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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2) (142/210)


142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2)
2023.02.22.


“이게…… 아니, 대체 어떻게.”

담담한 자이안과는 달리 알레프 백작은 할 말이 몹시 많은 듯했다. 그러나 얼마간 더듬거린 끝에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곤 무거운 한숨뿐이었다.

고개를 들자, 뒤편에서 용이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면에 착지한 그 몸이 빛에 휩싸이더니 이내 어린 소년으로 변했다.

다른 방향에서는 두 여성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한 명은 가벼운 경장, 한 명은 어울리지 않게도 시녀복 차림이다. 하긴, 여성 둘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기는 했다.

“일단 눈에 보이는 마물들은 다 정리한 것 같은데…… 혹시 아직 쓰러뜨릴 마물이 남아있나요?”

자이안의 질문은 굉장히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지금까지 적들에게 시달리고 제1 저지선을 포기한 자신의 결정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아마 당장은 괜찮을 거다.”

“다행이네요. 죽거나 다친 사람은요?”

“글쎄다. 기사단이 한 400명 정도.”

짧은 순간 자이안의 표정이 삐뚤어졌다. 조금만 더 일찍 올걸, 하는 후회였다.

사실 바로 접경지역으로 향할 생각은 없었다. 영지의 저택에 먼저 들를 생각이었는데, 멀리서까지 느껴지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마물의 냄새가 자이안을 이리로 이끌었다. 그 덕분에 피해가 400명 선에서 그쳤다고 할 수도 있었다.

“키가 좀 컸구나.”

짧은 순간 드러난 자이안의 그 표정에 백작이 평정심을 되찾았다. 자이안은 다소 뜬금없는 화제에 백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거야, 뭐. 1년이 넘게 지났잖아요. 한창 자랄 때이기도 하고.”

“말투도 좀 자유분방해졌고.”

“저택에서 멀어지고 나니 굳이 예의를 차릴 상황이 별로 없어서요.”

“혈색도 많이 좋아졌어.”

잠시 머뭇거린 백작이 가장 중요한 질문을 꺼냈다.

“쇠약증은…… 그 병은, 나은 게냐?”

“어때 보이세요?”

“그래. 나았구나. 하하. 그 병을, 나이아조차 이기지 못한 그걸, 네가 극복했어.”

그뿐만이 아니라, 아직도 듣고 싶은 건 산더미처럼 많았다. 처음이 어려웠지 한번 물꼬를 트고 나니 질문거리는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왔다.

그렇다고 이대로 황야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회포를 풀고 싶지는 않았다. 백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듣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구나. 괜찮다면 요새로 초대하고 싶은데, 어떻겠느냐?”

자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동료들도 같이 가도 괜찮다면요.”

“그럼, 그거야 얼마든지.”

몸을 돌린 백작이 기사들에게 뭐라 명령을 내리고 그들과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자이안은 그 뒤를 따르면서 백작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기쁘진 않은 모양이군. 그렇다고 원망스러운 것 같지도 않고.」

프레이의 질문이었다. 자이안은 백작의 등에서 시선을 떼고 잠시 뒤편을 돌아보았다. 반파되어 연기를 피워 올리는 제1 저지선. 강철의 초인인 줄 알았던 백작의 지치고 초췌한 얼굴색.

‘접경지대를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제1 저지선을 점령한 마물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나니 마물의 냄새 역시 적잖이 약해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저지선 너머 서쪽 머나먼 곳에서 아직도 역겨운 냄새가 희미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냥, 그동안 많이 힘드셨겠다 싶네요.’

자이안이 유년기 내내 미오네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인심을 장악하는 미오네의 능력도 물론 큰 축을 차지했다. 하지만 저택에 머무는 시기가 거의 없고 1년 중 대부분을 접경지대에서 생활하는 백작의 행동 역시 만만찮은 비중이었다.

저택을 떠나기 전, 자이안이 백작에게 쏘아붙인 ‘아버지로서는 별로였다’라는 말. 가주임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동향을 거의 신경 쓰지 못하는 그의 행동을 비판하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가문의 가주이기 이전에, 마물로부터 일리움을 지키는 방패일 수밖에 없었던 거겠죠.’

각성자로서 성장하며 그동안 수많은 마물들을 쓰러뜨린 자이안 일행이 특이한 것이지, 본래 마물은 사냥이나 토벌 대상이 아니다. 두려워하며 숨죽인 채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합리한 자연재해 같은 것이다.

고블린 한 마리를 쓰러뜨리는 것만 해도 평균적으로 정예병 3명이 필요하다. 백작과 휘하의 기사들이 설령 그보다 훨씬 강한 일당백의 전사라 쳐도, 접경지대를 지키면서 다른 일에 신경을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째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데. 그래서 저 아재를 용서해주겠다고?」

‘아재라뇨. 삼촌 입장에서는 매제라고 불러야죠. 아무튼, 용서고 자시고 저는 처음부터 아버지를 별로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서운한 감정이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다. 그러나 여정을 거치며 미오네에 대한 감정이 희석된 것과 마찬가지로, 백작에 대한 서운함도 이제는 사소한 것이 됐다.

「흥. 미적지근하긴.」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요. 제가 만약 여태까지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다고 해서, 지금 이 판국에 뭘 어쩌겠어요. 마물들 막느라 며칠은 제대로 잠도 못 잔 것처럼 보이는 분한테.’

프레이는 입매를 뒤틀며 침묵을 고수했다. 프레이라고 자이안한테 뭐 대단한 행동을 바란 건 아니다. 답답한 꼴을 보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래, 뭐.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대충 알겠다. 그럼 그건 됐고, 이따 나 잠깐만 불러봐라.」

‘……나와서 이상한 짓 하시면 안 됩니다?’

「이상한 짓이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이상한 짓만 하는 줄 알겠다. 그냥 매제 얼굴이나 한 번 직접 보고 싶어서 그래.」

프레이의 말에 자이안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여동생의 남편한테 이상한 짓을 하겠어?

제2 저지선은 제1 저지선에 비하면 다른 세상인 양 멀쩡해 보였다. 다만 요새 안은 바쁘게 돌아다니는 기사들과 사무관들 때문에 부산스러웠다. 제1 저지선 마물의 전멸 사실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각하! 왕실에 전언을 부탁할 사자가 곧 출발할 예정입니다!”

급히 다가온 기사 한 명이 빠르게 경례를 올리고 보고했다. 아, 하고 백작이 탄성을 뱉었다.

“그거 이제 안 가도 된다.”

“예?”

“쓸데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힘 빼지 말라고. 제1 저지선의 적은 전멸했다.”

“아니, 그게 무슨…… 어? 옆에 계신 분들은…… 자, 자이안 도련님?”

뒤늦게 자이안을 알아차린 기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애석하게도 자이안은 잘 모르는 얼굴이었다. 말없이 고개만 한 차례 숙이자, 기사는 화들짝 놀라며 재차 경례했다.

“단장들을 불러 모아라. 다른 애들은…… 일단 해산시키고. 당장 전투를 준비할 필요는 없으니, 푹 쉬라고 전해라. 지금 쉬면 애들이 얼마 만에 쉬는 거냐?”

“여, 열흘입니다.”

“고생 많았겠구만. 각 숙소에 술과 고기도 좀 넉넉하게 뿌려놔야겠다.”

얼이 빠진 기사를 놔두고 백작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일행도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우두커니 서 있던 기사가 뒤늦게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단장들 모아서 상황 설명하고, 저지선 복구하고…… 후, 할 게 많군. 아, 젠장. 그렇지, 자이안.”

갑자기 백작이 걸음을 멈췄다. 낭패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하며, 그가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고맙다.”

커다란 몸이 꾸벅, 깍듯하게 숙여졌다.

“네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저지선을 점령한 마물들을 어떻게 몰아내야 할지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을 거다. 어떻게 작전을 세워 실행한다 쳐도 아마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겠지. 성공하더라도 큰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을 거고.”

다시 허리를 편 백작이 솥뚜껑 같은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자이안의 어깨를 짚었다.

“고맙다. 너와 네 친구들의 행동이, 그 힘이 그 많은 희생을 구했다. 이 중요한 말을 까먹고 있다가 이제서야 떠올린 이 못난 애비를 부디 용서해다오.”

자이안은 잠시 멍하니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서운한 감정? 그런 건 이제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백작에게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자이안이 저택을 지나쳐 접경지대를 찾아온 목적은 달성되었다.

“여기까지 날아온 보람이 있었네요.”

자이안이 기분 좋게 웃었다.

* * *

“프레이 알코스다.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

백작의 그 말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이도 있었다.

각 요새에 딸린 귀빈용 응접실. 백작과 자이안 일행이 모두 모인 가운데, 새하얀 빛 속에서 프레이가 이죽거리며 걸어 나왔다.

백작은 얼이 빠져 입을 쩍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서로 소개를 마치고, 자이안에게 따로 더 소개할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그게 설마 이런 마법 같은 형태일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자이안? 언제부터 이런 마법을 부릴 줄 알게 된 거냐?”

“제법 됐어요.”

자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사이 빛의 기둥이 사그라지고 프레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장갑은 물론 부츠, 로브, 목걸이, 팔찌까지 전신을 아티팩트로 완전 무장한 상태였다.

“삼촌? 이상한 짓 안 한다고 하셨죠?”

“그래. 이상한 짓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삼촌? 자이안, 지금 삼촌이라고?”

둘 사이에 오간 자연스러운 대화에 백작의 눈빛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프레이가 주먹을 쥔 두 손을 가볍게 맞부딪치며 그를 돌아보았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 나이아 알코스의 쌍둥이 오빠, 프레이 알코스다.”

“알코스…… 라고……?”

고장난 장난감처럼 중얼거리는 백작에게 프레이가 다가갔다. 정신을 차린 백작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멍청히 있을 수는 없었다.

두 남자가 가까이 마주 섰다. 프레이의 얼굴을 살핀 백작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삼켰다. 삐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프레이의 얼굴에 그리운 모습이 선명하게 겹쳐졌다. 피가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닮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맙소사, 이게 어떻게…… 대륙 곳곳을 그토록 뒤졌건만 제대로 된 단서조차 찾지 못했는데.”

“의외로 쉽게 믿는군.”

“뻔히 보이는 현실을 눈앞에 두고도 믿지 못할 만큼 미련하지는 않소.”

“그래? 잘 됐군. 말이 잘 통하겠어.”

프레이가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세게 틀어쥐었다.

“이건 나이아의 몫.”

콰앙! 공성 병기가 성벽을 때리는 것만 같은 엄청난 굉음이 났다. 호리호리한 체구로부터는 상상할 수도 없는 괴력으로 복부를 얻어맞은 백작이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허리를 꺾었다.

“그 녀석이 죽은 게 네 탓은 아니었겠지. 하지만, 이 망할 새끼. 고작 1년 만에 나이아를 잊고 아내를 갈아치워?”

“그, 그건…… 쿨럭, 왕실의…….”

“아가리 다물어라. 아직 하나 남았으니까.”

프레이가 다시 주먹을 뒤로 당겼다.

“이건 네 손으로 내쫓은 네 자식, 자이안의 몫.”

꽈아앙! 처음보다도 훨씬 큰 굉음이었다. 안면을 얻어맞은 백작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뒤로 훅 날아가, 석벽에 부딪히고서야 멈춰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야 좀 후련하네.”

프레이가 얼얼한 두 손을 털며 홀가분하게 말했다. 얼이 빠져있던 자이안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촌! 제가 이상한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게 왜 이상한 짓이야? 빚을 갚아준 것뿐인데.”

자이안은 한숨을 삼키며 백작에게 달려갔다.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그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자이안이 프레이를 흘겨보며 눈으로 타이르자, 그는 흥 하고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야, 솔직히 말해봐. 너도 좀 후련했지?”

멈칫, 백작을 부축하던 자이안의 행동이 멈췄다.

“…….”

자이안의 선택은 모른 척 침묵하는 것이었다. 그 어떤 말보다도 확실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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