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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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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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3)
2023.02.09.
「트레져 헌터 길드라고……?」
프레이가 얼이 빠진 듯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 최고잖아?!」
그러다가 다음 순간 두 팔을 높이 들며 환호했다.
「까, 깜작이야. 갑자기 소릴 지르면 어떡해요?」
「자이안. 우리가 일정이 바쁘던가? 그렇게 바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성국에 한 몇 달 정도는 느긋하게 머물러도 괜찮지 않을까?」
그는 옆에서 타박을 주는 유민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듯한 태도였다. 어린애처럼 신이 난 모습에 자이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신기하긴 하네요. 마치 법왕…… 성국에서 보물 사냥꾼을 우대하는 것 같아요.”
바뀐 국호가 아직 입에 잘 붙지 않았다. 차차 적응해야 할 변화였다. 성국의 모습이 1년 전과 크게 변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 자이안. 좋은 지적이에요. 맞아요. 뒤를 봐주는 무언가가 없었다면 저런 조직이 1년 만에 마을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규모를 키울 수는 없었겠죠.」
다른 일행도 자이안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아마 성도에 도착하면 어쩌다 나라가 이렇게 변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을 터였다.
역참 마을은 예상보다 훨씬 더 인파로 붐볐다. 여관 등 전문 숙소는 이미 만원이 된 지 오래였고 민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바닥에 대충 자리를 펴고 야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아예 야영을 위한 넓은 공터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좋게 말하면 활기가 넘쳤고, 나쁘게 말하면 소란스럽고 치안이 나빴다. 순찰 병력이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크고 작은 다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병사들 역시 어지간히 큰 소란이 아니면 적극적으로 중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사냥꾼들이 스스로 규칙을 정해, 너무 과격한 사건이 터지지 않도록 치안을 관리하는 것이다.
“분쟁은 기본적으로 외부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당사자끼리 해결합니다. 다만 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피해를 입었을 경우, 조합을 찾아오시면 자초지종을 확인해 어느 정도는 해결해드릴 수 있습니다. 또 분쟁이 지나치게 커지면 저희가 중재를 위해 병력을 파견할 수 있고, 그래도 쌍방이 납득하지 못하면 목숨을 건 결투로 확실하게 시비를…….”
야영지를 찾고 있는 자이안 일행에게 길드의 조직원이 찾아왔다. 그의 설명을 핵심만 간추리면 ‘자기가 벌인 일의 책임은 스스로 져라’라는 것이었다.
자이안은 이런 규칙을 나라에 소속된 병사나 관리가 아니라 사조직에 가까운 길드에서 알려준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 자체는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성국에 인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아마 지금에 와서는 관행으로 굳어졌을 거예요. 나라 입장에서도 자잘한 치안을 길드가 대신 봐주면 그만큼 여유가 생기니까, 손해 볼 일은 없죠.」
「지구였다면 정경유착으로 난리가 났겠지만, 이쪽 가치관을 저쪽에 대입하는 것도 웃기는 짓이고…… 퀴나스가 머리를 잘 썼어. 아니지, 이건 전대 성녀의 발상이겠구만.」
국민을 우민화하고 그 어떤 나라보다도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유지했던 나라가 지금은 사조직에 치안을 의뢰하다니. 대담한 변화였다.
언제까지고 감탄할 수만은 없었다.
스물도 채 되지 않은 청년 하나. 겉으로 봐서는 연약해 보이는 여자 둘. 설상가상으로 어린아이까지. 고급스러운 마차를 끌고 있는 자이안 일행은, 길바닥에 야영 중인 사람들 눈에는 그저 걸어 다니는 보물창고로 보였다.
마찰이 일어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마을에 도착하기 전 잠시 말을 나눴던 사냥꾼의 행동이 바로 이런 상황을 예견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선발대였다.
친한 척 접근해 자이안 일행의 역량을 살피고, 만만해 보이면 털어먹을 준비를 하고 버거워 보이면 동료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는 역할.
그의 경고는 동료 사냥꾼들 사이에 충분히 퍼졌으나, 그럼에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어리석은 이는 어디에나 있었다.
“으아악!”
몰래 접근해 마차 짐칸을 뒤지려던 한 사냥꾼이 별안간 찢어지는 비명을 터뜨렸다. 어느새 그의 뒤에 바짝 붙은 소아레스가 가차 없이 팔목을 붙잡아 꺾은 것이다.
천막을 깔고 야영을 준비하던 자이안과 유리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차 지붕 위에서 뒹굴거리던 케이만 호기심에 찬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 이거 놔! 놓으라니까!”
남자는 악을 쓰며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붙잡힌 팔은 돌이 되어버리기라도 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아레스는 차가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작은 분쟁은 당사자끼리 해결하면 된다고 했죠.”
아마도 남자의 동료인 듯한 일단의 무리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 자리에서 달아났다. 그들도 소아레스에 관한 경고 자체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프리엔 제국의 오랜 법전에 따르면, 도둑질은 재물의 가치에 따라 작게는 손가락 하나부터 크게는 손목 전부를 잘라 죄를 갚게 합니다만.”
단단히 붙잡힌 팔목에 싸늘한 날붙이의 감촉이 닿았다. 남자는 창백하게 질린 채 고개를 저어대기 시작했다. 차가운 시선으로 남자를 노려보던 소아레스는 어느 순간 표정을 바꿔 부드럽게 웃었다.
“후후. 농담입니다. 지금이 천년 전도 아닌데, 제국에 그런 야만스러운 법규가 남아 있을 리가 없지요. 다만…….”
섬광이 몇 번 번쩍였다. 남자는 소아레스가 단검을 어떤 식으로 얼마나 휘둘렀는지 조금도 알아보지 못했다. 춤을 추는 듯한 일련의 작업을 모두 마친 뒤, 소아레스가 남자의 팔을 놓았다.
“옷과 머리카락 정도는 값싼 대가이겠지요.”
두피가 보일 정도로 바짝 잘린 남자의 머리카락이 파스스 흩날렸다.
동시에 그가 입은 망토와 경갑의 조임쇠, 허리춤의 벨트, 돈주머니와 칼집을 고정하는 가죽끈, 안에 받쳐 입은 셔츠의 단추와 소매 이음새 등등이 마치 거짓말처럼 동시에 끊어졌다.
“히이익!”
속옷만 간신히 남은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엉금엉금 기어 도망가는 그에게 소아레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음에 또 보게 되면 그때는 손목입니다.”
“히이이이이!”
개처럼 달려가 사라진 남자를 배웅하고, 소아레스가 일행 곁으로 돌아왔다.
“이 정도면 충분한 본보기가 되었을까요?”
“충분하고도 남을걸? 주변 한 번 봐봐, 언니.”
자초지종을 지켜본 주변의 사냥꾼들이 절반은 두려움으로, 절반은 당혹으로 질린 눈으로 소아레스를 흘깃흘깃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에 대한 경고만은 사실임을, 아니 오히려 경고가 과소평가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소문 역시 빠르게 퍼질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편하게 잘 수 있겠다. 다 언니 덕분이야.”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만…….”
유리아가 장담한 대로, 손버릇이 안 좋은 사냥꾼 한 명을 잘 타일러 돌려보낸 이후로는 아무 마찰 없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근처에서 야영 중인 사냥꾼들은 일행과 시선만 마주쳐도 찔끔 놀라며 자리를 피하기 바빴다.
「하. 눈앞에 꿀단지가 놓여있는데도 먹지를 못하니 배 아파 죽을 맛이겠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오전. 일행은 소모된 물품을 보충하며 다시 성도로 향할 채비를 꾸렸다. 그러나 그들이 준비를 모두 마치고 느긋하게 마차에 올라탔을 즈음.
-땡땡땡땡땡땡!
갑자기 마을 외곽에서 불온한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건…… 꼭 경보음 같은데요?」
-정찰대로부터 보고! 정찰대로부터 보고!
종소리가 들린 곳에서 이번에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확성기 역할을 하는 마도구를 이용한 듯 커다란 목소리였다.
-마물 공습! 마물 공습! 다시 한번 보고! 마물 공습! 마물 공습!
“마물…… 공습?”
자이안이 얼빠진 목소리로 그 말을 따라 했다. 이어 일행들은 한 차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자이안과 유리아, 소아레스 셋이 동시에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케이! 넌 마차를 지켜줘! 필요하면 앞발 정도는 꺼내도 돼!”
“잘 갔다 와~!”
케이의 태평한 배웅을 받으며 셋은 급히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마을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수선해졌다. 이어 마을 곳곳에서 머물던 총 수백여 명의 사냥꾼들이 모두 한 곳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마물 공습이 예상되는 방향이었다.
「저것들은 왜 우리랑 같이 움직이지? 아니, 잠깐. 이거 설마?」
그 움직임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프레이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비슷한 추측을 한 크룩스 역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길드가 치안을 대신한다는 게, 아무래도 이런 뜻인 것 같은데요?」
「마물로부터의 공격을 트레져 헌터들이 막는다고요? 군대가 아니라?」
「신기하네에. 그런다고 이득이 될 게 있나?」
「이득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돈이나 다른 현물을 준다든가. 아니면 무슨 권한 같은 걸 준다든가. 중요한 건 마물 공습 소리를 들은 트레져 헌터들이 망설임 없이 우르르 몰려갈 만큼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다는 거다.」
「성국과 길드의 유착이 상상이상이네요. 이 정도면 그냥 둘이 한 몸이라고 봐도 되겠어요.」
“주목! 대충이라도 좋으니 각자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해 주십시오! 적의 규모와 대응방침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마을 외곽, 한 자리에 모인 사냥꾼들을 상대로 길드 조직원이 악을 쓰며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후미에 도착한 자이안 일행은 그 자리에서 도약해 사냥꾼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선두로 나섰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셋을 보며 길드 조직원이 흠칫 놀랐다.
“다, 당신들 뭡니까? 보물 사냥꾼은 아닌 듯한데…….”
길드원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자이안은 후각을 집중했다. 바람을 타고 마물의 냄새가 느껴졌다. 고블린이나 코볼트 등 보잘것없는 소형 마물이 약 수십 마리.
오크나 임프 등 평범한 민간인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중위 마물도 다수, 거기에 지구에서도 상위 마물로 취급되는 강한 마물인 오우거도 한 마리 있었다.
‘마을에서부터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자이안은 잠깐 스스로의 한심함을 곱씹었다. 세계수의 숲을 떠난 뒤로 지금까지 마물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하면서 기분이 해이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오우거가 하나 있다고?!”
“잡으면 돈방석이잖아! 내 거다! 그놈은 내 거야! 건드는 새끼는 내가 다 죽여 버린다!”
“네 거 내 거가 어딨어, 이 미친놈아! 잡은 놈이 임자지!”
그러나 정작 사냥꾼들의 분위기는 자이안의 반성와는 딴판이었다. 오우거는 한 마리만 나타나도 영지 하나가 쑥대밭이 될 각오를 해야 하는 전설 속의 마물인데, 사냥꾼들은 겁을 먹기는커녕 네 거 내 거 하며 다투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분위기랑 조금 다른데…….”
단검 두 자루를 꺼내 쥔 유리아도 주변을 보며 미묘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충분히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자이안, 한 번 도와주지 말고 구경해 보자.」
“네? 삼촌, 하지만 그랬다가는 자칫 피해가…….”
「이놈들이 무고한 피해자면 모를까, 좋다고 무기를 들고 제 발로 뛰쳐나온 놈들 아니냐? 그럼 뒈져도 자기 책임이지 뭐.」
「저도 솔직히 트레져 헌터들이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긴 하네요.」
「전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구할 수 있는 목숨을 구하지 말고 구경이나 하잔 소리잖아요, 결국.」
「그러엄 나는…… 중립!」
지켜보자는 쪽이 둘, 반대가 하나, 중립이 하나. 자이안은 고민 끝에 타협안을 냈다.
“일단은 지켜보다가…… 상황이 위험해지면 바로 끼어들겠습니다.”
이윽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먼저 양쪽 전위가 먼저 충돌했다. 이어 사냥꾼 측이 적들을 가차 없이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머릿수에서 앞선다고 하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마안을 열고 상황을 지켜보며 프레이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이 녀석들, 다들 크건 작건 아티팩트를 하나 이상 가지고 있다.」
기능도 간소하고 출력도 낮은 기초적인 아티팩트였지만, 있고 없고의 차이는 엄청났다. 조직적인 군대의 전술과는 전혀 달랐다.
강력한 힘을 가진 개개인이 순간의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맞서는, 말하자면 수십 수백의 소규모 전투가 전장에서 일시에 벌어지는 식이었다.
중위 이상의 마물이 전장에 섞이자 양상이 또다시 변했다. 부상자들이 후방으로 빠지고 특출한 전투력을 보인 소수의 사냥꾼들이 강한 마물을 전담했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때때로 말 한마디 없이 자연스럽게 연계를 취하기도 했다.
“오우거다! 오우거가 보인다!”
“돈 덩어리가 나타났다!”
부상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났으나 그만큼 마물이 쓰러지는 속도도 빨랐다. 마안을 통해 계속해서 상황을 지켜본 프레이가 또다시 말했다.
「아주 극소량이지만, 쓰러뜨린 마물의 MP를 흡수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특성을 터득하며 큰 힘을 얻어 ‘각성’하는 게 아니라,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듯 아주 조금씩 강해지는 거다.」
「그럼 저 사람들은 이미 제법 MP 쌓여있겠군요.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닌 모양이니.」
「그렇겠지. 그러니까 마물을 상대로 조잡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저만큼이나 싸울 수 있는 거고. 저쪽에선 오히려 자이안이나 유리아, 소아레스가 특별한 거였어.」
오우거 한 마리에 수십 명의 사냥꾼이 한 번에 달라붙었다. 미리 다른 마물들을 모두 섬멸해 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전투는 오우거를 상대하기 전에 다른 마물을 쓰러뜨릴 수 있느냐 아니냐, 시간 싸움이었던 것이다.
“……삼촌.”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자이안이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냈다.
약속은 약속이니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지만, 역시 이런 건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심한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옮겨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게다가 상황 역시 명백한 열세였다. 오우거 한 마리에 수십 명이 달라붙어 있음에도 제대로 피해를 주기는커녕 계속해서 부상자가 늘어나기만 했다.
가끔씩 통하는 공격도 오우거의 피부에 생채기를 내는 것에 불과했다. 상처라 하기에도 초라했고, 그마저도 마물 특유의 생명력으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젠장! 이런 괴물을 무슨 수로 잡으라는…… 끄아악!”
“병신 새끼야! 내가 한눈팔지 말랬…… 아아아악!”
한 명 한 명 부상으로 전선에서 빠질 때마다 전세가 눈에 띄게 기울었다. 몸을 지키는 아티팩트 덕분에 이 정도지, 그게 아니었으면 벌써 여러 명 오우거의 주먹에 맞아 피떡이 되었을 터였다.
「이제 볼 만큼 본 것 같으니…… 그래, 마음대로 해라.」
허락이 떨어졌다. 자이안은 유리아와 소아레스를 한 차례 돌아보았다. 다음 순간 셋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빌어먹을! 후퇴! 후퇴다! 지금 전력으로는 이놈 감당 못 해!”
“무슨 소리야?! 마을을 포기하자고?!”
“마을이야 다시 세우면 되지! 그렇다고 여기서 다 같이 뼈를 묻을 수는……!”
“가세하겠습니다!”
점점 전의를 잃어가는 사냥꾼들의 머리 위에서 갑작스럽게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사냥꾼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순간 도약 한 번으로 수십 미터를 좁힌 자이안이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스펙트럼을 휘둘렀다.
신장 4.5미터의 회색 거인의 목이 마치 거짓말처럼 허공을 날았다.
“……헐.”
누군가가 허탈한 탄성을 터뜨렸다. 공중에서 한 차례 회전에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자이안은 가뿐히 땅에 착지했다. 잘린 목에서 솟구친 마물 특유의 회색 피가 얼빠진 사냥꾼들 위로 쏟아졌다.
“사, 사이클롭스다! 후방에 사이클롭스가 나타났……! 어?”
잠시 전장에서 빠져 정찰을 맡았던 사냥꾼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달려왔다가 마찬가지로 얼이 빠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멀리서 땅 울림을 일으키며 다가오던 사이클롭스 한 마리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온몸이 잘게 찢어지며 쓰러졌다.
“이게…… 어?”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자이안이 사냥꾼들을 향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도 곧 합류했다. 모두의 시선이 셋에게 모였다.
쏟아지는 시선에 의아해 하던 자이안이 곧 그 뜻을 깨달았다. 그가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돈은 걱정하지 마세요. 시체는 여러분들에게 드릴게요.”
“…….”
사냥꾼들의 표정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뭔 개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