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제국, 그리고 황제 클라비수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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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제국, 그리고 황제 클라비수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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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제국, 그리고 황제 클라비수스(4)
2023.02.17.
포션을 조제하는 기술은 아티팩트 공학이 아닌 연금술이라는 카테고리로 따로 분류된다.
필요한 지식도 크게 다르다. 아르스는 아티팩트 공학에 한에서는 부정할 여지가 없는 1인자였으나 연금술은 기초밖에 모르는 수준이었다.
“걱정 마라. 이런 건 마법사들이 잘하거든. 백마법사는 물론이고 흑마법사도 말이다.”
평소 보기 힘든 프레이의 지적인 면모가 오랜만에 빛을 발했다.
유민과 프레이가 클라본 허브라는 미지의 소재를 가지고 포션 조제를 시도하는 동안 다른 일행은 다른 재료를 모았다.
대부분은 제도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때로는 멀리까지 발품을 팔아야 하기도 했다. 다행히 소재가 자생하는 장소는 황실의 도움으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저씨, 아예 배합 비율을 반대로 뒤집어보는 건 어때요?”
“흠? 잠깐…… 밑져야 본전이지. 한 번 시도해보자.”
한 번에 완성할 수는 없었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치며 크룩스가 자진해서 임상시험에 나섰다.
“삼촌, 거기서 그거 말고 이 재료를 쓰면 안 되나요?”
“좋은 지적이다, 자이안.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 될 건 없다. 하지만 그 소재는 성질이 불안정해서, 배합하는 소재가 많아질수록 균형을 깨뜨릴 가능성이 높아.”
“그만큼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하면 약효를 크게 증폭시켜줘요. 지금은 시험단계니까, 우선 안정적인 조제에 집중하는 거죠. 시제품이 완성되면 그땐 소재를 하나씩 바꿔가면서 성능을 높일 거예요.”
자이안의 탐구심은 연금술을 상대로도 꺼지지 않았다. 프레이와 유민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그의 질문에 최대한 자세히 대답해줬다.
그렇게 모두가 노력하며 보름 정도가 지나고.
“……이 정도면 완성이라고 봐도 되겠지?”
“아직 좀 불안정하긴 하지만, 부작용도 없고 목표로 한 약효도 얻었잖아요? 완벽한 성공이죠.”
많은 실패를 디딤돌 삼아 첫 번째 포션이 완성됐다.
“제대로 효과를 보는지 한 번 검증해 봐야겠는데…… 이거 마셔보고 싶은 사람? 다른 건 몰라도 부작용은 확실히 없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자이안이 바로 손을 들었다. 프레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넓은 장소를 한 번 찾아보자.”
* * *
기사단 연병장에 다시 한번 신세를 지게 됐다.
이번엔 황제까지 직접 나섰으니, 당연히 훈련은 즉시 중지되었다. 기사들이 외곽으로 물러나고 자이안을 비롯한 일행이 연병장을 차지했다.
“그럼 마시겠습니다.”
한 손에 스펙트럼을 쥔 자이안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먼저 병에 담긴 포션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풀 내음이 은은하게 났다. 각오를 다지고, 두 모금 분량의 포션을 그대로 쭉 들이켰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클라본 차의 맛과 향을 좀 더 깊게 만든 것 같았다. 자이안은 병을 내려놓고 일행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섰다.
“이건…….”
곧 변화가 찾아왔다.
감각이, 정확히는 MP 감지력이 더없이 예민해졌다. 공기 중 MP의 아주 사소한 흐름마저 손에 잡힐 듯 알 수 있었다.
체내 MP도 예외는 아니었다. 감각이 예민해진 만큼 지금보다도 더욱 섬세하게 MP를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이안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마법을 사용했다. 프레이로부터 배운 그의 트레이드 마크, 번개의 사슬이었다.
“……!”
지금까지는 한 번에 최대 3개의 사슬을 만들어내는 것이 한계였다. 3개를 한꺼번에 만들면 정밀한 조종도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 자이안의 손끝에는 4개의 번개의 사슬이 뻗어 나와 있었다. 조종 역시 이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4개의 사슬이 허공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마치 마법진을 연상케 하는 복잡한 문양 따위를 그렸다.
“성공적이군.”
마안을 열고 자이안을 바라보던 프레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클라본 허브는 MP의 독성을 중화하고 흐름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준다. 프레이와 유민은 ‘흐름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준다’라는 부분에 집중했다.
흐름이 안정적이면 그만큼 제어가 쉬워진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만으로 극적인 전투력 상승을 이룰 수도 있다.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어 보이네요.”
“동감이다. 이왕 만드는 거 확실하게 만들어야지.”
프레이와 유민이 대화를 나누는 중, 갑자기 환한 빛이 폭발했다. 자이안이 번개의 사슬을 이용해 그린 마법진으로부터 백색 불길이 솟구친 것이다.
프레이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인 백색 불길은, 그러나 여태까지는 자이안이 사용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래. 내 조카면 백염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지.”
그 모습을 보며 프레이는 저도 모르는 새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제품을 완성한 뒤, 며칠간 포션의 효과를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제국에서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됐다.
“그래서, 할 건 다 했으니 이제 제 갈 길 가겠다고? 너무 매정한 거 아니냐?”
“죄송해요. 하지만 저희는, 언제까지 한곳에 머무를 수가 없으니…….”
황제의 타박에 자이안은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황제는 짐짓 원망스럽게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표정을 바꿔 부드럽게 웃었다.
“농담이다. 너희들이 바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아직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그럼 이제는 어디로 갈 생각이냐?”
“서대륙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알레프가 말이냐?”
“아뇨. 복마전이요.”
지금으로선 알레프가에 들를 생각은 없었다. 미오네를 용서해주겠다는 건 결코 아니다. 그저, 그런 사소한 일은 더 큰 일을 해결한 다음에 신경 쓰고 싶었다.
“……또다시 험한 길을 찾아가는구나.”
“저 원래 그런 거 좋아하잖아요.”
그로부터 며칠 시간을 보내며 다시 여정을 준비했다. 황제는 이번에는 클라본 허브를 비롯해 포션의 재료를 잔뜩 챙겨주었다.
잔뜩이라고는 해도 전체 유통량에 비하면 소량에 불과했다. 애초에 개량을 거듭한 지금은 포션 하나에 그렇게 많은 재료가 쓰이지도 않았다.
제도를 떠나고, 마차가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아예 동서를 잇는 사막을 뚫고 지나가는 것도 고려했지만, 바닷길보다 더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어 포기했다.
“다 좋은데 모래바람은 좀. 그거 비늘 사이에 끼면 진짜 하루종일 불편하단 말야.”
무엇보다 케이가 사막을 싫어했다.
약 보름에 걸쳐 남서쪽 해안선에 도달했다. 항구고 뭐고 없는 깎아지른 절벽이 바로 일행의 목적지였다.
일행은 마차에서 내린 뒤 짐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근처에 사람이 없음을 여러 번 확인했다.
“그럼 이제 변신해도 되지?”
해안선 절벽 위에 청백색 비늘로 몸을 두른 거대한 성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꾸아아앙! 아, 오랜만에 커지니까 개운하다.
남부 항구도시에서 배를 타고 서대륙으로 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저 1개월 이상.
그러나 일행에게는 그보다 훨씬 빠르게 바다를 가로지를 방법이 있었다. 바로 케이의 등을 빌리는 것이다.
-짐 다 실었어? 말이랑 마차도 문제없지?
얌전히 엎드린 케이의 등판에 짐과 마차, 말을 모두 옮기고 혹시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마지막으로 자이안이 미리 만든 아티팩트로 결계를 펼쳤다.
“준비됐어, 케이! 이제 출발해도 돼!”
-좋아! 날아간다아아!
용의 거대한 몸이 거짓말처럼 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서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토리안은 홀로 방을 서성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보고가 올 때가 지났는데.’
세계수의 숲 부근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기고 파견한 부하들이 연락을 보낸 게 벌써 몇 달 전. 달에 한 번은 정기 보고를 하는 게 의무이지만 여태껏 소식이 없다.
‘배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토리안이나 그의 부하들은 단순히 물질적 요소 때문에 미오네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매수하는 건 억만금을 가지고서도 불가능한 일일 터. 그렇다고 인질이 될 만한 가족 따위가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보고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상황.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해.’
고된 훈련을 거친 암살자 9명. 그들이 모두 살해당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고 토리안은 과거를 되새겼다.
‘자이안은 황실에서 직접 키운 암살자 12명을 모두 죽이고 마물이 들끓는 숲을 자력으로 탈출한 적도 있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게 우연이든, 기적이든, 아니면 자이안 본인이 숨기고 있던 저력이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또다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토리안? 방 한가운데 서서 뭐해요?”
흠칫, 놀라며 상념의 늪에서 벗어났다. 열린 문 앞에 미오네가 서 있었다. 시종 셋을 대동하고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노크도 몇 번이나 했는데 듣지도 못하고.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부인. 제가 잠시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차 마시고 같이 얘기 좀 나눌 상대가 필요해서요. 후후, 자랑하고 싶은 일도 있고요.”
“알겠습니다.”
둘은 정원에 비치된 티 테이블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주친 시종이나 기사들이 미오네를 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미오네와 토리안, 다소 엄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조합이었으나 그런 눈빛을 드러내는 이들은 없었다. 그만큼 미오네가 완벽하게 저택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건 클라본 차예요. 최근 제국에서 크게 유행하는 차라고 해서, 제가 어렵게 구했답니다. 아마 토리안도 마음에 들 거예요.”
토리안은 자기 앞에 놓인 차를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차군요.”
“그렇죠? 가능하다면 왕국에서도 재배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자랑하고 싶으시다는 게 클라본 차 얘기셨습니까?”
“아뇨? 그건 당연히 따로 있죠. 후후, 들어볼래요, 토리안? 세상에, 오늘 바란드가 수학을 공부하는데…….”
미오네의 어투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물론 미오네는 평소에도 밝은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의식해서 만들어내는 그런 태도와 달리, 지금 미오네는 진심을 드러내고 있다.
오랫동안 그녀를 모신 토리안은 그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대부분 바란드에 관련되었을 때 나타난다는 사실도 알았다.
“저도 풀기 어려워서 가끔 실수를 하는 문제인데, 바란드는 조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풀어내더라고요! 대단하지 않나요? 누굴 닮아서 그리 총명한 건지. 우후후.”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그녀에게서, 왕실과 왕국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비정한 정치가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토리안은 점차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런 기분이 불경이라는 것을 알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괜찮다. 부인께서는 공사를 혼동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10년도 더 전에 맹세하지 않았나. 이분은 내가 평생을 바쳐 충성할 가치를 지니신 분이라고. 설령 어떠한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사람의 근본은 얼마나 세월이 지나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미오네의 모습은, 과연 정말로 그런 걸까.
‘……내 충성심은 고작 이런 걸로 흔들리지 않아.’
토리안은 그리 되뇌면서도, 그 말이 참으로 공허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