시 사소한 볼일을 처리해야 한다며 자리를 비운 것이 며칠 전. 그 뒤로 아무 소식도 없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가 이렇게까지 오래 자리를 비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금방 돌아오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가끔씩 맥락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고는 했다.

‘내가 토리안을 너무 의지하고 있었나 봐.’

미오네가 아무 기반도 뭣도 없는 그냥 어린 왕녀이던 시절부터 토리안은 그녀의 곁에 있었다. 언제 어떤 때에도 변치 않은 모습으로 그녀를 지탱했다.

같은 뜻을 나눈 동료였고, 동시에 동료 이상의 존재였다. 그 존재감은 며칠 자리를 비운 것만으로 미오네를 불안하게 만들 만큼 커져 있었다.

‘별일 없겠지…….’

한숨을 삼키며 가위를 내려놓았다. 자꾸만 약한 마음이 드는 스스로를 다그치려 고개를 세게 내저었다. 바란드의 성장도, 가문 장악도 모든 것이 순조롭다. 불안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마님.”

공손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오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안뜰로부터 시선을 뗐다.

“무슨 일이죠?”

“백작 각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미오네가 알기로 지금 서부 접경지대는 마물의 습격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 지휘관인 백작이 현장을 비우다니.

‘왕실에서 지원병력을 보내지 않아서 초조해진 건가?’

어쩌면 미오네를 통해 왕실을 설득하려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백작이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지금 왕실에서 백작의 요청을 무시하고 있는 건 미오네의 입김이 닿은 결과였다. 미오네는 백작이 먼저 고개를 숙이기 전까지는 결코 요청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좋은 기회야. 이참에 콧대를 확실히 꺾어 놔야지. 일리움과 알레프,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확실히 주지시키는 거야.’

현장 지휘를 포기하고 직접 걸음을 옮겼을 정도다. 이제 몇 번만 더 툭툭 쳐주면 제풀에 지켜 고개를 숙이게 될 터다. 미오네는 조금 전까지 그녀를 괴롭히던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졌음을 느끼며 말했다.

“금방 준비할게요. 조금만 도와주지 않을래요?”

“알겠습니다, 마님.”

시녀의 도움을 받아 옷매무새를 고치고, 향수를 새로 뿌린 뒤 방을 나섰다. 백작의 귀환이 워낙 갑작스러운 탓인지, 저택 분위기가 묘하게 어수선했다.

“각하께서는 어디 계시죠?”

“1층 홀에서 마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십중팔구 확실했다. 어떻게든 미오네를 설득해보려는 심산이리라. 미오네는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띠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각하, 어쩐 일로 이렇게 갑작스럽게…….”

시녀의 말대로, 백작은 개인실이나 어디 응접실 같은 데로 향하지도 않고 1층 홀에 서 있었다. 짐짓 당황한 척 말을 잇던 미오네는, 그러나 백작의 곁에 선 다른 이들을 보고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장에 있었던 듯 중무장한 기사들. 그리고…….

“…….”

아주 잠깐, 미오네는 자신이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녀의 냉철한 현실 감각은 허술한 자기합리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은 명확한 현실이었다.

불안감은 녹아 없어진 게 아니었다. 지나치게 거대하게 자라, 한눈에 봐서는 그게 불안감이라고 알아볼 수도 없게 된 것이었다.

“자이…… 안.”

미오네가 그 이름을 불렀다. 자이안이 미소를 띠며 화답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오네 부인.”

거대한 괴물이 된 불안이 미오네를 내려다보았다.

* * *

“내가 아무 알림도 없이 급히 저택으로 돌아온 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요.”

응접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응어리진 내부는 금방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할 듯 서늘했다.

“미리 알렸다간 부인께서 얕은수를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

“각하. 제가 그런…….”

“부인. 아직 부인의 발언을 허가한 기억이 없소.”

미오네를 대하는 백작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엄중하고 냉혹한 태도였다. 찍어누르는 듯한 위압감에 미오네는 입을 다물었다.

10년가량 부부로서 함께하면서 그런 태도를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백작은 언제나 유약하게 굴었고, 눈치를 봤다. 왕실의 위세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내가…… 내 입으로 말을 하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군. 자이안, 부탁해도 되겠느냐.”

“얼마든지요.”

잠자코 있던 자이안이 나섰다. 미오네는 표독스러운 시선을 자이안에게 향했다. 그러나 자이안은 산들바람이라도 맞은 듯 초연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그의 곁에 있는 두 여성이 움찔하며 반응했다.

“어차피 다들 아는 얘기니까, 핵심만 빠르게 얘기할게요. 제가 아버지의 명으로 저택을 떠난 게 지금으로부터 1년 반 정도 전이었죠. 리투안 공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저는 산적으로 위장한 암살자들에게 습격을 받았습니다.”

미오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시종들과 병사들은 모두 죽고 말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저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는 방황 끝에 일리움에서 멀어져 그저 자유롭게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악연의 끈은 쉬이 끊어지지 않았다. 자이안은 전혀 바라지 않았는데도 저쪽에서 먼저 찾아와 신경을 긁어댔다.

“용서를 구할 거라는 기대는 안 했어요. 하지만 설마 또다시 암살자를 보낼 줄이야. 게다가 당신의 심복인 토리안까지 사지로 내몰다니.”

“토, 토리안은!”

미오네가 언성을 높였다. 자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토리안은…… 토리안을 만난 건가요?”

“토리안은 죽었어요.”

미오네가 입을 다물었다.

“어린아이를 인질로 붙잡고, 저보고 알레프 영지에 다가가지 말라고 종용하더군요. 그런 비겁한 수단에 타협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래서 죽였습니다.”

이제 할 말은 다 했다. 미오네의 반응을 기다릴 뿐. 과연 그녀는 얌전히 사실을 인정할까? 그렇지 않다면…….

“가, 각하. 자이안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미오네가 절박하게 백작을 돌아보았다.

“생각해보세요, 각하. 다른 사람도 아닌 자이안이랍니다? 쇠약증에 시달리며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연약한 아이라고요. 그런 아이가 암살자의 습격에서 살아남았다? 대륙을 횡단하고 세계수의 숲에 도착해 하이엘프의 가르침을 받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반격이었다. 명확한 물증을 준비하지 않는 이상 둘 중 어느 쪽의 말이 진실인지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미오네에게는 위조된 것이기는 하나 명확한 물증이 있었다. 그동안 1년 넘게 자이안의 필적을 위조해 백작에게 보낸 가짜 편지다.

“즉, 부인께서는 자이안의 말이 모조리 거짓이며 지금까지 리투안 공국에서 얌전히 요양 생활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리 말하는 거요?”

“훌륭한 통찰력이세요, 각하. 불쌍한 자이안. 아무리 가문의 후계자위가 탐났기로서니, 이런 볼썽사나운 행동을 하다니. 대체 누가 당신을 이리도 못난 아이로 가르친 건가요?”

기가 찬 나머지 백작은 실소를 뱉을 뻔했다. 자이안의 쇠약증이 나았다는 사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단순히 극복한 정도가 아니라,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신이 전력으로 임해도 도저히 승산을 점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그러나 미오네에게 그런 사실은 아무래도 좋으리라. 그녀는 불확실한 것을 믿지 않는다. 그녀를 꺾기 위해 필요한 건 명확한 물증.

“그렇다면 부인, 이걸 좀 보시겠소?”

백작이 품에서 서류를 한 장 꺼냈다. 내용을 살핀 미오네는 눈을 부릅떴다.

프리엔 제국 황제의 직인 선명하게 찍힌 서류였다. 황제가 자필로 그동안의 자이안의 행적을 증명하고, 자이안이 본인의 친우임을 공표하는 내용이었다. 구태의연한 미사여구 없이 직설적인, 그래서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부인께서는 총명하시니, 이 서류에 찍힌 직인이 진품임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으시겠지.”

“위, 위조된…… 직인일 수도…….”

“진심으로 하는 말이시오? 왕실의 감정사라도 초빙하오리까? 그렇게 해서 이게 위조가 아님이 증명되면? 그땐 감당할 수 있으시겠소, 부인?”

대답은 없었다. 미오네는 창백한 표정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며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보려 했으나, 사방이 완전히 막혀있었다. 활로를 찾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미리 준비했어야 했다.

“부인, 당신이 어떤 벌을 받아야 죗값을 치를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소. 그러니 우선은…….”

백작이 서류를 자이안에게 돌려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표정과는 달리 두 눈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찢어발길 듯 사나운 감정으로 이글거렸다.

“가문에 대한 부인의 모든 권리를 몰수하고, 부인을 별관의 일실에 유폐하겠소. 다른 명이 내려지기 전까지 단 한 발짝도 방에서 나가는 것을 금하고, 그 누구와 만나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소.”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미오네의 입김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접경지대에서 근무하며 오직 백작에게만 충성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붙들린 미오네가 힘없이 일어났다. 그대로 끌려가 사라지기 전까지, 그녀는 결국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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