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조여오는 악연 (140/210)


140화 조여오는 악연
2023.02.20.


영지 외곽의 허름한 폐촌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그렇다고 따로 정리되지도 않은 채 방치된 곳. 영주로부터 도망친 영민들이 본래는 바로 이곳에 살았다.

‘……왔군.’

멀리서부터 가까워져 오는 인기척이 둘 느껴졌다. 토리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자, 부하들이 비수를 꺼내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바깥을 경계해라. 넷은 아이를 붙잡고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 나머지는 나와 함께 자이안을 위협한다.”

부하들이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곧 두 사람이 폐촌 가운데의 공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이안을 데리러 간 전령, 그리고 자이안 본인.

“흐음.”

팔짱을 낀 자이안이 가볍게 콧소리를 냈다. 토리안은 의아함에 인상을 썼다. 자이안의 태도가 너무 침착했다. 마치 아이 한 명의 목숨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것처럼.

“어라, 당신.”

자이안의 시선이 토리안에게 향했다.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자이안이 이내 낮게 탄성을 뱉었다.

“익숙한 얼굴이네요. 분명…… 미오네의 호위 기사였던 것 같은데. 토리안이었죠?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어요?”

“미오네 부인이다. 경칭을 붙여라, 자이안 알코스.”

“제가 존경하는 어떤 분이 그러시길, 경칭이라는 건 존경할 여지가 있는 상대한테만 붙이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 말은 미오네에게는 존경받을 가치가 없다는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말이 은유지, 사실상 대놓고 비꼬는 격이었다. 칼자루를 쥔 토리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하하. 기분 나쁜가 봐요. 근데 이상하지 않아요? 지금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건 저 같은데.”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이 아이는…….”

“죽일 거라고요? 해보세요.”

자이안이 팔짱을 풀었다. 그게 다였다. 검을 뽑은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주먹을 쥐지도 않았다. 애초에 무기를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리안은, 그리고 암살자들은 코앞에 흉포한 곰이 나타난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해보라니까요.”

“…….”

“그 뒤에 당신들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면, 해보세요.”

“……우린, 무의미하게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을 원하는 게 아니다.”

“아, 그래요.”

제대로 듣기나 했나 싶을 만큼 건성인 대답이었다.

“뭘 원하는지 한 번 얘기해보세요. 들어나 보게.”

“알레프 영지에 다가오지 마라. 이 이상 부인을 괴롭히지 마.”

움찔, 자이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토리안의 말은 웃길 정도로 모순이었다.

“반대예요. 미오네가 저를 괴롭힌 거죠.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원하는 대로 가문을 떠나기까지 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건 왕국을 위한 결정이었다.”

토리안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자이안은 문득 과거에 본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전장에서,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신의 이름을 부르짖은 광신도들.

“알레프는 복마전으로부터 왕국을, 나아가 인류 전체를 수호하는 유일한 보루다. 어떠한 결점 없이 마물의 위협을 막아낼 수 있어야 한다. 자이안 알코스. 지난날의 네가, 불치병에 시달리며 언제 죽을지도 알 수 없던 네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불가능했겠죠. 알아요. 그래서 미오네가 아버지와 결혼해서, 바란드를 낳았잖아요. 그걸로 된 거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그 시절의 자이안은 억울하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나이아의 가르침을 지키며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속마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속마음이 아무리 그렇더라도. 끝까지 쇠약증을 고치지 못하면 바란드에게 후계자위를 넘겨줄 각오는 이미 되어 있었다. 쇠약증이 자기 몸을 얼마나 가혹하게 좀먹고 있는지 가장 잘 아는 건 바로 자이안 본인이었으니까.

“그래도 만족을 못 해서 저를 가문에서 쫓아내고, 아예 사고로 위장해서 죽이려 들었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었는데도.”

“부인께서는 혹시 모를 화근을 막고자 하셨다.”

“그건 피해망상이에요.”

토리안이 움찔 입을 다물었다. 자이안의 말은 가차 없이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미오네는 그냥 제가 무서웠던 거예요. 저의 뭘 보고 그렇게 무서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부인께서는 다만 합리적인 판단으로 너를 제거하려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합리적인 판단이 모든 일을 그르치게 됐네요. 저는 살아남았고, 쇠약증을 고치고 강해졌으며, 과거를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토리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이안의 말대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결코 살아남아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자이안이 살아남은 그때부터, 모든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미오네는 차라리 제게 솔직하게 용서를 구했어야 했어요.”

“만약 그랬다면…… 부인을 용서해 줄 생각이었나?”

“그건 모를 일이죠. 하지만 적어도 지금과 같은 기분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자이안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레프 영지로 가서 미오네를 만나고, 미오네와 아버지에게 모든 진실을 알릴 겁니다. 그래서 그녀가 반드시 죗값을 치르도록 할 거예요. 어떠한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아무 징조도 없이 인기척이 느껴졌다. 토리안이 흠칫 놀라며 돌아보는 것보다도 먼저, 네이트를 지키고 있던 네 명 중 둘이 온몸을 경련하며 쓰러졌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남은 둘의 등 뒤로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접근했다. 유리아가 단검의 칼자루로 관자놀이를 후려치고, 소아레스가 목덜미에 마비 독 바늘을 찔렀다. 둘 역시 앞선 두 명과 똑같은 처지가 됐다.

“죽여도 괜찮아요. 하지만 한 명은 살려야 합니다.”

뒤이어 자이안이 움직였다.

토리안이 다시 앞을 돌아본 순간, 자이안은 소리도 없이 그의 코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스펙트럼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정확히는, 이런 일에 뽑고 싶지 않았다.

손날을 만든 자이안이 내력을 순환시켰다. 그리고 일순간만 날카롭게 방출하며 토리안의 팔다리를 잘랐다.

“……!”

토리안의 두 눈이 치밀어 오르는 격통으로 시뻘겋게 충혈됐다. 자이안은 이를 악문 채 고통을 참고 있는 그의 목을 붙들고 절단면을 대충 치유했다. 살이 뒤틀리며 아무렇게나 자라 상처 부위를 막았다.

“당신은 쉽게 안 죽일 겁니다.”

차갑게 말하며 그를 내던지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짧은 사이에 암살자들은 대부분 죽거나 기절해 거의 정리가 끝나 있었다.

아직 살아있는 세 명 중에서, 가장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한 명을 골랐다. 다시 내력을 순환시킨 자이안이 양 주먹을 동시에 내질렀다.

쏘아져 나간 백보신권이 목표를 제외한 남은 두 명을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짓이겼다.

“당신.”

“히, 히이이이이……!”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한 명과 눈이 마주친 순간 상대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곧장 그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걱정 마세요. 당신은 살 수 있어요.”

“흐, 흐으, 흐으……!”

“제대로 대답만 한다면요.”

“아, 알겠, 습, 습니다! 사,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했어요.”

자이안이 그에게 다가가며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당신에게 시킬 일이 하나 있어요. 위험한 일은 아니에요. 이것만 잘 해내면 당신은 놓아줄게요. 하지만 만약 이 위험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일조차 해내지 못하면, 저흰 당신을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죽일 거예요. 알아들었나요?”

“네, 네! 네에에! 자, 잘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미오네에게 가세요.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수단으로. 가서 자이안이 돌아왔다고, 당신을 찾아갈 거라고 전해요.”

남자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이 한 차례 유리아와 소아레스에게 시선을 주자, 둘은 조용히 남자를 풀어주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속도로 달려 사라졌다.

“좀 불안한데. 제대로 전해줄까?”

“사실 제대로 안 전해줘도 상관없긴 해요. 그냥 보험이죠.”

동시에 미오네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이기도 했다.

“토리안. 몸은 좀 어때요?”

자이안은 마지막으로 흙바닥에 널브러진 토리안에게 향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충혈된 눈으로 자이안을 노려볼 뿐이었다.

“당신에게 듣고 싶은 게 제법 많은데. 대답해준다면 팔다리를 고쳐줄 수도 있어요.”

“어림도…… 없는, 소리……!”

예상 그대로의 대답이었다. 자이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먹을 쥐었다.

“미오네 부인께서는…… 이 일을, 몰라.”

그를 올려다보며, 토리안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뭐라고요?”

“이 모든 건, 내가 독단으로 행한 일이다. 부인께서는 지금 네가 리투안 공국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라.”

“…….”

자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미오네를 용서하라?”

토리안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은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주먹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꽉 넣었다.

“용서라는 건…….”

자이안이 주먹을 내리쳤다.

“남에게 강요받아서 하는 게 아니에요.”

가슴께가 함몰된 토리안이 몇 번 밭은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숨소리가 가늘어지고, 어느 순간 완전히 꺼졌다. 자이안은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일어섰다.

「쯧. 표정 펴라. 어쨌든 잘 해결됐잖아.」

소아레스가 다가와 젖은 수건으로 자이안의 여기저기에 묻은 혈흔을 닦아주었다. 정중한 손길을 느끼며, 자이안은 작게 한숨을 뱉었다.

「미오네가 시킨 게 아니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서 그러냐?」

자이안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그녀를 용서할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괜히 마음속에 불필요한 돌덩이 하나를 얹은 기분이었다.

‘미오네 얼굴을 직접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요?’

「글쎄다. 보통 둘 중 하나이기는 하지. 후련해지거나, 더 기분이 나빠지거나.」

‘전자이길 바라야겠네요.’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뱉고, 자이안은 네이트를 안아 들었다.

“유리아도 소아레스도, 도와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안전하게 네이트를 구할 수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감사를 전한 뒤, 자이안은 영주 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토리안의 계획을 저지하고 그들을 죽였지만, 모든 위협을 뿌리 뽑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자이안은 미오네의 휘하에 몇 명이나 되는 암살자가 있는지도 몰랐다.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직 적이 한참이나 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죄송해요, 아저씨. 괜히 제가 붙잡히는 바람에…….”

네이트는 자이안이 예정보다 일찍 떠나게 된 이유를 자기 탓으로 되돌리며 자책했다. 자이안이 그녀를 어르고 달래며 거의 하루 종일 붙어 다닌 끝에야 간신히 기분을 풀 수 있었다.

“걱정 마렴, 네이트. 너도 잘 알다시피, 나는 엄청 강하거든. 금방 해결하고, 다 정리하고 나면 나중에 시간 내서 또 올게.”

“그럼…… 이번에도 약속, 할 수 있어요?”

자이안은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네이트와 손가락을 걸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네이트의 얼굴에도 곧 환한 미소가 걸렸다. 약속을 나눈 뒤, 네이트가 자이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기다릴게요. 이번에도 약속 꼭 지켜주세요.”

그러고는 기습적으로 자이안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자이안이 놀라서 바라보자, 네이트는 그대로 쪼르르 도망치더니 체지스 영감의 등 뒤에 숨어버렸다. 멍하니 뺨을 매만지던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거 범죈데.」

「프레이이이? 이런 훈훈한 장면에서 꼭 그런 개소리로 초를 쳐야겠어어?」

「뭐, 왜. 뭐. 사실이잖아. 소아 성애가 얼마나 큰 범…… 윽엑!」

「아저씨 그런 농담 진짜 저질인 거 알아요?」

유민이 자비 없이 프레이의 뒤통수를 후려쳐 응징했다.

“유리아 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어린아이이지 않습니까.”

“흐헤?! 나, 나 아무 생각 안 했는데?”

소아레스의 말에 유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자이안은 뒤쪽에서 오가는 대화에는 집중하지 않고 체지스 영감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빈말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한번 찾아올게요.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북극 산맥 너머 정리하는 것도 1년밖에 안 걸렸는데요.”

“그래. 내가 너 걱정하는 건 주제넘은 짓인 거 같고…… 얼른 할 일 끝내고 찾아오거라. 기다리고 있으마.”

성 뒤편에서 환한 빛과 함께 거대한 용이 본모습을 드러냈다. 날아서 가면 훨씬 빠른데 굳이 마차를 탈 필요가 있냐며 케이가 자진한 것이다.

자이안은 친구의 등을 타고 간다는 사실이 조금 미안했지만, 본인이 좋다고 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어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이안! 짐 다 실었어!

심지어 이번에는 준비도 자기 손으로 다 끝내 놨다. 신이 난 케이의 목소리에 자이안은 쓴웃음을 삼키며 그의 등에 올라탔다.

용이 날개를 홰치며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목격한 영민들이 두려움에 떨며, 혹은 경외감에 젖으며 저마다 얘기를 나눴다.

영주의 성에서 용이 나타나 서쪽으로 날아올랐다.

그 사실이 후대에 어떻게 전해질지는 후대의 사람들만이 알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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