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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7) (133/210)


133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7)
2023.02.13.


자이안을 보는 할루드 팀의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

처음 만났을 때는 도움도 안 되면서 내다 버릴 수도 없는 애물단지 취급이었다.

유리아의 실력을 본 뒤로는 어쩌면 비범한 실력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유적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며, 비록 샌님이긴 하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성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미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지하 2층의 수색을 마치고 숨어있던 마물들마저 모두 섬멸한 뒤, 자이안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할루드 팀을 다시 1층으로 끌고 왔다. 그가 찾아간 곳은 첫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빈 방이었다.

“아마 이 방 어딘가에 유물이 숨겨져 있을 텐데…… 여기 벽을 좀 부숴도 괜찮은 거죠?”

그리 말하더니 자이안은 맨손으로 벽을 파기 시작했다. 아니, 깨부수기 시작했다.

가볍게 주먹을 툭툭 내지를 때마다 방 전체가 비명을 지르며 벽이 쩍쩍 갈라졌다. 이윽고 벽이 먼지를 일으키며 무너지고 안쪽에 숨겨져 있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고, 할루드는 도저히 현실을 믿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 금화랑 보석이 이렇게나……! 이, 이걸 내다 팔면 앞으로 이런 짓 안 해도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거야, 대장!”

팀의 홍일점인 데이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사냥꾼들도 말만 안 할 뿐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나마 할루드가 대장의 체통을 지키려 진중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입꼬리가 슬쩍슬쩍 올라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여기도 유물이 있었네요. 이건 물건이 상하는 걸 막아주는 보존 기능이 담긴 것 같아요.”

2층에서 발견한 아티팩트는 은신 기능이 붙어있었다. 그 때문에 자이안 역시 마물의 존재를 미리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1층에서 보존 기능이 담긴 아티팩트가 발견됨에 따라 유적이 놀라울 정도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 역시 밝혀졌다.

두 아티팩트의 힘이 유적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잠깐! 함부로 손대지 마, 멍청이들아. 이건 우리 게 아니다.”

할루드의 엄중한 말에 사냥꾼들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안 것도, 직접 벽을 부수고 숨겨진 방을 발견한 것도 모두 자이안의 공로였다.

자이안과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할루드 팀은 숨겨진 방의 존재는 알지도 못한 채 탐색을 마쳤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2층 마지막 방에서 마물들에게 기습당해 전멸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게…… 어제는…… 제가 싹퉁머리 없는 소리를 해대서 죄송합니다.”

쭈뼛쭈뼛 다가온 할루드가 자이안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애초에 사과를 받을 생각조차 없었던 자이안만 깜짝 놀랐다.

“저희도 미안해요. 그게, 우리가 당신들을 무시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데, 우리 일이라는 게 뭐 하나만 잘못돼도 사람 목숨이 볏짚처럼 쓸려나가는 일이라…… 아, 아니, 이런 게 아니라. 아무튼 미안해요.”

할루드를 시작으로 다른 세 명 역시 자이안에게 사과하기 시작했다. 정작 자이안은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악감정도 없었다.

그들이 자이안의 정체를 의심하고 방해를 하지 않을까 경계하며 무시했던 건 그들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자이안에게 직접 피해를 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잘못을 인지한 순간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솔직하게 사과하는 태도에 호감이 갔다.

「내가 보기엔 저 보물들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저러는 것 같은데?」

‘어차피 전 저거 가져갈 생각도 없었는데요.’

「뭐 인마?! 보물 사냥꾼이 보물을 발견하고도 안 가져가? 이게 무슨 개소리야?」

‘애초에 전 보물 사냥꾼도 아닌데요. 그리고 저흰 저런 거 필요 없잖아요.’

예전에 제국과 법왕국을 구하면서 받은 돈도 많았고, 세계수의 숲에서는 그걸 쓸 일도 없었다.

가끔 여행용품을 보충하며 쓴 돈은 전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지금도 마차에는 금화가 잔뜩 든 묵직한 주머니가 쓸쓸하게 먼지나 쌓인 채 방치되고 있었다.

「야, 이 자식아. 이런 건 기념품이지! 우리가 고작 며칠이긴 해도 보물 사냥꾼으로서 충실히 일했다는 기념품.」

‘그럼 금화 하나만 가져가죠, 뭐.’

프레이와 짧은 대화를 마친 자이안이 할루드 팀에게 말했다.

“부담스러우니까 그만 고개 드세요.”

“그, 그럼,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용서하고 자시고, 여러분은 당연한 행동을 했을 뿐이잖아요. 그런 일로 사과를 받는 게 이상한 거죠.”

겨우 허리를 편 할루드는 감격에 찬 표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에게 자이안은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 아니라 행운의 신이었다.

“이건 제가 가질게요.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분배하세요.”

“예? 바, 반대가 아니라요?”

자이안이 금화 하나만 챙기자 할루드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자이안은 대답 대신 웃음만 머금고 먼저 방을 나왔다.

“……신이다. 저분이 바로 태양신이었어.”

“성국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태양신이 이렇게 코앞에 있었네.”

“대장. 난 오늘부터 자이안 교의 신도가 될래.”

“그럼 교주는 내가 맡아야겠구만.”

무신론자 네 명이 신실한 교인이 된 순간이었다.

「이틀 동안 퀴퀴한 지하를 뒤진 보상이 고작 금화 하나라니.」

“아마 고대 법왕국의 금화겠죠. 어쩌면 그보다도 더 전, 선주 인류 시대의 유물일지도 몰라요. 크기도, 조형도 현대와는 전혀 달라요. 이거 하나만으로도 상당한 학술적 가치가 있을 거예요.”

「아오, 이 욕심 없는 놈 진짜.」

“이미 가진 게 충분한데 굳이 욕심을 부려서 뭐 해요?”

반 장난으로 자이안을 타박하던 프레이가 결국 쓴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잘해요. 쥐뿔도 없을 때도 욕심 같은 건 제대로 부려본 적도 없는 놈이.」

보물들을 모두 챙긴 할루드 팀이 이윽고 방을 나왔다. 자이안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무한한 존경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오니, 이미 바깥은 어둑한 밤이었다. 예정대로 2박 3일의 일정을 모두 채우게 된 것이다. 데이라와 폴룩스가 다시 한번 주변을 수색하고, 안전을 확인한 뒤 일행은 마지막 야영을 준비했다.

“오오, 자이안 님! 하하, 샌님처럼 생기셨는데 술을 아주 잘 드시는구만! 아니, 이제는 샌님이라고 부르면 실례지! 하하!”

야영지는 첫날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소란스러웠다. 유물은 물론 가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재물까지 챙기고 성공적으로 탐색을 마치고 나니, 절제라는 족쇄가 완전히 풀려버린 것이다.

유적지 한복판에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자이안 일행도 기분 좋게 그들과 섞여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즐겼다.

“자이안 님! 자이안 교의 첫 번째 신도인 제가 자이안 님께 경배를 드리는 걸 허락해주세요!”

“예? 무슨 교요?”

“자이안 님! 첫 번째 신도는 저 녀석이지만 교주는 접니다! 잊지 마십쇼! 으하하하!”

“부끄러우니까 당장 그만둬요, 그런 종교!”

그리고 다음 날. 유적 탐색의 마지막 날 아침.

2박 3일간의 짧은 동행을 끝낼 때가 왔다.

* * *

“자이안 님. 걱정마십쇼. 자이안 교는 교주인 제가 책임지고 성국 전역에 전파하겠습니다.”

“하지 말라니까요!”

할루드 팀은 마지막까지 자이안을 괴롭혔다. 그게 농담인지 진심인지 도저히 분간이 되지 않아서 자이안은 더 무서웠다.

하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농담인데 표정만은 모두 진지했다. 자이안은 언젠가 또다시 성국을 방문하게 될 날이 걷잡을 수 없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며칠 만에 다시 찾은 성도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무장한 채 돌아다니는 보물 사냥꾼. 골목 곳곳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마찰. 치안 유지를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는 기사와 병사.

길거리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성국이 타락했다며 한탄하는 늙은 사제. 그를 보며 동조하는 사람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자이안의 표정은 처음 성도를 찾았을 때와는 달리 한결 홀가분해 보였다.

각양각색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활발하게 살아가는 나라. 그것이 지금의 성국이었다.

“어서 와요. 유적 탐색은 어땠…… 냐고, 제가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요.”

“하하, 이번에도 티가 났나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알았으면 앞으로 제 앞에서 그런 우중충한 표정은 하지 마요. 못 견딜 만큼 기분 나쁘니까.”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퀴나스에게 자이안은 미소로 화답했다. 퀴나스가 하는 말이 내심과 다르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후후. 여러분께서 안 계시는 동안 퀴나스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하루 종일 여러분, 특히 자이안을 걱정했답니다.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요. 그대로 박제해서 평생 보관해두고 싶을 정도였어요.”

“서, 성녀님?! 그걸 말하시면 어떡해요……!”

“어머. 제가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잖아요?”

“그, 그거언, 그렇지마안…….”

성녀는 토라진 퀴나스를 자애로운 표정으로 쓰다듬었다. 부모 자식, 혹은 나이 차가 나는 자매를 보는 듯 훈훈한 모습이었다. 자이안 일행은 성녀의 입에서 나온 박제니 뭐니 하는 살벌한 말은 듣지 못한 셈 치기로 했다.

“그래서…… 언제쯤 떠날 셈이에요?”

“글쎄요. 사실 당장이라도 괜찮아요.”

이미 성국에서의 일은 모두 끝났다. 좀 더 머무르며 두 성녀와 지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자이안에게는 복마전이라는 목표가 있었다. 게다가 자이안이 살아있음을 알게 된 미오네의 행동도 문제였다.

미오네가 무슨 짓을 벌이건 자이안 일행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칼끝이 자이안 일행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이들을 노린다면?

그러다가 만약에라도 누구 하나 죽거나 다치는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그때는 자이안의 목표가 복마전이 아니라 알레프 백작가가 될 것이다.

“그래요. 그럼 뭐…… 흐, 흥. 마음대로 해요. 지금 당장 떠나건, 며칠 더 늘어지게 쉬다가 떠나건 알아서 하라고요.”

퀴나스가 코를 울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가 헤어짐을 아쉬워한다는 건 훤히 보였다. 이번에는 성녀도 별말을 꺼내지 않았다. 자이안은 일행들을 돌아본 뒤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며칠만 더 신세 질게요.”

퀴나스의 표정이 일순간 환하게 피었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급히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자이안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은 스스로가 장하다고 생각했다.

남은 며칠간, 일행은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두 성녀의 업무를 돕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둘은 식사와 취침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정무에 집중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성국의 변화는 바로 그 피땀 어린 노력의 결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오전. 자이안 일행의 마차가 태양궁 앞에 섰다.

두 성녀가 마차를 마중 나왔다. 자이안은 그들의 바쁜 일정을 생각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렸지만, 결국 고집을 꺾지 못했다.

“자이안!”

망설임 없이 길을 나아가는 마차 뒤로 퀴나스의 외침이 들렸다.

“저와 성녀님은 성국을 반드시 당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멋진 나라로 만들 거예요!”

마차가 조금 속도를 늦췄다. 퀴나스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힘껏 소리쳤다.

“그러니까! 그때가 되면 한 번 더 이 나라를 찾아와요! 당신 눈으로 직접 성국이 얼마나 멋진 나라가 됐는지 확인하란 말이에요! 알았죠?!”

자이안은 기분 좋게 웃으며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두 성녀를 향해, 고마움을 담아 깊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 목적지는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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