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제국, 그리고 황제 클라비수스(1)
(134/210)
134화 제국, 그리고 황제 클라비수스(1)
(134/210)
134화 제국, 그리고 황제 클라비수스(1)
2023.02.14.
프리엔 제국.
열강으로 이름을 떨치며, 대륙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다.
그 기원은 바로 척박한 땅에서 우직하게 살아남은 소수 야만 부족의 연합체.
생존을 위해 뭉쳤던 야만인들은 점차 주변의 다른 부족을 병합하며 몸집을 키웠다. 각 부족장의 의견을 중재하는 대표자를 선출하고, 덩치가 커진 연합을 수월하게 다스리고자 여러 직책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나라의 형태를 갖췄다.
보석탑이 무너지고, 일리움이 그저 서대륙 구석에서 침묵하며 서서히 잊힘에 따라 오직 제국만을 유일한 강대국이라 평하는 호사가들도 점차 모습을 보였다.
제국 역시 지난 40년간 독재자 한 명에게 나라가 좌지우지되며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으나, 결국에는 이를 극복함에 따라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게 그들의 평가다.
「거창한 국뽕이구만.」
자이안의 시야를 빌려 신문의 내용을 읽은 프레이가 비꼬듯 말했다.
제국 황실에서 직접 간행한 신문이었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읽을 수 있었다. 내용은 전반적으로 제국의 대단함을 알리고 제국과 황실을 추켜세우는 기조였다.
「황실이 폭삭 주저앉았다가 간신히 다시 일으켜 세운 게 고작 1~2년 전이니, 뭐 이해는 한다만.」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보이네요.」
유민과 크룩스는 제국에서의 사건은 직접 보지 못하고 설명만 들었을 뿐이었다. 직접 본 제국의 도시는 북부 끝자락 국경도시 파르곤뿐이었고.
올라갔던 길을 비슷하게 거꾸로 내려오며 제도에 도착한 첫날.
크룩스의 말대로 제도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그만큼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질 기미가 보였으나, 많은 병사들이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며 범죄를 미연에 예방하고 있었다. 성국보다도 더 치안이 좋아 보였다.
“하루 이틀 더 구경하고 황궁으로 가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자이안의 의견에 모두가 큰 반대 없이 찬성했다.
첫날은 번화가와 시장, 광장 등을 돌았다. 특이한 점은 광장 중앙에 가로놓인 석상이었다. 자이안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 석상의 주인공은…….
“나쟈?”
석상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상반신만 남은 석상의 얼굴은 온갖 오물로 더럽혀져 있었고 몸체에도 험악하고 외설스런 욕설이 곳곳에 낙서 되어 있었다.
「주민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놔뒀나 본데요. 어느 정도는 책임을 전가하는 효과도 있겠죠.」
광장 구석에서 조금 지켜보니, 지나다니는 사람들마다 침을 뱉거나 말똥을 던지거나 하며 거리낌 없이 석상을 훼손하고 있었다. 크룩스의 말이 정확히 핵심을 꿰뚫은 셈이다.
제도 전역이 활기찬 듯 보였으나,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이튿날, 자이안이 향한 곳은 도시 바깥 후미진 구역이었다. 힘없고 소외된 이들이 물결에 휩쓸리듯 흘러가 자연스럽게 고이는 곳. 번영한 도시에 반드시 존재하는 그림자. 빈민굴이다.
「그래도 예상한 것보단 훨씬 나은데?」
일반적으로 빈민굴은 치안 자체가 관리되지 않는다. 당연히 온갖 범죄자들이 모이고, 사람 목숨이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 나간다.
그러나 제도에서는 빈민굴 역시 병사들이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있었다. 자이안만 해도 소매치기를 시도하려던 남성이 병사들에게 붙잡혀 연행되는 광경을 봤다.
「저기 저 사람들, 신성술을 쓰고 있어요.」
유민의 말대로, 어느 한구석에서는 사제처럼 보이는 이들이 병든 빈민들을 치료하고 간단하게나마 약을 나눠주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곳에서는 배식도 이뤄지고 있었다.
비록 빵 한 덩이와 묽은 죽뿐이었지만, 본래 빈민가는 그것조차 못 구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굶어 죽는 장소다.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맞죠. 당장 관리가 안 된다고 방치하면 범죄조직의 소굴이 되거나 전염병의 온상이 되거나, 어느 쪽이든 나라에 해가 될 뿐이니까요.」
「황제 그놈, 가끔 어벙하게 굴기는 해도 머리는 잘 돌아가는 놈이니까.」
한계는 존재했다. 하수 시설이 전무한 터라 곳곳에 오물이 즐비했고 건물들 역시 태풍이라도 한 번 오면 다 날아가 버릴 듯 허술한 가건물이었다.
빈민굴을 나오며, 그래도 자이안은 절망 대신 희망을 느꼈다. 빈민굴 곳곳에서 인부들이 새로운 건물을 세우며 일하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기도 했고, 클라비수스가 비록 빈민일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슬슬 황궁으로 가볼까요.”
이제 그리운 얼굴을 직접 만나볼 차례였다.
* * *
“자이안 알코스 님.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지기의 태도는 국빈을 모시듯 정중했다. 자이안 일행이 정체를 밝히지도 않았는데 먼저 알아보고는 그들을 자연스럽게 황궁 안쪽으로 안내했다.
‘저희가 제도에 온 걸 이미 알고 있었나 봅니다.’
「하긴. 자기가 선물한 마차를 타고 그대로 돌아왔는데, 눈하고 귀가 달려있으면 당연히 알아봐야지.」
실제로 제도를 탐방하며 간간히 시선을 느끼기도 했다. 그게 아마 황제의 부하들의 시선이었던 모양이다.
“구조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군요.”
황궁 부지를 둘러보며 소아레스는 다소 감회에 젖은 목소리였다. 그래도 모든 게 이전과 같지는 않았다. 건물 몇 개가 완전히 무너지고, 또 몇 개는 새로 지어지고 있었다.
“자이안! 이 망할 꼬맹이 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제도에 도착했으면 곧장 황궁으로 와야지!”
클라비수스는 직접 황주궁 앞에 나와 있었다. 일행이 마차에서 내려 정중하게 인사하자, 그는 거리낌 없이 다가와 자이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쭈, 이 새끼 봐라. 키 좀 컸냐?”
“1년이 넘게 지났잖아요. 제 나이엔 이 정도 크는 게 당연하다고 삼촌이 그러시더라고요.”
황제를 지켜야 하는 기사들이 한 차례 움찔했으나, 결국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사전에 단단히 이른 것이다. 자이안을 상대로는 그 어떤 무례한 행동도 하지 말라고.
만약 섣부른 짓을 하는 놈이 튀어나오면 그놈은 자기 손으로 직접 두들겨 패고 감봉 및 강등시켜버리겠다고.
“이젠 꼬맹이라고 놀리지도 못하겠네. 아, 이런 젠장. 여기서 이럴 게 아니지. 얼른 들어와라. 식사를 준비해 놨다. 유리아 양도, 소아레스도. 응? 저 어린애는 또 누구야?”
“밥 먹으면서 얘기해드릴게요. 안 그래도 할 말 많아요.”
일행은 황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기사들에게도 한 번씩 눈인사를 하자, 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준비된 식사는 작년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그렇다고 황제라는 이름값에 걸맞나 하고 물으면 또 전혀 아니었다. 카펜트리 상회에서 페시스와 함께 한 만찬이 차라리 더 호화로웠다.
“크으으으―! 술맛 한 번 죽여주네. 안 그러냐?”
증류주를 병째로 쭉 들이켠 황제가 껄껄 웃었다. 정작 다른 자리에는 멀쩡히 와인이 준비된 것을 보면, 증류주는 완전히 황제의 취미가 된 모양이다.
“용을 벗 삼아 세계를 구하고 다니는 여행자라. 멋지군. 소설로 써도 되겠어.”
장난처럼 말하고 있지만 황제의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제국도 많이 좋아진 것 같던데요.”
“흠. 네가 궁에 오기 전 빈민굴에 한 차례 들렀다는 건 알고 있다.”
탁, 술병을 내려놓은 황제가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보기엔 빈민굴의 상황이 어떻더냐?”
“폐하께선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계세요.”
대하는 자이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황제는 쉬이 믿지 못하는 듯했다. 식기를 내려놓은 그가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어쩌면 더 영리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더 적은 돈, 적은 인력으로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냐?”
“그건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죠. 폐하도 저도 마찬가지예요. 가능한 한 모두를 구하려 노력해도, 항상 모두를 구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자이안의 여정이 그랬다. 모두를 구하고자 마음먹어도 완벽하게 모두를 구할 수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차곡차곡 후회가 쌓였다. 아무리 주변에서 그를 위로하고 긍정해준다 한들 그걸 완전히 걷어낼 수는 없었다.
“이 후회는 아마 죽을 때까지 저를 괴롭힐 거예요.”
“그건 너무 괴로운 인생이지 않으냐.”
“어쩔 수 없죠. 후회도 제 일부니까. 그냥 긍정하며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더라고요. 가끔은 다른 분들의 위로를 듣는 것도 도움이 되긴 해요.”
그리 말하며 자이안은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유리아는 부끄러워했고, 소아레스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고, 케이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각성자들도 비슷했다.
“변했구나. 좀…… 홀가분해진 건가?”
“그러는 폐하도 변하셨네요. 예전보다 고민이 많아지신 거 아니에요?”
“이 망할 놈이. 이게 다 누구 탓인데?”
황제가 짐짓 짓궂게 자이안을 타박했다. 잘라내야 할 ‘작은 것’을 냉정하게 잘라내는 대신, 그것까지 모두 구할 수는 없는지 거듭 고민하게 되었다. 자이안의 영향이었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었다.
“솔직히 이런 정책 같은 건 저보다 폐하께서 훨씬 잘 알고 계시잖아요. 저한테 조언을 구한다 한들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좋은 안이 나올 수는 없을 겁니다.”
“나도 알아, 인마. 누가 너한테 도움을 받고 싶대? 난 그냥 확인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아는 한 최고의 호구인 네가 보기에 지금 빈민굴이 어떤 상태인지.”
“다시 말씀드리지만, 폐하께선 최선을 다하고 계세요. 전 폐하를 믿습니다.”
“그래. 그럼 그런 셈 치지 뭐.”
황제의 대답은 겉으로 보기에는 퉁명스러웠다. 그러나 처음 얘기를 시작했을 때에 비하면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 보였다.
“황제는 다들 딱딱하고 위엄 있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봐. 신기하네.”
잠자코 있던 케이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황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는 그대야말로…… 그대? 흠. 내가 당신을 그대라고 불러도 되겠소?”
“편할 대로 불러. 이름은 케테르크니까 가볍게 케이라고 불러도 돼. 친구라는 건 많을수록 좋은 법이거든.”
“그래, 그러면…… 케이. 케이야말로 위대한 용답지 않게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나?”
“난 이 모습이 더 편하고 마음에 들거든.”
“바로 그렇지. 나도 비슷한 이유라네. 격식과 예절은 물론 지성인을 지성인답게 만드는 훌륭한 문화이지만, 제국의 근원은 다름 아닌 야성. 야성을 간직함은 제국민에게 있어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지.”
「말은 번지르르한데, 결국 조상 이름 빌려서 지 꼴리는 대로 하고 싶다는 소리지, 저거?」
「아마 황제가 된 뒤로 주변에서 제발 격식 좀 차리라는 말을 자주 들었겠지이. 그러니까 저런 변명이 술술 나오는 거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문득 황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 시선이 자이안을 향하자 자이안도 자세를 바로 했다.
「뭐 또 할 말이 있나?」
“보여줄 게 있다.”
그리 말한 황제가 잠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자이안은 흠칫 놀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잠잠하던 MP가 황제를 중심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코끝에 마물과도, 마족과도 다른 기묘한 냄새가 닿았다.
“약 1년 전이었다. 밤중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깨어난 나는, 내 안에 기묘한 힘이 태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새로 태어난 게 아니라, 그전까지 나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조용히 잠들어있었던 거지.”
황제의 몸이 주변의 MP를 빨아들였다. 동시에 그의 모습이 점차 변했다. 피부가 검붉어지며 근육이 팽창하고, 옷이 찢어지며 드러난 팔뚝이 비늘로 뒤덮였다. 두 눈동자 역시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쭉 찢어진 채 노랗게 변했다.
“……마인.”
자이안이 신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안전한 상태인지, 자이안 네 가족들에게 확인을 받아보고 싶다.”
마인의 모습이 된 황제가 더없이 이성적인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