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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제국, 그리고 황제 클라비수스(2) (135/210)


135화 제국, 그리고 황제 클라비수스(2)
2023.02.15.


「내가 이 바닥에서 30년 넘게 일했지만 이런 건 처음 보는데. 혹시 이런 거 본 적 있는 사람?」

프레이의 말에 각성자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거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황제를 뒤따라, 일행은 그의 개인실로 향했다. 마인의 냄새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는 마인의 힘을 완벽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렇게 된 게 1년 전이랬지. 정확히 언제냐?」

프레이의 질문을 자이안이 대신 전하자 황제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워낙 충격적인 일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작년 1월 중순 새벽이었다.”

그 순간 일행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건이 공통적으로 떠올랐다.

“폭식을 쓰러뜨린 게 그때였어요.”

“그로부터 며칠 뒤에 나태가 세계수에 몸을 던지기도 했지요.”

세계수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 한 차례 마인이 되었다가 되돌아온 황제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높았다.

「이제 와서 뭐가 원인인지 따지는 건 사실 크게 의미가 없어요.」

원인을 파악해 문제를 해결할 단서를 얻을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

「그보다는 왜 황제가 지금 이렇게 멀쩡할 수 있는지, 앞으로도 이렇게 멀쩡할 거란 보장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봅니다. 황제도 그런 생각으로 저희에게 비밀을 밝혔을 거예요.」

개인실에 도착한 황제가 시종과 호위를 모두 물렸다. 기사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으나 칙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주인 잘못 만났다고 마음고생이 말이 아니겠구만. 황제 놈아, 양심이 있으면 저 친구들 보너스나 휴가 좀 두둑이 챙겨줘라.”

가장 소환된 프레이가 짐짓 엄하게 황제를 꾸짖었다. 황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알고 있다. 당신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

“흥. 까칠한 놈 같으니.”

주거니 받거니 하며, 프레이가 마안을 열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가 황제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지금 당장은 봐도 잘 모르겠는데. 황제 놈아, 아까처럼 마인으로 한번 변신해봐라.”

프레이는 가볍게 말했으나 마저 소환된 다른 각성자들은 내심 놀랐다. 에너지의 흐름을 읽으며, 특히 MP에 대해서는 그 어떤 레이더보다도 정밀한 감지가 가능한 그의 마안이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황제의 모습이 다시 한번 변했다. 프레이는 그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뜬 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거 재밌는데.”

프레이가 입매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최유민. 와서 한번 스캔해봐라.”

유민이 손을 내뻗었다. 손가락 끝에서 뻗어나간 MP의 실이 황제의 몸 곳곳에 닿았다. 잠시 뒤 유민이 신음을 뱉었다.

“이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너도 잘 모르겠지?”

유민은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위험한 상태인 건가?”

황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민과 프레이는 서로를 마주 본 다음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아니에요. 정반대죠.”

“지금 네 상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안정적이다. 그래서 이상한 거고.”

“마인은 온몸이 MP에 침식되는 거라서, 뇌도 예외는 아니에요. 최소한의 지능을 유지하고 나름대로 머리를 쓸 수는 있지만, 이성을 유지할 수는 없죠. 하지만 당신…… 으음, 그러니까 황제님 같은 경우는…….”

“자이안의 가족이니 편하게 불러도 괜찮다.”

“알았어요. 아무튼 당신은 머리만은 전혀 MP에 침식되지 않고 깨끗한 상태에요.”

“문제는 지금으로선 왜 이렇게 멀쩡할 수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거다. 원인을 모르는 이상한 일 만큼 무서운 게 없지.”

프레이가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한 번 원인을 찾아봐야겠다.”

그때부터 프레이가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에 동행했다. 집무나 식사는 물론이고, 밤에 잠을 잘 때에도 방 하나 이상 멀어지지 않았다.

프레이가 그러고 있으니 자이안도 황제와 가깝게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자이안은 자연스럽게 황제의 집무를 돕기 시작했다.

중요한 판단은 모두 황제가 도맡았으나, 서류를 분류하고 정리하거나 간식과 차를 준비하는 등의 단순한 일은 자이안이 자진했다.

“고맙다. 잘 마시마.”

처음에는 자이안을 말렸으나, 말로 한다고 말을 들을 놈이 아니었다. 몇 번 실랑이 끝에 황제는 그냥 자이안이 옆에서 뭘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좋다고 하는 일인데 뭐 어쩌겠는가.

황제는 매일 하루 한 잔 이상 클라본 허브로 만든 차를 마셨다. 클라본 허브. 본래 제국 내 일부 특수한 환경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허브다.

한때 황제는 이를 안정적으로 재배하는 방법을 확립해 제국의 특산물로 삼고자 했지만, 나쟈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쟈와 음욕이 없는 지금은 제국 전역에 재배법을 퍼뜨리며 특산물로 삼을 계획을 착실히 진척시키고 있었다.

“이참에 좀 쉬었다 하죠.”

“응? 난 괜찮다. 다시 마인이 된 뒤로는 오히려 견디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남아돌고 있거든. 이렇게 하루 종일 앉아서 집무만 보다 보면 몸이 근질근질할 정도다.”

빈말이 아니라 황제는 매일 평균 10시간씩 정무를 보면서도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프레이는 그 모습을 마안을 연 채로 빠짐없이 관찰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그 차.”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프레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황제는 입에 닿은 잔을 잠시 떼어놓고 프레이를 돌아보았다.

“그게 뭐로 만든 차라고 했었지?”

“클라본 티다. 클라본 허브를 사용해서 붙은 이름이지.”

“그래. 그거.”

프레이가 눈을 꾹 감고 눈두덩을 문질렀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일주일 만에 마안이 꺼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게 원인인 것 같다.”
 

* * *

유리아는 황궁 호위기사단의 연병단 구석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심심하다.’

극진히 대접받는 건 좋지만,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기 집 앞마당도 아니고 제국의 황궁에서 훈련을 한답시고 다른 이들과 치고받는 것도 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도무지 할 일이 없어 황궁 부지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우연찮게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싸움이라도 벌어졌나 싶었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그게 아니라 훈련 중 나는 소리 같았다.

유리아는 별생각 없이 호기심에 따라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했다. 바로 기사단 연병장이었다.

자이안 일행의 얼굴은 황궁 내 모든 인원에게 빠짐없이 알려져 있었다. 그들을 자신과 동격으로 대우하고, 혹여나 무례한 행동을 하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황제의 칙명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유리아는 아무 제지 없이 연병단 구석에 앉아 기사들의 훈련을 멍하니 구경할 수 있었다.

‘아. 저거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단검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이리 흔들, 저리 흔들. 위로 휙 던졌다가, 귀걸이의 모습으로 변형시키며 가볍게 움켜잡는다.

귀걸이와 단검으로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이 아티팩트는 작년에 자이안이 직접 만들어준 것이었다. 멋진 생일선물을 받았으니 이번엔 자기가 보답할 차례라면서.

유리아의 특기인 재빠른 움직임을 보조하고, 충격파 공격을 강화하며, 자동 수복과 회수 기능 기타 등등이 부여된 뛰어난 아티팩트였다. 아르스 역시 결과물을 보고 잘 만들었다며 자이안의 실력을 인정했다.

‘저기서 왼발을 먼저 내딛는 건 효율이 별로 안 좋은데. 아니지, 생각해보니 기사들은 MP를 못 쓰니까 저게 최선인가?’

멍하니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기사들의 훈련을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든 한 가지 생각이 났다.

‘여기서는 눈치 안 보고 훈련해도 괜찮지 않을까?’

다음 순간 유리아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에는 우직하게 훈련만 하는 자이안을 보며 좀 쉬엄쉬엄하라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녀 자신이 심심하다고 훈련을 할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시간이 잘 가는 건 사실인걸. 그렇다고 시간을 허무하게 낭비하는 것도 아니고.’

이럴 때 몰두할 수 있는 취미가 하나 있었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유리아도 예전에는 취미가 있었다. 책을 읽으며 나갈 수 없는 바깥에 대한 로망을 키우는 것.

그러나 그 로망은 이제 이루어져 버렸다. 상회를 잇기 위해 책상에 앉아 복잡한 회계 공부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잘라내다 보니, 저도 모르는 새 자이안을 닮고 있었다.

‘크룩스 오빠라도 부를 걸 그랬나 봐. 아니면 소아레스라도. 혼자서 하는 훈련은 좀 심심한데.’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가까이 있던 기사 몇몇이 움찔하며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유리아는 그걸 보고서야 자기가 속으로만 해야 할 말을 밖으로 꺼냈다는 걸 알았다.

‘이크, 화났나봐.’

하긴, 자기여도 화났을 것 같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상관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느니 하는 소릴 하면. 유리아는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아 님. 여기 계셨군요.”

“소아레스!”

기막힌 타이밍에 구원이 나타났다. 유리아는 반색을 하며 소아레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기사단을 구경하고 계셨습니까?”

“심심해서 훈련이라도 할까 하다가 어쩌다 보니.”

유리아의 말에 소아레스는 작게 웃었다.

유리아도, 소아레스도 세계수의 숲에서 1년 넘게 지내면서 신스의 훈련에 적잖이 영향을 받았다.

지금에 와서는 하루라도 훈련을 빼먹고 몸을 혹사시키지 않으면 일과를 다 마치지 않은 것 같은 허전함을 느끼고는 했다.

“기사단의 훈련은 곧 끝날 것 같군요. 연병장을 빌려 가볍게 대련이라도 좀 할까요?”

“오! 역시 소아레스야. 마음이 잘 통한다니까!”

유리아가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소아레스가 기사단에게 다가가 단장인 듯 보이는 기사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일부의 시선이 유리아에게 향했다.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불신과 못마땅함. 그런 감정을 예리하게 느낀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아까 내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네.’

황제의 칙명으로 보호받고 있으니 직접 찾아와 따지지는 못하겠지. 그런 만큼 그들의 눈빛은 노골적이었다. 자업자득이지만, 다소 억울하기도 했다.

“괜찮다고 하시는군요. 마침 저와 아는 분이어서 말이 잘 통했습니다.”

얘기를 마친 소아레스가 돌아왔다. 유리아가 환하게 표정을 폈다.

“잘 됐다. 근데 소아레스, 뭐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냐?”

유리아가 뒤늦게 의문을 떠올렸다. 넓은 부지를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유리아를 굳이 찾아올 정도면 그냥 환담이나 나누려고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프레이 님께서 할 말이 있다고 모두를 찾으시더군요.”

예상대로의 대답이었다.

“다만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라고도 하셨으니…… 한 판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소아레스가 빙긋 웃으며 단검을 꺼냈다. 유리아도 마주 웃었다. 결국 둘 다 똑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더군요. 기사단이 대련을 관전하는 걸 허락해달라고 하던데…….”

소아레스의 말에, 조금 전 부정적인 시선들이 생각났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유리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연병장 가운데에 가서 섰다.

“그 정도야 뭐. 마음껏 구경하면 되지.”

소아레스 역시 그녀의 맞은편에 섰다. 유리아는 단검 두 자루. 소아레스는 한 자루.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이 폭음과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연병장 중앙에 거센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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