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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제국, 그리고 황제 클라비수스(3) (136/210)


136화 제국, 그리고 황제 클라비수스(3)
2023.02.16.


기사 고르테르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잘못 건드렸다.’

지난 몇 달간, 매일 손아귀가 찢어질 정도로 검을 휘두르면서도 성장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데, 동기는 물론 고작 두어 달 전에 새로 들어온 후기마저 치고 올라가는 것을 보며 미칠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저들이 나타났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 아니꼬웠다.

1년 전, 마족이라는 사악한 존재로부터 제국을 구한 게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라는 사실이.

자신은 이를 악물고 훈련하고 있는데 갑자기 연병장 구석에 나타나 마치 비웃는 것처럼 지켜보는 그 모습이.

무엇보다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그의 지난날의 고민과 노력을 송두리째 비웃는 듯한 그 가벼운 말.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그럼 어떻게 하는지 한 번 가르쳐보든가!’

고르테르 말고도 비슷한 생각을 한 기사가 몇 명 더 있었다.

‘그렇게 대단하면 어디 한 번 보여줘 봐.’

두 여성이 연병장을 빌려 대련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들은 이를 기회로 봤다. 그래봤자 여자잖아? 게다가 겉모습을 봐선 딱히 대단한 단련을 한 것 같지도 않았다. 이게 정말 마족으로부터 제국을 구한 영웅들 중 한 명인가?

후학을 위해 대련을 견학하고 싶다는 요청을 단장은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거기까지는 생각대로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면 크게 비웃어줄 준비까지 모두 마쳤다.

그러나 그다음으로 일어난 일은 하나같이 상식을 벗어났다. 고르테르가 보기에, 그것은 대련이 아니라 천재지변 간의 충돌이었다. 아니면 허황된 꿈이거나.

그러나 둘이 부딪힐 때마다 강렬하게 몰아치는 돌풍의 감촉은 이게 꿈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네.’

문득 주변을 보니 선배 기사들 몇몇이 당혹스런 안색을 하고 있었다. 고르테르에게 동조했던 이들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대련 중인 저 둘에게 직접적으로 해코지를 하려 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긴, 그런 짓을 했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기는 했다.

마법도 아니고, 대체 왜 단검을 휘두를 뿐인데 천둥소리가 나고 멀리 떨어진 지면이 폭발한단 말인가. 게다가 상대는 그걸 어떻게 단검 한 자루로 아무렇지도 않게 막고 있고.

‘모르겠다. 견학이나 하자.’

고르테르는 복잡한 생각들을 그냥 내려놓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자 대련의 양상이 변했다. 공격의 속도가 눈으로 좇을 수 있을 정도로 느려지고, 둘은 마법인지 뭔지 모를 강력한 공격 대신 정교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지금까지가 실전 형식이었다면, 이제는 마치 교본처럼 합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래도 평범한 사람은 눈으로 좇기 힘들 속도였지만, 자리에 모인 이들은 황실을 호위하는 정예 기사단이었다.

‘잠깐. 저기서 저렇게 움직일 수 있다고? 검로를 왜 저렇게…… 아아!’

대련을 지켜보던 고르테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집중해서 대련을 견학했다.

단검과 장검은 명백히 다른 무기고, 이를 다루는 이론도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많다. 그러나 이를 감안해도 둘의 대련에는 배울 점이 많았다. 단순히 이론적 차이를 뛰어넘어 근본적인 핵심을 꿰뚫는 묘리가 있었다.

“슬슬 그만하는 게 좋겠군요. 너무 늦으면 프레이 님 기분이 안 좋아지실 겁니다.”

“그럴까? 나도 적당히 만족했고.”

마침내 대련이 끝났다. 둘은 그렇게 격렬하게 움직였는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고르테르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연이었다.’

그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벽에 금이 갔다.

무너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어떻게 해야 그 벽을 자기 손으로 부술 수 있을지 조금이나마 감을 잡은 느낌이었다. 당장 칼을 쥐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사과해야겠지.’

사실 그가 직접적으로 뭘 잘못한 것은 아니다. 연병장을 빌리고 싶다고 한 건 저쪽이고, 견학을 요청한 건 명분이기는 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지금 사과하면 오히려 이상한 그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대로 모른 척 지나가기에는 큰 가르침을 받은 상대에게 너무 미안했다. 저들을 깔보고 질투했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사죄하는 것이 기사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설령 이로 인해 상대에게 경멸받게 되더라도 좋았다.

‘선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고르테르와 동조하며 단장에게 견학을 요청했던 다른 기사들은 이대로 모른 척 넘어가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고르테르는 의연하게 연병장 가운데로 나아갔다.

* * *

“아, 저 사람.”

소아레스가 준비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유리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까 기분 나빠하던 기사들 중 한 명이다.’

소아레스에게 다시 수건을 건네준 유리아가 그 기사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으음…… 사과하는 게 좋겠지?’

훈련으로 머리를 개운하게 정리하고 나니, 아까 전 자기 행동이 얼마나 무례했는지 확 와닿았다.

농땡이를 피우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훈련 중인 기사들에게 대고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라니. 기사 대 기사의 상황이었더라면 결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후반은 느리게 움직임을 보여주긴 했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납득할 수 없었던 모양이네.’

유리아가 기사에게 마주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멈칫한 사이 꾸벅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예?”

용기를 내 사과를 결심한 기사 고르테르가 얼빠진 얼굴로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아까 제가 중얼거린 말 들으셨죠?”

“어어, 그건…… 예.”

“매일 가혹하게 훈련하며 황실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기사님들께 할 말이 아니었어요. 제가 무례했습니다.”

사과를 마친 유리아가 조심조심 고개를 들었다. 기사 고르테르의 표정은 유리아가 예상한 것과는 달랐다. 화를 내고 있지도 않았고,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하다못해 당황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꿈을 꾸듯 몽롱한 눈으로 유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아량과 배려에 감복했습니다.”

고르테르가 대뜸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영민하신 레이디여. 제가 당신의 검과 방패로서 평생 당신을 모시며 무덤까지 함께 할 기회를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

유리아는 멍청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넹?”

이제 그녀가 당황할 차례였다.

* * *

“푸하하하! 그런 일 때문에 늦은 거면 어쩔 수 없지.”

사정을 들은 프레이가 집무실이 떠나가라 폭소했다. 유리아는 그를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아저씨. 저 그때 진짜 부끄러웠거든요?”

결국 유리아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벗어났다. 소아레스가 옆에서 거들지 않았더라면 적잖이 상황이 곤란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금 나한테 적반하장이냐? 업보는 지가 쌓아놓고.”

“그게 아니라…… 에휴, 말을 말죠. 제가 아저씨랑 무슨 말을 하겠어요.”

황실 호위 기사단은 오직 황제와 황실에 충성을 맹세한 존재.

그런 기사가 다른 이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선언하는 건 자칫 중죄로 다뤄질 여지가 있었다.

소아레스의 중재 덕분에 엄벌은 피할 수 있었으나, 기사 고르테르는 앞으로 반년 간 매일 구보 150바퀴와 연병장 뒷정리 등 자잘한 체벌을 받게 됐다. 정작 벌을 받게 된 고르테르의 표정은 날아갈 것처럼 신나 보였지만.

“아마 그 사람도 유리아한테 사과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유민이 고르테르의 심리를 추측해보았다. 일행은 긴가민가했지만, 실제로 놀라울 만큼 정확히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유리아가 우리 몰래 기사 한 명을 짝사랑의 포로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은 일단 접어두고.”

“그, 그런 거 아닌데요?!”

“지금부터 진지한 얘기를 할 거다. 나나 자이안, 최유민, 황제 등등 이미 대충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복습하는 셈 치고 다시 들어봐라.”

프레이가 가볍게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일행의 시선이 집중된 것을 확인하고, 그는 팔짱을 끼며 턱짓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집무실 책상 위에 식어버린 차가 한 잔 놓여 있었다.

“클라본 차다.”

“약학적으로는 뇌의 피로를 풀어주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각성자의 관점에서 보면…….”

“MP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작용을 하지. 황제가 다시 마인이 되었는데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저 차 때문이다.”

프레이는 1년도 더 전 제도를 탈환할 때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나쟈의 음모로 마인이 될 뻔했던 황제가 그러나 끝까지 마인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서 버틴 바로 그 일을. 그때 프레이는 그게 단순히 강한 정신력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어. 그때도 황제 놈은 꾸준히 클라본 차를 마시고 있었지. 동료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렇다면 그때 폐하와 동료분들께서 나쟈의 세뇌에 당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 허브 때문이었던 거지이. 물론 나쟈의 세뇌가 제국 전역을 넓게 커버하다 보니 강도 자체도 약하긴 했지만 말이야.”

“나쟈라는 마족이 클라본 허브를 특산물로 삼는 걸 반대했다고 했죠? 그것도 아마 단순한 변덕은 아니었을 겁니다.”

뜻밖에 밝혀진 사실에 소아레스가 저도 모르게 침음했다.

“일단 우리가 알아낸 건 클라본 허브에 MP의 독성을 중화하는 작용이 있다는 점, 이게 마인과 마물, 마족에게 특히 유효하다는 점, 반대로 현재 상태로는 각성자에게 별 영향이 없다는 점. 이렇게 세 개다.”

“오히려 각성자는 안 먹는 게 좋겠더라구우.”

“너무 많이 먹지만 않으면 괜찮지만,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섭취하면 체내 MP가 분해돼서 점점 약해질 가능성이 높아요. 임상시험을 하지는 않았으니 다른 변수가 끼어들지도 모르지만…….”

밝혀진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강제적인 마인화를 방지하거나 마인이 된 후에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며, 먹일 수만 있다면 마족과 마물을 약화시킨다.

마물과 마족의 위협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지금, 후자의 효과가 특히 주목할 만했다.

“게다가, 각성자라고 해서 클라본 허브를 활용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프레이가 히죽 웃으며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약초를 날것 그대로 먹는 건 원시인들이나 할 짓이지. 이걸 재료로 포션을 만들 수만 있으면 분명 끝내주는 도핑 약이 완성될 거다. 물론, 뭐 시행착오를 좀 거쳐야 하긴 하겠지만.”

이어 프레이의 시선을 받은 최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션은 제가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저 혼자서는 불가능하니까…… 다 같이 힘을 모아 봐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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