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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5) (131/210)


131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5)
2023.02.11.


“싱숭생숭…… 어려운 표현도 할 줄 알게 됐네요, 퀴나스.”

“말 돌리지도 말고요.”

“……제 표정이 그렇게 티가 났어요?”

“지금까지 보여준 당신 성격을 생각하면 뻔하죠. 지금 당신이 머릿속으로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맞힐 수 있다고요.”

자이안은 곤혹스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퀴나스는 그를 거의 노려보듯 하다가, 포기했다는 듯 작게 한숨을 뱉었다.

“……당신한텐 어려운 일이겠죠. 책임을 느끼지 말라는 게.”

책임.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자이안의 마음속의 짐을 명쾌하게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 하고 자이안은 탄성을 터뜨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제가 지금 책임을 느끼고 있는 거군요.”

“이 나라가 이렇게 변하고 있는 게 정말 최선일까. 자신이 1년 전에 좀 더 잘했더라면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정말로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자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게 두 분께 실례되는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어렵네요.”

“흥. 그래도 그게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네요.”

오래전에, 유리아와 비슷한 문답을 했던 기억이 났다. 미처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목숨의 무게에 책임을 느끼던 그에게 유리아는 그저 잘했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뭐, 사람이 과거의 일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자이안 넌 그게 좀 과해서 문제일 뿐이고.」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이. 솔직히 이건 자이안 표정이 문제가 아니라 퀴나스가 눈치가 좋았던 거라구.」

실제로 유리아와 소아레스는 그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었으나 따로 화제로 삼지는 않았다. 자이안이라면 충분히 혼자서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퀴나스는 아니었다. 자이안과 오래 알고 지낸 게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는 사람이 그런 우중충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못 견디는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이니까 자이안을 저버리지 못하고 1년 전에도 성녀를 자처했던 것이다.

착한 사람이란, 바꿔 말하면 오지랖을 잘 부리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제가 당신 머리통을 열고 직접 생각을 뜯어고칠 수도 없고…… 아, 그렇지.”

팔짱을 끼고 무서운 소리를 하던 퀴나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을 떠올린 듯 손뼉을 쳤다.

“며칠 더 머무를 거죠? 혹시 유적 탐색 한번 안 해볼래요?”

“네?”

자이안은 혹시 자기가 중간에 잠깐 졸아서 못 들은 얘기가 있나 의심했다.

* * *

“오늘 하루 임시로 동행하며 저희와 함께 작업하실 분들입니다. 유리아 알즈레드 님. 소아레스 님. 그리고 자이안 알코스 님.”

팀의 대장인 할루드는 오늘이 최악의 날이 될 거라는 예감을 강하게 느꼈다.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났을 때부터 신기하게 머리가 개운했다. 아침으로 가볍게 챙겨 먹은 고기 완자 요리에는 그가 좋아하는 파슬리가 큼지막하게 세 덩이나 들어 있었다.

팀원들도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좋다며, 분명 운수 좋은 날이 될 것 같다고 서로를 격려했다.

그때까지는 좋았다. 좋았는데…….

“동행? 이렇게 갑자기?”

탐색을 함께 하기로 한 기사가 예고도 없이 못 보던 얼굴을 세 명이나 달고 왔다. 두 명은 연약해 보이는 여자, 나머지 한 명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샌님.

그가 두르고 있는,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말도 안 되게 고급스러운 재질의 망토를 보고 할루드는 그들의 정체를 단번에 짐작했다. 귀족, 아니면 부자. 어느 쪽이든 할루드가 결코 좋아할 수 없는 놈들이었다.

“샌님 하나에 여자 둘? 이보십쇼, 기사님. 우리가 하루 이틀 같이 일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기사님도 이 바닥 생태는 이제 알 만큼 알고 계시잖아? 이게 지금 가당키나 한 소리라고 생각해요?”

언성을 높인 그의 거친 말에 기사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러면서 연신 자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까지 마주한 대부분의 기사가 그렇듯, 그 역시 자이안의 얼굴과 그 행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태양을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마법사와 함께하며 용을 손발처럼 부리는, 사람의 껍질을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괴물.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사들이 자이안에 대해 가진 이미지였다.

“하, 이런 젠장. 오늘 일진은 조졌네.”

눈치를 살피는 기사의 모습을 보며 할루드 역시 사정을 대충 추측했다. 물론 그 추측은 사실과는 크게 동떨어져 있었다.

“쯧, 내가 기사님한테 괜한 소릴 했구만. 하기야, 기사님이라고 우리와 뭐 다를 거 있겠습니까. 높으신 분이 까라고 하면 까고, 후려치면 그대로 얻어맞아야지. 거 싫은 소릴 해서 미안했습니다.”

「하하. 자이안을 억지를 부린 귀족 자제 같은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요.」

「원래 안 되는 걸 권력으로 억지로 끼어든 건 맞으니까,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구만.」

「아저씨, 말은 바로 해야죠. 이게 자이안이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퀴나스가 억지로 시킨 거지.」

「그걸 저 치들이 이해해주기나 하겠냐? 그렇다고 사실대로 밝힐 것도 아니고.」

정작 자이안은 대놓고 비꼬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애초에 사실도 아닌 모함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도 없었고, 갑자기 일정이 틀어진 그들의 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이안 님, 이분들이 오늘 함께하게 될 4인조 보물 사냥꾼 팀입니다. 대장이면서 전투를 맡은 할루드 씨, 그리고 척후를 전담하는 데이라 씨, 정밀 수색을 맡고 유사시에 전투를 보조하는 폴룩스 씨, 마지막으로 보급을 책임지는 그루스크 씨.”

“여러분들의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쯧. 그래요. 뭐, 어차피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을 테고…… 어휴.”

정중한 태도에, 못마땅하게 자이안을 바라보던 할루드도 결국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는 뒤통수를 거세게 벅벅 긁고는 자이안에게 다가가 솥뚜껑 같은 커다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잘해봅시다. 방해는 안 할 거라는 그 말, 잘 지키나 지켜볼 겁니다.”

자이안이 그의 손을 마주 잡고는 자연스럽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할루드가 중간에 잠깐 장난삼아 힘을 꽉 줘보기도 했으나, 자이안의 표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할루드는 짐짓 덤덤한 표정으로, 그러나 놀라움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하며 손을 거뒀다.

“세 분은 저희 일정을 아무것도 모를 테니 가볍게 설명드릴 겁니다. 한 번만 설명할 테니 놓치지 말고 다 주워들어야 합니다.”

할루드를 중심으로 모두가 모였다. 그는 면면을 천천히 돌아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계획은 2박 3일짜리 일정입니다. 터무니없는 사고가 터지지 않는 이상은 그보다 더 줄거나 늘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여기서 숲을 가로질러서 목적지까지 향하는 데 도보로 약 8시간. 유적의 구조를 확인하며 30분 정도 짧게 쉬고, 이상이 없으면 바로 진입해 탐색을 시작합니다. 야영은 유적 안에서 합니다. 아, 잠깐. 그루스크, 천막이랑 보존식 남는 거 있냐?”

“예비로 몇 개 쟁여놓는 거야 항상 있지. 세 명 정도야 뭐, 어떻게든…….”

“야영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도 나름대로 준비해 왔습니다.”

자이안이 등에 멘 커다란 배낭을 가리켰다. 할루드는 그를 말없이 빤히 바라보다가 툭 말했다.

“살충용 연고는?”

“예?”

“야생동물을 내쫓는 데 쓸 악취 경단은? 마물을 유인할 수 있는 손가락 피리는? 긴급 탈출용 섬광탄은? 구조 요청용 봉화는? 자잘한 부상을 회복하는 데 쓸 연고와 붕대는?”

“어어…….”

“그래요. ‘나름대로’ 잘 준비해 오셨구만.”

할루드는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끊긴 설명을 재개한 그를 보며 자이안은 어깨를 움츠렸다.

“유적 규모가 꽤 작은 편이라니 별로 기대는 안 되지만, 뭐라도 하나 건지기를 빌며. 일확천금을 향해, 그럼 다들 출발합시다.”

짧은 설명을 마친 할루드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정밀 수색 담당 폴룩스가 두 번째, 그리고 보급 담당 그루스크가 그다음. 자이안 일행은 그 뒤였고, 신성 기사가 최후미를 지켰다.

척후를 맡은 데이라는 정해진 위치 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거기가 당신들 정위칩니다. 제가 뭐라 말하기 전에는, 눈앞에서 갑자기 폭탄이 꽝 하고 터져도 절대 벗어나면 안 됩니다.”

어지간히도 못 미더운지 할루드는 사사건건 자이안 일행을 바라보며 충고를 했다. 일행들도 되도록 그의 지시를 따랐다.

퀴나스의 조언 때문이었다.

「“전 지금 성국이 마음에 들어요. 저와 성녀님이 힘을 합쳐 간신히 꾸려나가고 있는 이 나라가.”」

자이안은 여기 오기 전 그녀에게 들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물론 지금은 좀…… 과하게 활기차기는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훨씬 사람다운 나라가 됐다고 생각해요. 자기 나라 국민을 거리낌 없이 납치해서 마약에 절여 폭탄으로 만들고, 앞으로는 교리를 부르짖어 국민들을 세뇌시키면서 뒤로는 교리도 정의도 저버리고 자기 배나 불리기 바쁜 돼지들이 득실거렸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리 말하는 퀴나스에게 한때 성국 전역에 만연했던 우민화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가 당신들을 만나고 성녀님께 배우면서 변한 것처럼, 이 나라 전체가 변하고 있는 거예요. 어쩌면 아픔을 동반할 수도 있겠죠. 그래도 저는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확신해요.”」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며, 그 두 눈은 올곧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한 번 직접 느껴 봐요. 멀리 떨어져만 있지 말고, 가까이 붙어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제대로 지켜보라고요. 괜히 성격 못 참고 손 내밀지 말고, 말 그대로 지켜만 보는 거예요. 알았어요?”」

때문에 이번에는 되도록 튀는 행동은 하지 않고 전문가, 즉 보물 사냥꾼들의 지시에 따를 셈이었다.

그리고 사실 보물 사냥꾼이 어떤 식으로 유적을 수색하고 유물을 찾아내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프레이처럼 신이 나서 환호할 정도는 아니어도, 자이안에게도 그런 모험에 대한 동경심은 있었다.

“대장. 근처에 곰이 있는 것 같아. 서쪽으로 조금 우회하는 게 좋겠어.”

“곰? 며칠 전만 해도 별 얘기 없었는데, 또 그새 어디서 굴러 들어와서 둥지를 틀었나 보구만. 자, 다들 들었습니까? 경로를 조금 우회할 건데, 일정을 맞춰야 하니 속도를 조금 높일 겁니다. 뒤처지지 말고 따라오십쇼.”

원래는 빠른 걸음에 가까웠던 속도가 뜀박질에 가까워졌다. 그래도 뒤처지는 인원은 한 명도 없었다. 할루드는 태연하게 속도를 맞추는 자이안 일행을 흘깃 보고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그래, 평범한 도련님은 아니라 이건가?”

작은 혼잣말을 각성자의 예민한 청각이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자이안은 쓴웃음만 삼켰다.

“자이안 님.”

“자이안, 잠깐만.”

간간히 짧은 휴식을 섞어가며 달리는 중,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자이안은 둘을 돌아보며 고개만 한 차례 끄덕였다. 마물의 냄새였다. 아주 약하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 냄새는…… 아마 코볼트 아니면 놀인 것 같은데, 혼자 돌아다니는 걸 보면 놀일 가능성이 높아요.”

하위 마물은 대부분 무리를 짓지만, 놀은 몇 안 되는 예외였다. 그만큼 하위 마물치고는 한 마리의 전투력이 강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좋았다. 한 마리만 빠르게 처리하고 지나가면 그만이니까.

“잠깐! 모두 멈춰! 아무래도 근처에 마물이 있는 것 같…….”

자이안 일행보다 조금 늦게 척후를 맡은 데이라가 위기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유리아가 던진 단검이 허공을 갈랐다.

-케헤헤헹!

멀리서 개의 울음소리를 연상케 하는 단말마가 들렸다. 미간 깊숙이 단검이 박힌 놀이 경련하며 쓰러졌다.

유리아가 시선을 던지자 마물의 미간에 꽂힌 단검이 저절로 뽑혀 마치 시간을 되감듯 유리아에게 되돌아왔다. 그대로 손아귀에 쥐이더니, 크기가 줄어들어 평범해 보이는 은빛 귀걸이 한쪽이 되었다.

유리아는 새침한 얼굴로 귀걸이를 걸고는 우두커니 멈춰선 할루드 일행을 바라보았다.

“안 갈 거예요? 일정 맞춰야 된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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