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6) (132/210)


132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6)
2023.02.12.


할루드는 얼빠진 얼굴로 침묵했다.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데이라가 잠시 멀어졌다가 돌아왔다.

“놀 한 마리였어. 근데 이미 죽었네. 정확히 미간을 꿰뚫렸어.”

“어…….”

할루드가 눈을 끔뻑거리며 데이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 일단 갑시다.”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유리아가 히히 웃으며 자이안에게 다가붙었다.

“이제 저 사람들이 너 안 무시하겠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어요? 전 괜찮은데.”

“흐흥. 내가 욕먹는 건 참아도 자이안이 욕먹는 건 못 참지!”

“저기…… 그쪽 분들. 혹시 지금보다 속도를 좀 더 내도 괜찮겠습니까? 사실 지금 제법 쉬엄쉬엄 달리고 있는 거라.”

할루드가 자이안에게 물었다. 말투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만, 그를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느껴졌다. 자이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속도를 좀 더 내겠습니다.”

그로부터 다섯 시간가량을 달린 끝에 목표로 한 유적지에 도착했다. 자이안 일행은 둘째치고 기사나 사냥꾼 팀 역시 크게 지친 이는 없어 보였다. 가장 멀쩡해 보이는 건 의외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그루스크였다.

“그루스크에게는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유물이나 몸을 지킬 수 있는 유물 등 생존에 필요한 걸 이것저것 몰아줬습니다. 이런 일을 할 때 보급은 생명줄 그 자체니까.”

“아이고, 대장도 참. 이게 어디 나 혼자만 중요한 일인가. 우리 네 명 다 똑같아요. 특히 우리처럼 소수 정예로 돌아가는 팀은 한 명이라도 다치면 그냥 팀 전체가 무너지는 거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유적 조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척후를 맡은 데이라가 나서서 유적의 전반적인 구조를 확인하고 안전을 확보한 뒤, 뒤이어 정밀 탐색 담당 폴룩스가 나서서 진입로를 찾았다.

할루드가 말했던 대로, 문외한인 자이안이 보기에도 유적은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흙바닥 위에 한때 건축물이 있었음을 알리는 터가 드문드문 초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도 건물 세 개 정도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으리라. 가운데의 건물 내부에는 제단인 듯한 흔적이 보였다.

“교회……?”

“눈썰미는 좀 있구만. 맞아요. 아마 교회였을 겁니다. 사실 성국에서 발견되는 유적은 열에 아홉이 교회이긴 하지만, 뭐 어쨌든.”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보통 교회는 주민들을 위해 마을에 지어지기 마련인데, 유적지에 교회 말고 다른 건축물 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게 우리가 여기를 탐색하는 이유지. 다른 건물이 다 흔적도 없이 무너졌는데 혼자만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여기에 유물이든 뭐든 특별한 게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오…….”

그럴듯한 설명에 자이안은 탄성을 터뜨렸다.

“대장. 진입로를 확보했다.”

“좋아. 그럼 사전에 말한 대로 잠깐만 좀 쉬고 작업 시작합시다.”

30분의 휴식 시간 동안 일행은 자연스럽게 두 패로 갈라졌다. 자이안 일행과 사냥꾼들 사이에 교류는 거의 없었다. 휴식을 끝내기 조금 전에 할루드가 찾아와 곧 시작할 테니 미리 준비를 해두라는 말을 한 게 다였다.

“지금부턴 정신 바짝 차립시다. 작은 유적이라곤 하지만, 안에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최악의 경우 마물이 둥지를 틀었을 수도 있어요.”

할루드의 말과 함께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이라가 길을 선도하고, 폴룩스가 그 뒤를 쫓았다. 둘이 수색하며 안전을 확보한 길을 일행은 빠르게 가로질렀다.

진입로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돌을 깎아 만든 벽면에 횃불이 걸렸던 흔적은 존재했으나, 당연히 광원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루스크에게 횃불을 건네받은 데이라가 불을 붙였다.

계단 안쪽도 어둑하긴 마찬가지였다. 사냥꾼들은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신중하게 사방을 살피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냥 천천히 나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벽이나 바닥에 묻은 사소한 얼룩이나 긁힌 흔적까지 하나하나 살폈다.

「너무 신중한 거 아닌가? 어차피 신성술을 쓸 줄 아는 기사가 붙어 있잖아. 팔다리가 날아가는 큰 부상이 아니면 그냥 신성술로 고치면 그만 아냐?」

자이안이 프레이의 의문을 대신 기사에게 전했다. 기사는 쓰게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게 다 돈입니다. 사냥꾼들이 탐색 중에 사제나 기사에게 신성술로 한 번 치유를 받을 때마다 조합에 일정 금액을 치유세로 내는 구조입니다. 비싸게 팔릴 만한 유물을 발견하면 모를까, 허탕이라도 치면 고스란히 적자가 되죠.”

「……꿈도 희망도 없는 얘기구만.」

그러나 더없이 현실적이기도 했다. 보물 사냥꾼도 결국 작은 손익에 전전긍긍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계단이 끝나고 마차 한 대가 통째로 지나갈 수 있을 법한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아마도 지하 창고인 듯 보이는 공간이었다. 지하 특유의 텁텁한 공기에 섞여 퀴퀴한 냄새가 났다.

“뭐가 썩은 냄샌가?”

“아무래도 식량 창고였던 것 같은데.”

“적어도 수백, 수천 년은 방치됐을 식량인데, 썩은 냄새가 아직도 난다고? 이거 대박의 냄새가 나는데.”

복도 좌우에 일정한 간격으로 방이 배치되어 있었다. 일행들은 방을 하나씩 차례대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처음 두 개는 모두 허탕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방에 들어선 자이안의 코끝에 MP의 냄새가 느껴졌다.

‘마물 냄새는 아니고…… 아마도 아티팩트?’

마물이나 마족을 상대로는 더없이 날카롭지만, 그 외의 상대에게는 자이안의 후각도 정밀도가 다소 떨어졌다. 그러나 방 어딘가에 마물이나 마족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이 방도 허탕이구만. 이제 남은 방이 몇 개지?”

“1층은 여섯 개. 지하 2층도 있어.”

“그중에 뭐라도 있겠지. 제발.”

사냥꾼들은 방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이안 일행도 MP를 직접 감지하는 오감이 없었다면 그들과 똑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거기 멀뚱히 있지 말고 얼른 나오십쇼! 방해는 안 할 거라고 그랬잖습니까!”

방에 남은 자이안 일행을 할루드가 다그쳤다. 일행은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얌전히 방을 나왔다.

“안 알려주려고?”

“우선 남은 방을 전부 수색한 다음, 돌아갈 때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 괜한 소릴 하면 저분들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자이안 님.”

몇 시간에 걸쳐 1층을 모두 돌아보았을 즈음엔 심야가 되어 있었다. 잠시 밖에 나갔다 돌아온 데이라가 밤이 늦었음을 알렸다. 일행들은 텅 빈 방 하나를 잡고 야영을 준비했다.

“거 그렇게 너무 떨어져 있지만 말고, 이리 와서 이것 좀 드셔보십쇼. 데이라가 성격은 좀 개차반인데 의외로 요리는 또 잘 합…… 끄악!”

“대장? 대장은 항상 쓸데없는 한 마디가 문제야.”

할루드의 제안에 자이안 일행이 사냥꾼들과 합류했다. 여전히 친밀하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지만, 그래도 거리가 줄어든 만큼은 가깝게 느껴졌다.

“그쪽 분들은 오늘 갑자기 이렇게 억지를 부린 이유가 뭡니까? 거 보니까, 그냥 샌님은 아닌 것 같은데.”

직접적으로 마물을 쓰러뜨리며 실력을 보여준 것은 유리아 뿐이었지만, 할루드의 눈에는 자이안과 소아레스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오늘 하루 상당한 강행군을 펼쳤는데도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쫓아왔다는 것 자체가 그저 돈과 권력에 빌붙기만 하는 높으신 집 도련님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이유. 글쎄요.”

자이안은 대답을 흐렸다. 감추려는 게 아니라, 아직 명확히 말로 표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애초에 자이안 본인의 의지라기보다는 퀴나스에게 떠밀리듯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저는, 음. 성국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할루드의 질문은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여러분들은 성국에 머무른 지 얼마나 지나셨나요?”

“우리? 글쎄. 한 반년 됐나? 반년 맞냐?”

“반년 좀 넘었지. 아마 7달 정도 됐을걸.”

“그쯤인가 봅니다. 동업자 중에서는 제법 일찍 자리를 잡은 편이지.”

자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성국은 1년 전만 해도 지금과는 크게 다른 나라였잖아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부패한 고위 사제들이 무더기로 숙청당하고, 지도자와 국호가 바뀌고…… 1년 사이에 커다란 변화를 겪었죠. 그래서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요. 이 나라가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지, 또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지는 않은지.”

“흐음. 이상한 이유구만.”

나무잔에 담긴 에일을 쭉 들이켠 할루드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나쁘지 않은 나라인 것 같은데. 우리가 보물 사냥꾼이라 나라에서 우대를 받고 있어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데, 치안도 좋고 국민들도 착하고, 윗대가리도 신기할 만큼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는 것 같고. 적어도 난 이 나라에 발붙인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흘러간다면 아마 여기 뼈를 묻게 될 거예요.”

“보물 사냥꾼이라는 일을 하면서 길바닥에서 굶어 죽지 않고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으면 그거야 뭐 천국이죠. 안 그래, 대장?”

“그래, 우리 같은 놈들한테야 돈 잘 벌고 안 굶고, 잘 먹고 잘살 수만 있으면 다 천국이지. 그하핫.”

“기사님은 어때요?”

“저, 저 말씀이십니까?”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서 혼자 동떨어져 있던 기사가 흠칫 놀라 더듬거렸다. 그는 아직도 자이안이 무서웠다.

“기사님은 이 나라가 성국이 아닌 법왕국이었을 때부터 살고 계셨죠.”

자이안의 진지한 시선에 그 역시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조금 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으음, 이리 말하면 좀 속되어 보입니다만, 지금이 즐겁습니다.”

“즐겁다?”

“법왕국은 솔직히 좋은 나라는 아니었죠. 국민 전체가 신앙을 맹종하며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허구한 날 여기저기서 사고가 터지면서 중재를 위해 불려 나가기 일쑤입니다만, 원래 사람이 산다는 게 그런 것 아닙니까? 저는 지금 성국이 훨씬 ‘사람이 사는 나라’라고 느껴집니다.”

그는 허허 웃으며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제가 좀 이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 나라 토박이가 아니거든요. 다른 나라에서 고아로 지내다가 우연찮게 순례 중인 수도사제의 눈에 띄어 입양되었죠.”

성국에서 오래 살았으면서 나라 안과 바깥의 환경을 모두 겪어본 기사의 말은 더없는 객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옛날이 어땠느니 법왕국이 어땠느니, 그런 게 뭐가 중요합니까? 앞으로가 중요한 거지. 자, 오늘 하루도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하룻밤 푹 쉬고, 불침번 까먹지 말고, 내일 다시 힘내서 작업합시다.”

할루드가 자리를 정리했다. 자이안 일행은 그들의 배려로 불침번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자이안은 이대로 계속 배려만 받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밤새 주변을 경계했다.

각성자로서 충분히 자신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진 지금, 하룻밤 정도 자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틀 차. 오전에 다시 한번 지하 1층을 수색한 뒤 마침내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2층은 1층보다도 훨씬 어둡고, 텁텁하고, 그리고 넓었다. 복도가 복잡하게 갈라져 있었고 방도 더 많았다.

“창고가 아닌 것 같은데. 숙소?”

“비슷한 것 같아, 대장.”

“이번엔 제발 좀 뭔가 건질 게 있으면 좋겠는데.”

할루드의 간절한 바람도 무색하게 오후 내내 수색을 거듭해도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분위기가 점점 더 가라앉고, 마침내 복도 끝에 위치한 마지막 방 하나만 남았다.

“그냥 목제 문인데, 멀쩡하게 남아있어. 다른 방은 다 썩어서 흔적도 없어졌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중요한 공간이었던 것 같은데. 기대해볼 만하겠구만.”

함정 같은 위험 요소가 없음을 확인한 뒤, 할루드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오래된 경첩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그 순간, 자이안이 흠칫 놀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위험해요!”

다급하게 소리치며, 자이안이 할루드의 옷자락을 붙잡아 거칠게 잡아당겼다. 할루드는 상상도 못 한 우악스러운 힘에 그대로 공중에 붕 떠 뒤로 날아갔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린 문 너머에서 튀어나온 창날을 자이안이 팔뚝을 들어 막아낸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던 사냥꾼들은 뒤늦게 위화감을 느꼈다. 날붙이와 사람 피부가 부딪쳤는데 쇳소리?

“마물입니다! 문 너머에 숨어있어요!”

이 순간 손을 내밀지 않고 지켜만 보겠다던 다짐은 자이안의 마음속에 온데간데없었다. 문을 거칠게 박차고 안쪽으로 뛰어든 자이안이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녹슨 냉병기를 든, 고블린과 놀이 섞인 마물의 무리. 그리고 방 한쪽 구석에 아티팩트인 듯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자이안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마물들을 섬멸하기 시작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도 지체하지 않고 합류했다. 스무 마리가 넘는 마물이 모두 정리되는데 걸린 시간은 몇 초에 불과했다.

“아니,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며 할루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그 사이에 자이안 일행은 방 곳곳을 수색했다. 아마도 병기고인 듯했으나, 대부분은 녹이 슬고 부러져서 쓸모가 없어 보였다. 건질만 한 건 안쪽에 보관된 아티팩트 하나였다.

“보세요! 유물을 찾았어요!”

자이안이 할루드를 돌아보며 천진하게 손을 흔들었다. 할루드는 문득 기사가 왜 그렇게 자이안을 어려워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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