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4) (130/210)


130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4)
2023.02.10.


“맞아요.”

당대 성녀, 퀴나스는 그 지위에 걸맞지 않게 검소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사실과 그리 다르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사치나 남을 부리는 행동에 익숙하지 못한 것일 뿐이기는 했다. 애초에 성국의 상황이 성녀라고 해서 마음껏 사치를 부려도 될 만큼 넉넉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녀가 시종도 한 명 없이 자기 손으로 차를 우려내 손님에게 대접하는 건 별로 이상한 광경도 아니었다.

“전부 다 성녀님이 생각해내신 거예요. 저는 옆에서 그냥 보조만 했고요.”

여섯 잔이나 되는 차를 맛이 상하지 않도록 꼼꼼하게 우려낸 퀴나스가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차의 향과 맛을 음미하며, 퀴나스의 맞은편에 앉은 자이안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역참 마을에서의 소란 이후 보름.

성국은 작은 나라다. 국경에 인접한 외곽지대에서 성도까지, 마차를 조금 빠르게 몰면 보름이면 충분히 도착할 정도였다.

오는 길에 몇 번 사건에 휘말릴 뻔한 적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되도록 관여하지 않았다. 보물 사냥꾼들의 존재가 성국의 생활에 깊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했다.

성도에 도착한 자이안은 이번에는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당연히 몇몇 신성 기사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성녀를 만나러 왔다는 말을 전하자,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태양궁에 안내받을 수 있었다.

“퀴나스? 언제까지 저를 ‘성녀님’이라고 부를 셈인가요? 이제 성녀는 당신이잖아요?”

“하지만 성녀님은 성녀님인걸요. 설마…… 제가 그렇게 부르는 게 싫으세요, 성녀님……?”

“그럴 리가 있나요. 그저 공적인 자리에서까지 호칭을 실수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랍니다.”

퀴나스와 전대 성녀는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였다. 각성자들이 그 모습을 보며 ‘조교’라는 이상한 단어를 중얼거리기도 했으나, 무슨 뜻인지 되묻지는 않았다. 시답잖은 소리만 듣게 될 거라는 강한 예감 때문이다.

“알다시피, 1년 전만 해도 성국은 그대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어요. 독이든 뭐든, 살아남기 위해 무작정 먹어치워야 했답니다. 야울이 저를 살리기 위해 마약을 먹였던 것처럼 말이죠.”

예상대로, 성국과 길드 사이의 강한 유착은 두 성녀가 의도한 것이었다.

“성국에는 예전부터 유적이 아주 많았어요. 다만, 함부로 탐색할 수 없도록 사제들의 손에 엄중히 관리되고 있었죠. 태양신의 존재와 교리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흔적이니까, 사람이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명목이었어요.”

성국 전역에는 그런 식으로 손도 대지 않은 채 말 그대로 ‘관리’만 되고 있었던 유적이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집권 초기, 인력도 금력도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기. 그녀가 아무리 출중한 수완을 가졌어도 한계가 있었다. 애물단지처럼 보이는 유적들을 이용할 생각을 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유적이 얼마나 많길래 사람들이 아티팩트를 하나씩 들고 다녀요?”

“거기에 대해서는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네요.”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성국의 유적은 유물, 즉 아티팩트가 발견되는 빈도가 아주 높은 편이었다. 자이안의 추측으로는 시조 성녀와 성자, 즉 두 하이엘프가 연관됐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유물이 숨겨져 있는 유적은 마물의 둥지가 되기 쉽다. 마물 역시 MP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일단 한 번 마물의 둥지가 되면 안에 있던 유물이 멀쩡하게 남아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다. 유물이 파괴되면 마물들은 오래 머물지 않고 곧 다른 장소로 떠난다. 보물 사냥꾼들이 싫어하는 ‘허탕’이 대부분 이렇게 만들어진다.

오랜 옛날부터 유적들을 엄중하게 관리한 성국의 관습은 의도치 않게 이런 상황을 막는 역할을 했다. 성국을 찾아온 보물 사냥꾼들은 유례없는 호황을 노리고, 소문을 들은 사냥꾼들이 더 많이 몰려오는 순환을 낳았다.

“상황이 절묘하게 들어맞았답니다. 운이 좋았죠.”

물론 두 성녀가 그런 상황이 되도록 노력한 결과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사제들의 목소리가 작아진 대신, 그 자리를 길드가 꿰찼다.

두 성녀는 당근과 채찍으로 그들을 제어하고자 했으나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칼밥을 먹고 사는 이들이 늘어나니 나라 곳곳에서 크고 작은 마찰이 일어났다. 그 모두를 관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유명한 보물 사냥꾼이 어느 날 순간의 실수로 큰 부상을 입고 어이없게 은퇴하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유적을 탐색한다는 건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이죠. 그래서 성국에서는 신성술을 사용할 수 있는 기사와 사제를 파견해 길드의 일을 돕고 있어요.”

효과는 탁월했다. 그런 정책이 없던 과도기에는 사냥꾼들과 기사단 사이에 거친 싸움이 벌어지고 누구 하나 죽어 나가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지금은 사냥꾼들과 사제, 기사들 사이에 확실하고 긴밀한 관계성이 생겨났다.

성국에 밉보이면 다쳐도 치료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사냥꾼들을 얌전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저들끼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치고받지만, 적어도 주변에까지 민폐를 끼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반발이 꽤 컸을 것 같은데, 괜찮았나요?”

“퀴나스의 도움이 아주 컸답니다. 어지간한 정책은 ‘재림성녀’의 이름을 걸면 큰 마찰 없이 받아들여지니까요.”

성국은 좋게도 나쁘게도 종교에 극단적으로 의지하는 국가. 직접 기적을 선보이며 그들이 숭상하는 종교의 상징으로서 나타난 퀴나스에게 대놓고 반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대대적인 숙청이 바로 얼마 전이었으니, 그런 일에 반발할 만큼 모험심이 많은 이들이 없기도 했어요.”

그리 말하며 성녀는 살풋 웃었다. 자애로운 표정과 달리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 싶은 분이 있었어요.”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었을 무렵, 갑자기 성녀가 손뼉을 작게 두드리며 그런 말을 꺼냈다. 자이안 일행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성국에서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진 건 두 성녀뿐일 텐데.

“후후. 아마 여러분도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성녀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퀴나스가 아주 자연스럽게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둘을 뒤따라 태양궁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예배당. 태양궁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건물이다.

예배당을 지키는 두 기사가 두 성녀의 얼굴을 보고 정중하게 경례했다. 뒤따르는 자이안 일행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눈을 크게 치켜떴다.

“저희가 직접 초대하신 분들이에요. 예를 갖춰 행동하시길 바랄게요.”

바짝 굳은 채 고개를 끄덕인 두 기사가 예배당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부터 환한 빛이 쏟아졌다.

「신성력이잖아?」

환한 빛으로 가시화되어 보일 정도로 진한 신성력. 자이안의 뇌리에 문득 1년 전의 어느 광경이 떠올랐다.

예배당 내부의 광경은 절반은 예상대로였다. 제단 위에 놓인 성유물이 저 혼자 공중에 둥둥 뜬 채 환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

예상 밖의 광경도 있었다. 성유물 바로 위쪽에 마치 유령처럼 반투명한 여성의 모습이 깜빡거리며 비쳐 보였다. 그 얼굴을 본 자이안이 흠칫 놀라 멈췄다.

“저희 왔어요. 잠깐 불 좀 꺼줄래요?”

얼이 빠진 자이안을 놔두고 퀴나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자 정말로 성유물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반투명한 여성이 슬쩍 눈을 떴다.

-무슨 일이야? 나 오늘 바쁘다고 했잖아.

“반가운 분들이 와서 소개해주려고요.”

-갑자기 무슨 농담을…… 어? 세상에. 이게 누구야?

반투명한 여성이 자이안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자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질풍?”

-질풍이라. 그 이름 오랜만에 듣네.

성국과 보석탑과의 전쟁 도중 만난, 탑의 네 장로 중 한 명. 얼굴도, 목소리도 자이안이 기억하고 있는 질풍이 맞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프레이와 아르스의 설명에 의하면 네 장로는 아티팩트의 자아와 융합되어 사실상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는데.

-흐히히. 너희들도 이건 예상 못 한 모양이네. 맞아. 나는 살아남았어. 나 혼자 살아남았지.

반투명한 몸의 질풍이 예배당 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아니, 사실 그걸 질풍이라고 불러야 할지 조금 애매했다. 겉모습은 질풍이 맞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보니 위화감이 조금 있었다. 무엇보다도 냄새가 달랐다.

“반년 전, 성유물의 힘으로 성국 전역의 가호를 강화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났어요. 그녀가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성유물의 힘이 대폭 강해졌죠.”

-내가 성유물이고, 성유물이 곧 나야. 진정한 의식이 눈을 떴으니 잠재되어 있던 힘이 모두 풀려난 거지.

“저희는 ‘루’라고 부르고 있어요. 자기 입으로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하더라고요.”

-‘루’는 내가 잊고 살았던 내 생전의 이름이야. 너희들 덕분에 떠올릴 수 있게 됐지.

두 성녀에게는 그녀의 존재가 익숙한 듯 보였다. 자이안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일행들도 비슷한 심정이긴 마찬가지였다. 한 명, 팔짱을 끼고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은 케이만 예외였다.

“아티팩트의 자아가 구체화된 거야. 본래는 명확한 의사 표현도 불가능한 미약한 수준의 자아가, 네 개의 의식을 모두 먹어치우고 그만한 힘을 얻게 된 거지.”

“그럼 저건…… 질풍이 아닌 거야?”

“엄밀히 말하면, 네 장로와 아티팩트의 의식이 안정적으로 융합돼서 탄생한 전혀 다른 존재야. 아마 융합 과정에서 질풍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긴 한 것 같아. 그래서 지금은 저런 모습이 된 거지.”

-역시 전설적인 용은 보는 눈이 다른걸. 덕분에 귀찮게 설명할 일을 덜었네.

정체는 명확해졌으나 불안이 가시지는 않았다. 질풍은 제자들이 잘못했다는 걸 알고도 그들을 구하려고 자이안에게 싸움을 걸었던 성격이다. 탑이 와해되고 성국만 남아있는 지금 상황에서 성국에 앙심을 품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옛날 일은 잊어버렸는데?

정작 질풍, 아니 루는 태평한 모습이었다.

-농담이야. 잊어버리진 않았어. 잊어버릴 순 없겠지. 하지만 지금은 따로 미련이 남아있지는 않아. 제자들은 잘못을 했으니까 벌을 받은 거고, 나도 제자들을 못 막은 죄가 있으니까 벌을 받은 거지. 게다가 난 살아 있잖아? 그럼 잘 된 거지.

과거의 감정 따위는 시원하게 정리한 듯한 모습이었다. 자이안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인간의 역사가 항상 번영으로만 가득하지는 않잖아. 성국도 언젠가는 멸망해 없어질 테고, 그때 나 혼자 남게 되면…… 글쎄? 또다시 마법사들을 모으고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지도. 이번에는 더 악랄하고 비정하게.

자이안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루는 농담이라는 듯 깔깔 웃었다.

-무서운 표정 짓지 마, 얘. 그냥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일 뿐이잖아?

루와의 만남은 그것이 끝이었다. 성녀의 말대로, 깜짝 놀랄 만남이기는 했다. 그만큼 심장에 나빠서 문제지.

“저런 성격이지만 사실 루는 성국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요. 성도로 오면서 혹시 느끼지 못하셨나요? 지금 성국에는 어느 때보다도 마물이 활발하게 출몰하고 있어요.”

그 말에 일행들은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변경 마을이 마물의 습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라지만, 오우거나 사이클롭스 같은 강한 마물까지 섞여 나오는 건 비정상적이었다.

“유물에서 유적을 발굴해낼수록 마물의 준동이 점점 활발해지더군요. 아마도 고대 유물에 마물을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있는 듯해요. 루가 성유물의 힘을 끌어내 성국 전역에 가호를 펼치고 관리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평화롭게 유적이나 파헤치고 다닐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렇다고 유적 탐색을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와서 그걸 막는다는 건 성국 스스로 목을 조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까.”

앞서 걷던 퀴나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런 싱숭생숭한 표정 좀 하지 마요, 자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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