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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끊어지지 않는 악연 (128/210)


125화 끊어지지 않는 악연
2023.02.05.


한때 보석탑이라고 불렸던, 그러나 이제는 이름도 없고 주인도 없는 땅의 북쪽 끝에 자리 잡은 마을.

총인구가 약 20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에 낯선 무리가 정착한 것은 반년쯤 전이었다.

그들은 평범한 행상인처럼 보였다. 오랜 방랑에 지쳐 정착할 곳을 찾고 있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호소했고, 이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머물 곳을 마련해주었다. 그들 역시 행상을 하며 모은 재물이나 잡화 등을 싼값에 팔며 은혜를 갚았다.

“정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요. 남은 생은 여기서 느긋하게 농사나 지을까 합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그저 무해하고 순박한 집단으로 보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정체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의심을 갖고 자세히 살피면, 이상한 점을 몇 가지나 살필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평생 행상만 했다던 그들이 묘하게 농사일에 능숙하다는 점.

그들 중 한두 명이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가 지난 뒤에야 다시 나타나고는 한다는 점.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행상 동료라기보다는 상명하복이 철저한 군인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

발달한 근육의 형태가 농민이나 행상인의 것보다는 무술을 훈련받은 병사의 것과 비슷하다는 점.

그럼에도 그들은 마을 생활에 잘 녹아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1년도 더 전 보석탑이 와해되었을 때, 마을 역시 적지 않은 악영향을 받았다. 카펜트리 상회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활이 안정된 것이 바로 몇 달 전이다. 제 손으로 다시 불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숲의 상황은?”

“진입은 여전히 불가능합니다. 나무들이 스스로 움직이며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유일하게 잠들지 않은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불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방에서, 그러나 오랫동안 단련한 안력으로 문제없이 서로를 알아보며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대장. 언제까지 이 임무를 계속해야 합니까?”

“다른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 혹은, 목표가 제 발로 숲을 빠져나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어느 쪽이 됐건 까마득했다. 가장 말단인, 그래서 가장 어리고 감정을 절제하는 것도 서투른 남자의 표정에 희미하게 불만이 어른거렸다가 사라졌다.

대장은 그 모습을 보고도 일부러 지적하지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로 그 불만을 이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들은 평생 이 좁은 마을에서 농사나 짓다가 늙어 죽게 될지도 몰랐다.

“감정에 좌우되지 마라.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비수다. 주인의 뜻대로 휘둘러지는 비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는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던 순간 찾아왔다.

“대, 대장.”

숲 근처에서 야영하며 동향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일원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귀가했다. 그러고는 마을 사람들이 들을지도 모르는데 섣부른 말을 입에 담았다.

대장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그제야 잘못을 깨닫고 조용히 그에게 다가왔다.

“실수는 한 번으로 끝마쳐라.”

“죄송합니다, 대장.”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숲이 안쪽에서부터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치 무언가가 밖으로 나오려는 것 같습니다.”

대장은 들고 있던 쟁기를 내팽개쳤다. 그리고 곧장 다른 일원들을 불러 모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이상한 움직임을 보며 경계심을 드러냈으나 이제 그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제때 환영 인사를 하려면 서둘러야겠군.”

비수 한 자루를 각자 가슴 속에 숨기고, 그들은 미련 없이 마을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 * *

“숲을 빠져나가려면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요?”

자이안이 물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일행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잠시 마차를 늦춘 자이안이 곁에 선 나무에 손을 대자, 나무가 파스스 흔들리더니 나뭇잎 하나를 떨어뜨렸다.

“일주일?”

지금까지도 제법 오래 이동했는데 아직도 그만큼이나 많이 남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나뭇가지 두 개가 가위표로 교차되었다.

“하루?”

가위표는 묵묵부답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자이안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고, 창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유리아가 대신 물었다.

“한나절?”

나무가 소리를 내며 몸을 떨더니 가지 여러 개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자이안이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세계수의 숲도 이제 끄트머리였다.

“이 속도로 한나절이라는 뜻이니, 속도를 더 내면 해가 지기 전에도 빠져나갈 수 있겠군요.”

“그거 다행이다! 그런데 우리 밥은 언제 먹어?”

“케이 님. 인간은 일반적으로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하루 세끼만 식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곧 점심 먹을 시간 아냐?”

소아레스는 말없이 미리 준비해놨던 육포를 꺼냈다. 각종 향신료를 정확한 비율로 배합해, 케이의 입맛을 충족할 수 있도록 만든 특제 보존식이었다. 눈을 빛낸 케이가 육포를 받아 질겅질겅 깨물기 시작했다.

소아레스의 요리를 처음 맛본 뒤로 틈만 나면 먹을 것을 조르곤 하지만, 사실 케이는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가 바라는 건 맛있는 요리로 미각을 자극하는 것.

때문에 굳이 많은 양을 준비하지 않아도, 그가 바라는 맛을 정확히 파악해 준비하면 바로 얌전해졌다.

“선주 인류는 영양 비율이 완벽한 대신 맛없는 건강식만 먹었어. 탐욕도 폭식도 거세돼버려서, 맛있는 요리를 먹겠다는 욕심을 전혀 안 내더라고.”

지나가듯 한 케이의 말에 자이안은 복잡한 기분이었다. 선주 인류의 사회는 분명 범죄도 분쟁도 없는 이상적인 사회였겠지만, 자이안은 케이의 옛날얘기를 들으며 생물이 그렇게 살아가는 게 과연 맞는 일인지 고민해보곤 했다.

잠시 멈춰 일행 모두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한 뒤, 예정대로 마차가 속도를 높였다. 숲도 그에 발맞춰 빠르게 길을 열어주었다. 소아레스의 예상대로 마차는 해가 지기도 전에 숲의 끝자락에 다다를 수 있었다.

“헤매지 않도록 길을 안내해줘서 고마워요, 다들.”

자이안이 주변을 빙 둘러선 나무들에게 한 차례 감사 인사를 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나무들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마치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는 듯했다. 자이안은 미소를 머금으며 숲을 빠져나왔다.

“자이안 알코스 님이십니까?”

그 눈앞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이들이 나타났다.

아홉 명으로 이뤄진 집단. 장식 없는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남은 여덟 명은 거리를 두고 떨어진 채 반원형을 그리며 서 있었고, 우두머리인 듯 보이는 한 명만이 마차 앞에 나섰다.

시선이 닿은 순간 자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농민처럼 보이지만, 옷 아래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근육은 농민의 그것이 아니다.

“당신들은 누구죠?”

“알레프 백작가에서 보냈습니다.”

자이안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백작가에서? 저를?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백작가의 정보수집능력은 자이안 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보다 뛰어납니다. 자이안 님께서 일리움을 벗어난 뒤, 이름을 바꾸고 공화국을 거쳐 제국, 보석탑과 법왕국, 마지막으로 세계수를 향해 떠나셨다는 사실 역시 모두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

뭐라 대답하는 대신, 자이안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그러다가 대뜸 한 가지 대답이 나왔다.

그것은 수학 문제를 풀 때, 그동안 배운 지식들이 한순간 복잡하게 얽히며 풀이 과정을 거의 생략하고 암산에 가깝게 답을 도출해내는 현상과 비슷했다.

“그렇군요. 미오네가 당신들을 보냈어요.”

“…….”

이번에는 상대가 침묵했다.

“아버지가 진실을 아셨을 리는 없어요. 미오네의 수완이라면 진실이 그분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수단을 가리지 않고 통제했겠죠.”

치가 떨릴 만큼 시달렸지만, 덕분에 자이안은 다른 건 몰라도 미오네의 정치적 수완만은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만약 그게 실패해서 아버지가 진실을 알게 됐다면, 더 이상하죠. 미오네와 왕가가 무서워서, 그래도 자식이 차마 죽게 놔둘 수는 없어서 제 손으로 쫓아내신 분이 이제 와서 부하 몇 명만 보내서 제게 연락을 한다? 그러다가 미오네에게 덜미를 붙잡히려면 어쩌려고?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행동을 벌일 성격이 못돼요. 무엇보다도…….”

자이안의 시선이 남자의 가슴팍에 향했다. 정확히는, 옷 안쪽에 숨겨진 채 기회를 엿보고 있는 비수에게로.

“알레프 백작가는 암살자를 키우지 않아요.”

“……대단한 통찰력이시군요.”

남자가 한숨 섞인 말을 꺼냈다. 감탄 같기도 했고, 체념 같기도 했다. 자이안은 날카로운 눈빛을 그에게 향하며 재차 물었다.

“무슨 일로 절 찾아온 거죠?”

“미오네 부인께서는 자이안 님이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왜요?”

곧바로 이어진 질문에 남자의 말문이 막혔다. 미오네의 충실한 수족인 그는 미오네가 자이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당연히 모두 알고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추측할 수 있었다.

“자이안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전 잘 모르겠으니까, 미오네의 부하인 당신이 자기 입으로 한 번 직접 말해보세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를 노려보던 자이안은 문득 지그시 눈을 감고는 긴 한숨을 뱉었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시커먼 감정들을 한숨에 담아 모두 쏟아내려는 듯.

“저희는 지금부터 복마전으로 향할 겁니다.”

자이안이 한결 침착해진 투로 말했다.

“가다 보면 알레프 영지에도 들르게 되겠죠. 거기서 저택을 찾아갈지, 아니면 그냥 무시할지는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어쩌면 갑자기 변덕이 생겨서 미오네가 바라는 대로 조용히 지나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걸 결정하는 건 저 자신이지, 당신들이나 미오네가 아닙니다.”

완곡하지만 타협의 여지가 없는 거절의 표현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품속에 손을 집어넣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자이안 님. 당신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알레프 영지로 향하지 못하실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모두 죽을 거니까?”

자이안이 가벼운 말투로 남자가 하려는 말을 가로챘다. 뜻밖에도 태연한 반응에 남자는 움직임을 멈추며 흠칫 놀랐다.
그 순간, 마차 문이 열리고 소아레스와 유리아가 뛰쳐나갔다.

“혹시 모르니까 죽이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

유리아의 대답과 동시에 세 번의 타격음이 연달아 울렸다. 마차를 포위하듯 반원을 그리고 있던 남자들 중 세 명이 흰자위를 드러내며 힘없이 쓰러졌다.

소아레스는 그저 묵묵하게 자이안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세계수의 숲에 자생하는 풍부한 약초와 독초를 배합해 만든 강력한 마비 독.

이를 바늘 끝에 바른 뒤 짧고 간결한 움직임으로 남자들을 찔러 쓰러뜨렸다. 8명이 모두 쓰러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숨 한 번 들이쉬는 것보다도 빨랐다.

“이상하네요. 그 여자가 이렇게 허술하게 암살을 계획할 리가 없는데.”

마부석에서 내려온 자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살자들이 모두 쓰러진 바로 직전의 사태는 아예 보지도 못했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미오네가 당신들을 버림패로 쓰려고 한 것 같은데요? 아니면 혹시, 암살 지시는 받은 적도 없는데 독단적으로 행동한 건가요? 그런 여자에게 충성을 바쳐봤자 하나도 보답 받지 못할 텐데. 안타까워라.”

자이안이 남자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남자는 재빨리 비수를 꺼냈으나, 한 번 휘둘러보기도 전에 어느새 양옆에 다가온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붙잡힌 두 팔은 쇠사슬에 묶이기라도 한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설픈 동정으로 후환을 남기지 마라.」

잠자코 있던 프레이가 말했다.

「무분별한 살인은 지양해야겠지만, 이번에는 형 말이 옳아요. 과잉 충성으로 지시받지도 않은 암살을 벌이는 이들이에요. 여기서 풀어주면 반성은커녕 똑같은 짓을 반복할 겁니다.」

둘의 말에 자이안은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력화된 적을 죽여야 한다는 게 꺼려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판단을 그르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일단 뜯어낼 수 있는 정보는 모두 뜯어내고…….”

그 순간, 남자가 힘겹게 팔을 움직여 비수의 칼자루 뒷부분을 자이안에게 향하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코등이를 꾹 눌렀다.

칼자루 안쪽에 숨겨진, 맹독이 발린 바늘이 화살처럼 자이안에게 날아갔다.

“…….”

입을 다문 자이안이 무표정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목덜미에 꽂힌 바늘은, 그러나 강철처럼 단단한 피부를 조금도 뚫지 못하고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악질적인 악몽을 꾸는 듯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린 나머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임무는 모두 실패했다. 그들은 어떤 결과도 남기지 못하고, 주인의 바람을 이루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 것이다.

「고문이라도 안 하면 뭘 뱉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근데 우리 중에 고문 기술자는 없는데에?」

「이대로 생포해 봐야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는 소리죠.」

이런 일에 스펙트럼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자이안은 주먹을 틀어쥐고 남자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후려쳤다.

남자의 의식이 심해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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