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체지스 이오자렌, 그리고 네이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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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체지스 이오자렌, 그리고 네이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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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체지스 이오자렌, 그리고 네이트(2)
2023.02.19.
사실, 체지스 영감이 반드시 영주가 될 필요는 없었다.
본인이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러면 옛 판례를 억지로 상황에 끼워 맞출 필요 없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통치하면 된다. 그러나 체지스 영감은 스스로 그 자리를 짊어지기를 택했다.
“화전민 몇십 명 짊어지는 것도 무거워서 어깨가 빠질 뻔했는데, 이젠 몇천 명의 목숨을 짊어져 달라니. 다들 늙은이를 괴롭히고 싶어서 아주 환장을 했어, 그냥.”
그리 툴툴거리면서도 체지스 영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내가 시작한 것이니, 끝까지 내가 책임을 지는 게 도리에 맞지 않겠느냐?”
자이안은 그 모습이 어쩌지 눈이 부셔서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나 같은 늙은이 얘기는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 네 얘기를 좀…… 오, 잠깐. 이런, 내가 깜빡 잊어버릴 뻔했군.”
갑자기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자이안은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소개할 아이가 있다. 아마 네게도 아주 반가운 얼굴일 거다.”
체지스 영감이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문을 열었다. 그리고 웬 어린아이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처음 보는 아이다. 아주 잠깐 자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체지스 영감에게 바짝 붙어서 시선을 내리깔고 쭈뼛거리는 그 아이에게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하고, 자이안은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이트!”
아이가 시선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에 비하면 몰라볼 만큼 키도 크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앙상하던 그때와 달리 건강하게 살집도 붙어 있었다. 어린아이의 태를 완전히 벗지는 못했지만, 제법 여성스러운 분위기도 났다.
“세상에, 오, 맙소사! 네이트! 정말 네이트야?! 와, 어쩜 이렇게 키가 컸니?”
네이트에게 다가가며 말을 꺼냈다가, 자기가 한 말에 웃음이 치밀어올랐다. 그렇구나, 오랜만에 자기를 본 사람들이 바로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 기분을 이해하자 더욱더 반가움이 솟구쳤다.
“아, 아저씨…… 저 기억하고 계세요?”
“물론이지! 하하하, 내가 널 잊어버릴 리가 없잖아!”
자이안이 네이트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고 그대로 훌쩍 들어 올렸다. 히엑, 하고 소녀가 작게 비명을 터뜨렸다. 자이안은 연신 웃으며 아이를 품에 깊이 안았다. 빼빼 말라 나뭇가지처럼 가볍던 그때와는 달리 제법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 자수…….”
네이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자이안이 두르고 있는 망토의 가슴께, 불꽃과 검과 야생화의 자수를 알아본 것이다.
“정말로…… 기억해주셨네요.”
네이트의 얼굴에 꽃이 피듯 미소가 피었다. 비로소 긴장을 벗어던진 듯, 그녀는 망토의 자수에 얼굴을 묻으며 감정이 북받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진짜, 진짜 엄청 보고 싶었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할아버지가 저를 고용해 주셨어요. 저 말고 다른 마을 어른들까지 전부요. 지금은 다 같이 성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높은 지위는 아니고 잡일을 도맡는 하인의 위치였지만, 대신 안정적인 급여와 잠자리가 제공되었다.
폭정을 못 견뎌 한 번은 도망쳤던 이들이다. 고향을 떠나지 못해 폭정을 감내하며 살았던 다른 영민들과 알력이 발생할 수도 있었는데, 이를 영리하게 해결한 것이다.
“고마워요, 촌장님. 덕분에 반가운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됐네요. 아, 이제는 영주님이라고 불러야겠죠.”
“됐다. 너한테까지 그런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으니, 그냥 대충 영감님이라고 불러라.”
“하하. 그럼 그럴게요.”
새롭게 네이트가 합류한 식사가 그로부터 얼마간 더 이어졌다. 네이트는 자이안의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달라붙다시피 했다.
“네이트, 요 녀석. 갑자기 왜 이렇게 얌전하게 굴어?”
“네? 저, 저는 원래 얌전했어요. 이상한 말씀 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가끔 그녀는 자이안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옆에 앉은 유리아에게 호기심이 섞인 시선을 향하기도 했다. 눈이 마주치자 유리아는 배시시 웃고, 네이트도 수줍게 웃었다.
“잠자리를 준비해 두마. 원하는 만큼 푹 쉬거라.”
“그러면 며칠만 신세 지겠습니다.”
비록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지만, 자이안은 체지스 영감의 호의를 솔직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일리움까지는 이제 바로 지근거리였다. 굳이 시간에 쫓기듯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미오네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우려되기는 했으나, 세계수의 숲에서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런 조짐도 없었던 것을 보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며칠이 지났다.
“자이안. 혹시 네이트를 보지 못했느냐?”
그게 방심이었음을 깨닫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 * *
세계수의 숲에 보낸 부하들과의 연락이 두절된 이후로, 토리안은 그간의 자이안의 행적을 다시 한번 샅샅이 조사했다.
국경 인근의 숲에서 시작해 루핀고르 영지, 웨코스, 제국, 보석탑과 법왕국에 이르기까지. 자이안의 행동에는 일관된 법칙이 있었다.
그는 강박적이리만치 이타적으로 행동했다. 그가 겪은 모든 사건은 사실 그냥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쳐도 되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구태여 거기에 발을 들여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길을 골랐다.
‘그야말로 영웅적이군.’
토리안은 자이안의 힘과 성정, 그가 이룬 업적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바로 거기에 약점이 있을 거다.’
강박적으로 타인을 구하기 위해 애쓴다면, 자신과 타인의 목숨이 저울에 걸렸을 때 어떤 선택을 취하게 될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대량으로 인질을 잡을 수는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 그런 눈에 띄는 짓을 벌이면 덜미가 잡힐 여지가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리움과 타국 간의 외교 갈등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애초에 그럴 만한 인력이 없었다. 토리안과 수하들은 첩보와 요인 암살에 특화된 소수 정예였으니까.
‘가장 효과적인 인질을 붙잡고, 상황을 만든다.’
계획을 세우는 와중, 자이안이 바다를 건너 서대륙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웨코스 중부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남쪽으로 내려가 항구도시에 잠시 머무른 다음 다시 북쪽으로 향하는 경로를 그리고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게 남부 항구도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상한 일이기는 해도 계획에 변수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웨코스에서 계획을 실행하는 건 시기를 맞추기가 어렵겠군. 그렇다면.’
갖가지 변수를 계산하며, 자이안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쭉 북상한 그는 예측대로 일리움의 인접 국가인 리투안 공국의 루핀고르 영지에서 이동을 멈췄다.
영지에서 도망친 화전민들이 다시 돌아오고, 부패가 폭로된 영주가 실각했다는 등의 사건을 알게 된 것은 한 달쯤 전이다.
타국의 그런 사소한 일을 일일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화전민들의 입에서 ‘자이안’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그럴 수도 없게 됐다.
‘네이트라는 어린아이가 특별히 자이안과 친하게 지냈다고 했지.’
사전 조사를 철저히 마치고 마침내 목표를 정했다. 그다음에 할 일은 차라리 간단했다. 여자아이 한 명을 납치하고 그 사실을 자이안에게 전하는 것뿐.
지금까지는 이런 일을 부하들에게만 맡겼으나, 이번만은 토리안이 직접 루핀고르 영지로 향했다. 계획의 확실한 성공을 위해.
그리고 만약에라도 실패한다면, 그 이유를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저쪽에 알려졌습니다.”
영주성의 동향을 감시하는 부하가 찾아와 보고했다. 토리안은 말없이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등 뒤, 딱딱한 흙바닥에 네이트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약을 써서 잠들게 했을 뿐, 아직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멀쩡했다. 철저하게 암살자로서 교육받았다고는 해도 어린아이를 죽이는 건 다소나마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이안과의 협상이 결렬된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토리안이 자이안에게 어려운 걸 요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미오네에게 신경 쓰지 말고, 알레프 가와 더 이상 엮이지 말고 제 갈 길 가달라고 하는 게 전부다.
“자이안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보고가 전해졌다. 토리안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획을 시작하자.”
* * *
처음에는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물건을 사러 심부름을 나갔다가 잠시 다른 길로 샜겠지, 그 정도였다. 아직 어린아이니까 그래도 이상할 건 없었다.
“자이안. 흔적이 부자연스럽게 끊어져 있어.”
그러나 네이트를 수색하던 유리아와 소아레스의 말을 들은 뒤로 생각을 고쳤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흔적을 감추려 한 듯 보입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네이트를 납치했다는 뜻이었다.
“흔적을 쫓을 수 있을까요?”
“별로 어려울 건 없지.”
“맡겨만 주십시오.”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다시 흩어지고, 자이안도 따로 네이트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갖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중에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미오네의 존재도 있었다.
「나름 머리를 잘 썼군. 근데 반만 썼어.」
만약 미오네가 네이트를 납치한 것이라면, 이를 통해 자이안과 협상을 하려는 것이라면 프레이의 말대로 반만 생각했다고밖에 표현할 여지가 없었다.
‘만약 이게 정말 미오네의 짓이라면,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타협하지 않을 겁니다.’
자이안은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미오네가 더 이상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든가, 뭐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자이안은, 큰 목표를 앞두고 미오네라는 사소하고 귀찮은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자이안 알코스.”
때문에 자이안은 눈앞에 갑자기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나 자기 이름을 부른 순간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네이트라는 아이의 행방을 찾고 있나?”
자이안은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네이트를 당신들이 데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당신들은 미오네가 시켜서 보낸 거고, 네이트를 인질로 삼아서 저와 협상을 하고 싶고?”
단숨에 쏟아지는 말에 눈앞의 남자가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자이안은 팔짱을 끼고 아무렇게나 턱짓을 했다.
“긴말은 필요 없으니까 어서 안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