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체지스 이오자렌, 그리고 네이트(1)
(138/210)
138화 체지스 이오자렌, 그리고 네이트(1)
(138/210)
138화 체지스 이오자렌, 그리고 네이트(1)
2023.02.18.
“고속선을 타도 한 달은 넘게 걸리는 거리를 단 하루 만에 돌파하다니.”
소아레스는 얌전히 바닥에 엎드린 케이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짐을 모두 내리자 케이는 목을 길게 세우고는 가볍게 몸을 한 차례 털었다. 이내 거대한 몸이 새하얀 빛에 휩싸이고, 평소의 어린아이 모습으로 변했다.
“후우! 오랜만에 원 없이 날았더니 기분 좋다.”
그가 쭉 기지개를 켜며 개운하게 말하는 사이 마차가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일행들 모두가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서쪽 끝으로 향하는 여정도 어느새 목적지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있었다.
「여기선 어쩔 셈이냐? 딱히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한 사람도 없을 텐데.」
케이가 도착한 곳은 웨코스 남쪽의 인적 없는 작은 산속이었다. 처음으로 마족과 조우한 나라. 많은 이들을 지켰지만, 그만큼 지키지 못한 이들도 많은 아픈 기억을 가진 나라.
“유리아의 의견을 따를 생각입니다.”
마차 지붕 위에 한 발로 서서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며 균형을 잡고 있는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긴 여정 도중 유리아는 한 번도 티를 내지 않았지만, 자이안은 그녀가 고향을 굉장히 애틋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럼…… 어디 들르지는 말고, 다들 잘살고 있는지 한 번 확인만 하자.”
유리아가 고민 끝에 대답했다. 마차는 웨코스 남부의 항구도시를 향해 잠시 머리를 튼 뒤, 다시 북상하기 시작했다.
레온 로빌리오 선장. 순수한 호의로 자이안과 유리아를 제국까지 태워다줬던 그는, 겨우 1년 반이 넘는 사이에 배 한 척을 더 마련하여 선단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빚을 내서 샀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그의 수완이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겨우 배 한 척의 주인으로 남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었지.”
유리아는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어쩌면 그가 유리아를 도왔다는 사실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괜한 기우였던 듯했다.
와이번을 이용한 운송 사업은 이전에는 수도 코르니카를 중심으로 몇몇 지역에만 제한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웨코스 전역에 운송망이 연결되어, 그야말로 나라 전체의 유통을 책임지고 있었다.
「비행 유통망이라니, 저쪽의 평균적인 문명 수준을 생각하면 진짜 획기적인 사업이네요.」
그리고 무스트. 한때 알즈레드 상회의 일원으로서, 벤야가 죽고 상회가 와해된 뒤로도 끝까지 유리아를 보좌했던 남자.
그는 작은 상점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옆에 저 사람은…… 세상에. 설마 결혼한 거야?”
무스트의 상점에서 그를 돕는 여성이 한 명 있었다. 처음에는 고용된 직원인가 싶었는데, 얼마간 지켜보니 그보다 훨씬 깊은 관계인 것 같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휴, 진짜. 괜히 걱정했잖아. 저렇게 잘 먹고 잘살고 있는데.”
짐짓 툴툴거리는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과 안도가 묻어났다. 자이안이 저도 모르게 손을 붙잡자, 유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왜? 위로해주려고? 괜찮아. 오히려 홀가분해졌는데, 뭘.”
그녀는 마지막 남은 마음의 짐을 덜어낸 듯 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진짜 아무 미련도 안 남았어. 일리움으로 가자, 자이안.”
* * *
일리움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사실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냐? 너도 하여간 징한 놈이다.」
“그러는 삼촌도 기억하고 계셨잖아요?”
「이 자식아, 그걸 어떻게 잊어버려? 까딱하면 네가 그대로 죽을 뻔했는데.」
여정 초기. 국경 인근의 숲에서 화전민 마을을 발견하고, 그들을 지키며 코카트리스와 싸웠을 때.
그때 자이안은 분명히 그들과 재회를 약속했다.
“그땐 제가 좀 무모하긴 했죠. 하지만 삼촌,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제가 그때 멀쩡한 상태였다고 생각하세요? 아버지한테는 유배를 명령받았지, 미오네는 저를 사고로 위장해 죽이려 들었지, 저 대신 다른 사람들이 모조리 죽어나갔지…….”
지금도 자이안은 그때의 일을 바로 어제처럼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숲에서 그분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전 얼마 못 가서 자포자기하고 말았을 겁니다.”
프레이를 말없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자이안이 지금처럼 강박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이타적인 성격이 된 가장 큰 계기가 바로 그때의 일이었다.
“그때 분명히…… ‘루핀고르 영지의 체지스 이오자렌’이라고 그랬었죠.”
이번에는 밀입국이 아니라 당당하게 국경을 넘었다. 명확하게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지만, 고급스러운 마차는 그 자체로 훌륭한 증거가 되어 주었다. 일행은 아무런 방해 없이 나라 몇 개를 넘어가며 북상할 수 있었다.
“루핀고르 영지는 리투안 공국이라는 나라에 있다고 합니다. 아주 작은 나라라고 하는군요.”
소아레스가 상인과 방랑자들에게서 정보를 모아 왔다. 공교로운 일이었다. 자이안이 본래 유배되기로 했던 나라가 바로 리투안 공국이었다.
‘별장에 한 번 들러보는 것도…… 아니, 그만두자. 괜한 시간 낭비가 될 거야.’
알코스를 자칭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알레프와 연관된 것들에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마차는 예정대로 곧장 루핀고르 영지로 향했다.
“체지스 이오자렌? 예끼 이 사람아!”
영지에 도착한 뒤로는 그 이름을 단서로 수소문을 했다. 그런데 영민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영주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 어떡하나! 영주님이 자네 친구야?”
“……영주님이요?”
“영주님 찾는 게 아닌가? 내가 아는 그 이름을 가진 분은 영주님밖에 없는데?”
1년 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사단장이라던 그가 영주님 소리를 듣고 있었다.
「반란이라도 일으킨 거 아니냐?」
“에이, 설마요. 그분이 그런 성격은 아니었잖아요.”
쓴웃음과 함께 부정하면서도, 자이안 역시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직속 기사단장이 손수 영민들을 이끌고 도망쳤을 만큼 막장인 영주였잖냐. 혹시 모르지. 회까닥 열불이 나서 홧김에 저질러 버렸을지도.」
들으면 들을수록 프레이의 말에 설득력이 느껴졌다. 자이안은 더 참지 못하고 영지의 중심, 영주성으로 향했다.
“멈춰라! 이곳은 영주님께서 기거하시는 성이다. 허가받지 않은 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당연히 경비병들이 무기를 겨누며 막아섰다. 고급스러운 마차를 보고 다소 위축된 것 같기는 했으나, 충실히 자기 할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규율이 잡혀 있다는 증거였다.
“체지스 이오자렌 영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마차에서 내려온 자이안이 자연스럽게 말했다. 병사들은 주춤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영주님과 만날 약속이 있으신 분이십니까?”
가장 경력이 높은 듯 보이는 병사가 대표로 나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이안은 잠시 고민했으나 곧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 알코스가 약속을 지키고자 찾아왔다고 전해주세요. 아마 영주님께서 제 이름을 알고 계실 겁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병사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정중해졌다. 무기를 거두고, 한 명이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자식. 거짓말이 아주 술술 나오네.」
‘만날 약속을 했던 건 사실이잖아요? 영주가 되기 전이기는 해도.’
괜히 저자세로 숙이고 들어가거나 어물거리면 수상한 불온 분자로 낙인이 찍힐 가능성이 높다. 체지스 영감에게 이름을 전할 수만 있으면 성공이니까,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여간 이럴 때 보면 귀족 출신이 맞단 말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으로 향했던 병사가 다시 헐레벌떡 달려왔다. 턱 끝에 맺힌 땀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며 그는 더듬더듬 말했다.
“여, 영주님께서 여러분들을 환영한다고 하십니다.”
* * *
“허,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니었군. 이것 봐라, 키는 또 왜 이렇게 컸어?”
체지스 영감은 아예 본성 문 앞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을 보자마자 들은 그 말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오랜만에 보는 분들이 다들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키가 왜 이렇게 컸냐고.”
실제로 1년 전만 해도 160대 초반에 불과했던 자이안의 키가 지금은 훌쩍 자라 170대 중반에 이르렀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일수록 그 차이를 명확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체지스 영감과 나란히 서도 눈높이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들어오거라. 동행에 대해서도 천천히 소개를 듣고 싶으니. 조촐하지만 식사를 준비해 두었다.”
성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걸이는 당당했다. 조금 전까지는 의문이 좀 남아 있었는데, 그 뒷모습을 보니 그가 영주가 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히 실감이 났다.
‘조촐한 식사’라는 그의 표현은 반어법에 가까웠다. 갓 만들어낸 따끈따끈한 요리를 하인들이 쉴 새 없이 나르며 식탁을 채우고 있었다. 일행은 우선 서로를 가볍게 소개한 뒤,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물었다.
“영주가…… 원래 다른 분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응? 아아, 그래. 너는 모르겠구나.”
체지스 영감이 담담하게 일을 설명했다.
“무슨 엄청나게 파란만장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화전민들을 이끌고 영지로 돌아온 그는 예측한 대로 영주가 대가 바뀐 것을 확인했다.
“기사단의 문장을 보이고, 담판을 지으러 갔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새로운 영주는 자기 아비의 성정을 쏙 빼닮은 자였다. 그는 영지의 부속품에 불과한 영민들이 멋대로 도망쳤다가 멋대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굉장히 불쾌해했다. 영주에게 충성해야 할 기사단장의 배반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영지 인근 서쪽 숲에 마물이 발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영주는 마물이 얼마나 위협적인 재앙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체지스 영감을 구속하려 했고, 체지스가 영주 일가의 병폐와 비리를 증명하는 장부를 드러내 보인 뒤에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중앙에 영주 일가의 비리를 모조리 고발했다.”
무력으로 그 자리를 벗어난 체지스 영감은 말 한 필을 빌려 공도로 향했다. 워낙 작은 나라인지라 감찰관이 파견되는 것도 빨랐다. 화전민들을 감옥에 가두고 처형 날짜를 잡고 있던 영주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죄질이 너무나 악질적이었던지라, 공국의 법도상 작위를 폐하고 사형이 선고됐다.
“영주가 단두대의 핏자국이 됐으니, 대리로 영지를 통치할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남아나는 게 없었다. 영주 일족만이 아니라 가인들까지 비리에 엮이지 않은 놈들이 없었어.”
그렇게 쳐내고 쳐내다 보니 유일하게 남은 멀쩡한 인선이 체지스 영감이었다.
“나는…… 솔직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민들이 나를 추대하더구나. 나도 곤란하고, 감찰관도 곤란했지. 원래 새로이 영주를 맡을 만한 사람이 없으면 공도에서 관리를 보내 직할지로 관리하는 게 법도거든.”
감찰관은 오랜 시간 폭정으로 고통받은 영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번질 우려가 있다고 우려했다.
법관의 자문을 구하고 옛 기록들을 샅샅이 뒤진 끝에 비슷한 상황의 판례를 찾아냈다. 그 판례를 억지로 상황에 끼워 맞춰서, 체지스 영감이 새 영주가 될 수 있도록 당위성을 만들었다.
「……충분히 파란만장한데?」
얘기를 모두 들은 프레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20230218155147118623_ED919CECA780.png alt="">
/20230218155147118623_EBB7B0ECBBB4ECA688+EBA19CEAB3A0.jpg a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