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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1) (141/210)


141화 일리움, 그리고 알레프 영지(1)
2023.02.21.


일리움 서쪽. 대지에 선을 긋듯 길게 늘어선 성벽으로 가로막힌 땅, 복마전.

마가 잠든 땅이라 일컬어지는 그곳에 얼마나 많은 마물이 존재하고 있는지, 땅이 얼마나 넓은지, 어떤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복마전을 조사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지금에 와서는 이를 알고자 하는 이들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확실한 것은 오직 하나.

그 안에 잠든 마가 결코 밖으로 퍼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마물이 너무 많습니다! 이 이상 전선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요! 단장님!”

“그래서 이대로 놈들에게 길을 터주겠다는 소리냐! 우리가 도망치면 다음에 놈들의 표적이 되는 건 우리 가족이다! 우는소리 하지 말고 무조건 버텨!”

아비규환의 전장. 헤아릴 수도 없는 마물의 떼가 성난 파도처럼 성벽을 두드린다. 성문은 이미 뚫린 지 오래. 요새 내부는 침입해 온 마물들과 기사단이 뒤섞여 혼전을 이루고 있었다.

“후퇴! 전원 후퇴! 후퇴 명령입니다!”

“뭐?!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진형을 유지하고, 적의 추적을 뿌리치며 제2 저지선까지 후퇴! 마물들은 제1 저지선에 가둬놓고 반격을 준비! 백작 각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입니다!”

복마전을 틀어막는 제1 저지선이 뚫렸다.

마지막으로 저지선이 돌파되었던 것이 약 350년 전. 그 이후로 알레프 가는 단 한 번도 적의 침공을 허용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당대 변경백의 역량이 부족했는가? 혹은 기사단의 전력이 미비했나?

어느 쪽도 아니다. 당대 변경백 페르지오 알레프는 그 일신의 무력이 신화적인 영웅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며 칭송받았다.

그가 직접 가혹하게 단련시킨 변경 수비 기사단 역시 역사상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할 만큼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지선이 돌파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했으니까.

“각 기사단장, 상황 보고를.”

“제1 요새부터 보고드리겠습니다. 7일 전, 제6종 마물 경보에 준하는 적 병력이 요새를 습격하였으며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제1 저지선의 방위를 책임지는 9개의 요새. 그 모든 요새가 동시다발적으로 마물의 습격을 받았다.

본래 마물의 습격은 이렇게 대규모로, 동시에 이뤄지지 않는다. 기껏해야 한 군데, 많아도 두 군데의 요새의 병력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을 정도.

알레프 백작이 모든 전장에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척후병이 먼저 적의 준동을 감지하면, 습격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요새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참전하면 되니까.

그러나 이번 침공은 기존과는 완전히 양상이 달랐다. 말하자면 전력전, 혹은 섬멸전. 가용한 모든 병력을 쏟아 부어 적을 흔적도 없이 전멸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왕실로부터의 답은 어떤가?”

“그것이…….”

회의실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상석에 앉은 알레프 백작은 어쩐지 뒤이은 대답이 예상되었다.

“당장 지원 병력을 보낼 수는 없다고 합니다.”

꽈직! 탁상 모서리가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부서졌다. 백작은 손아귀에 쥔 나무 파편을 내버리며 한숨을 삼켰다.

“그래. 뭐라고 변명하더냐?”

“옛 문헌에 따르면 일리움과 알레프는 상호존중을 기반으로 하는 불가침의 관계를 유지해 온바, 자신들의 행동이 알레프에의 존중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어 저어된다…… 라고 합니다.”

“호오. 폐하께서 머리를 제법 잘 쓰셨군.”

다시 한번 책상 모서리가 힘없이 부서졌다.

왕실의 의중은 구태여 헤아릴 필요도 없이 뻔히 보였다. 알레프 쪽에서 먼저 굽히고 들어오지 않으면 지원 병력은 보내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게 제 무덤을 파는 짓임을 정녕 모르시는 겁니까, 폐하?’

알레프가 무너지면? 1만이 넘는 마물의 군세가 일리움 본토를 유린한다. 왕실에 마물 떼를 일소할 수 있는 무슨 대단한 비밀 병기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멍청하게 신경전이나 벌이고 있어서는 안 됐다.

“다시 한번 지원을 요청해봐라. 지금이 얼마나 위기 상황인지 알 수 있도록 자세한 상황 설명도 덧붙여서. 제때 지원을 보내지 못하면 일리움 전체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다고 확실히 주지시켜.”

“그건 협박이지 않습니까, 각하.”

“알 게 뭐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걸 구경만 하고 있을 기센데. 자잘한 마찰 같은 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가장 확실한 건 백작이 직접 왕실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가장 강한 전력이기도 한 백작이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열세인데, 그의 자리가 구멍으로 비면 정말로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된다.

‘자이안이 이 꼴을 못 봐서 차라리 다행이군.’

한숨과 비웃음을 함께 삼키며, 백작은 멀리 떨어져 있을 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도 때때로 그 결정이 후회되고는 했다.

안 그래도 아픈 아들을 멀리 떠나보내는 게 정말 옳은 선택이었을까. 왕실에 대놓고 미운털이 박히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미오네와 담판을 벌여 자이안의 입지를 지켜야 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는 왕실의 견제와 미오네의 횡포를 생각하면, 이게 최선이라는 생각도 강하게 들었다. 물론 자이안은 자신을 원망하겠지만.

‘내가 내내 저택에 머무르면서 부인의 행동을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적이 언제 습격할지 예측할 수 없는 복마전의 특성상, 알레프 백작이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 시간은 1년 중 많아야 30일 남짓. 이동에 걸리는 시간 등을 감안하면 실제로 저택에 머무르는 날은 20일 정도다.

지금까지 미오네의 횡포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던 이유다.

‘되도록 빨리 자이안을 복귀시킬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이리된 이상 왕실의 대가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나이아가 살아있었더라면. 그녀라면 진퇴양난처럼 느껴지는 지금 상황 역시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

‘……내가 많이 시달리기는 한 모양이군. 그 사람 생각은 되도록 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백작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허튼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때였다. 다급한 노크와 함께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기, 긴급 보고입니다!”

백작이 고개를 들고 눈초리를 좁혔다. 지금 상황에서 긴급 보고? 도저히 좋은 일일 거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마물들이 이상한 행동이라도 벌이기 시작했나? 아니면 또 왕실이 같잖은 수작을?

그러나 보고 내용은 그 어느 쪽과도 달랐다.

“요, 용입니다!”

백작은 자기가 앞말을 귀담아듣지 않아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도 아니면 스트레스가 지나쳐 순간적으로 머리가 이상해졌거나.

“용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서쪽에서부터 똑바로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습니다!”

둘 다 아니었다. 이상한 건 백작이 아니라 보고 내용이었다.

* * *

짙은 마물의 냄새에 코가 삐뚤어질 것만 같았다. 자이안은 케이의 머리 위, 두 뿔 사이에 우뚝 선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노려보았다.

“케이, 슬슬 속도를 늦춰줘. 착지할 만한 장소를 찾아봐야겠어.”

-알았어!

속도를 늦추자 지상의 모습이 더욱 확실히 보였다. 복마전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4겹의 성벽. 그 중 첫 번째 성벽이 마물의 군세에 점령되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물들은 파괴할 만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성벽과 요새를 뒤지고 있었다. 생존자는 없었다.

“케이. 저쪽으로.”

손에 쥔 펜던트가 대검의 모습으로 변했다. 자이안은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적개심을 구태여 억누르지 않았다. 다만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렸다.

다음 순간, 자이안이 뛰어내렸다.

요새를 지나쳐 제2 저지선 쪽으로 향하려는 트롤의 머리 위에 스펙트럼이 유성처럼 내리꽂혔다. 쿠웅! 충격에 지면이 움푹 파이고,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진 트롤의 시체가 깊이 처박혔다.

케이가 공중에서 선회하며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이어 유리아와 소아레스 역시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마물들이 마침내 새로운 적의 등장을 알아차렸다. 살의가 가득한 수백, 수천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자이안이 허리춤에 맨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내용물을 마셨다. 제국에서 시제품을 완성하고, 이후로도 여러 번 개량을 거친 강화 포션이었다. 감각이 세밀해지며 MP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오로라가 칼날을 감쌌다. 새하얀 빛의 검이 하늘을 뚫을 듯 높이 치솟았다.
오직 마물만을 파괴하는 빛의 파도가 지면을 타고 뻗어나가 요새를 덮쳤다. 마물의 냄새가 조금 옅어졌다.

‘두 번 정도 더 쓸 수 있겠는데.’

MP 제어를 안정시키는 포션의 효능은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본래 한 번만 써도 스펙트럼에 박대한 부하를 거는 성검을 최대 세 번까지 연속으로 쓸 수 있게 됐다.

‘저쪽 요새는 괜찮겠고.’

자이안이 요새 하나를 성검으로 정리하는 사이에 유리아와 소아레스는 다른 요새로 향했다. 광역 공격이 안 되니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자이안은 둘을 믿고 다른쪽 요새로 향했다.

꼼꼼하게 마물을 섬멸하는 도중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럴 시간에 마물을 한 마리라도 더 쓰러뜨렸다.

‘놈들이 이변을 눈치채고 움직일 시간을 줘서는 안 돼.’

지금 마물들은 대부분 제1 저지선의 요새 안에 머물고 있다. 분명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것이리라. 한 곳에 가둬져 있으면 움직임을 파악하기 쉬우니까. 덕분에 자이안도 섬멸하기가 훨씬 편했다.

-자이안. 이쪽은 요새 3개를 정리했어. 성벽이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여기가 끝인 것 같아.

-잘했어요. 나머진 제가 정리할게요.

유리아의 통신을 듣고 더욱 속도를 올렸다. 두 번 남은 성검도 아낌없이 사용했다. 스펙트럼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으나, 칼날을 쓸며 조금만 더 참으라고 타일렀다.

공중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케이도 참전했다. 요새 하나를 목표로 그대로 내리꽂혀,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몸으로 잔해와 함께 휘말린 마물들을 통째로 깔아뭉갰다.

남은 마물들을 앞발로 찢어발기고, 턱으로 물어뜯고, 마지막으로 다시 날아오르며 이글거리는 숨결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알레프 백작은 넋이 나간 얼굴로 지켜보았다.

“용이…… 우리를 돕고 있군. 아니, 그게 아니라…….”

자기가 말해놓고도 웃기는 소리다 싶었다. 그러나 더 웃기는 건 용이 아니라 다른 요새의 상황이었다.

단 한 명. 농담 같은 속도로 마물들을 쓰러뜨리며 제1 저지선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백작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는 분명 백작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윽고 제1 저지선의 섬멸이 끝났다. 저지선 전체를 점령하며 약 1만에 이르렀던 마물들이 모두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20분가량.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펜던트로 되돌려 목에 걸고 등을 돌렸다.

멀리 중무장한 기사들 사이에 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자이안의 얼굴이 삐뚤어지며 화를 내는지 웃는지 모를 묘한 표정이 만들어졌다. 한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의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대변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냐?”

작게 말해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가장 처음 들은 말이 그것이었다. 자이안은 피식 웃으며 상대를 마주 보았다. 마주친 시선이 힘없이 떨렸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마주하자, 의외로 그렇지도 않았다. 자이안은 그저 담담하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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