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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2) (127/210)


128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2)
2023.02.08.


대치는 길지 않았다. 자이안이 어떤 태도로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짧은 사이, 검문소장을 맡은 기사는 거의 몸을 날리듯 책상 앞으로 튀어나와 맨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사, 사사, 살려주십시오!”

“절 기억하고 있나요?”

“무무, 무, 물론입니다, 자이안 님……!”

검문소장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악몽이 되살아난 기분이었다.

그는 스스로가 상당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1년 전, 정전 협상 자리에서 틴디아 추기경이 음모를 꾸몄을 때. 자이안이 추기경을 간단히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현실을 깨달았다.

법왕국은 지금까지처럼 부패한 채로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 할 큰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틴디아 추기경의 파벌이기는 했으나, 적극적으로 비리에 동참하지는 않았다. 파벌 내의 다른 기사들에 비하면 손에 꼽을 정도로 청렴한 편이었다.

그 자신은 그것이 스스로가 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죄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비리에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것도 아니고, 명령이라고는 해도 추기경의 역모에 손을 보탰다.

결과적으로 목숨은 부지했으나, 직위를 강등당하고 중앙과는 멀리 떨어진 국경에서 평생 검문소장으로 일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정해진 지역을 벗어나는 것도 금지되었다. 유배에 가까운 좌천이었다.

봉급이 적어지고 생활도 전보다 어려워졌다. 그가 허튼짓을 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홀가분했다.

‘법왕국’이었던 시절에는 비리에 가담하지 않으면 동료들로부터 배척받았다. ‘성국’이 된 지금은 그냥 자기 맡은 일만 성실하게 해내면 되었다.

가끔, 아직도 예전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비리에 손을 대려는 관료나 부하 기사들을 적발하기도 했다. 성도로부터 소소하게 포상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조용히 거절했다.

죗값을 치르고 있으면서 포상을 받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검문소 생활도 적응했다. 나름대로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뇌리에 눌어붙은 듯 지워지지 않는 광경이 있었다. 자이안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때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 번 각인된 공포는 무슨 수를 써도 떨쳐낼 수 없었다. 죄를 뉘우치며 진심으로 속죄해도, 비리를 적발하며 죗값을 갚아도, 언젠가 자이안이 다시 찾아와 미처 거두지 않은 목숨을 다시 거둬가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기어코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무서워하지?’

반면 자이안은 저승에서 찾아온 사신이라도 만난 듯한 그 반응에 미묘한 기분일 따름이었다.

앞서 말했듯 자이안은 성국에 대한 악감정이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때문에 검문소장의 정체를 알게 된 뒤에도 딱히 그를 징벌해야 한다거나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처형 당일까지 남아있는 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 애쓴 법왕을 도우며, 자이안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검문소장이 살아남았다는 건, 그가 저지른 죄가 목숨으로 갚아야 할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거 써먹을 수 있겠는데.」

그러나 프레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민이 그가 허튼 소릴 하기 전에 얼른 끼어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는데, 분명 자이안이 싫어할걸요?」

「아직 말도 안 꺼냈다, 인마. 뭐 나쁜 짓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놈을 잘 설득하면 자이안이 바라는 대로 괜한 소란을 키우지 않고 조용히 지나갈 수 있지 않겠냐?」

「오.」

크룩스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역시 프레이는 이런 쪽으로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갔다.

「어려운 걸 부탁하는 것도 아니지. 애초에 우리가 수상한 물건을 가지고 들어가려다가 걸리기를 했냐? 검문소에서 난동을 부리기를 했냐? 저쪽에서 먼저 자이안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으면 아무 문제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었을걸?」

‘듣고 보니 확실히…….’

의외로 논리정연한 말에 자이안도 조금씩 설득되기 시작했다.

「일단 한 번 살살 구슬려보자고. 우린 조용히 지나가고 싶을 뿐이다, 위쪽에 자이안이 나타났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평범한 여행자라고 생각하고 들여보내 달라.」

‘한 번 해보겠습니다.’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인 자이안이 검문소장에게 다가갔다. 발소리가 들리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든 그는 시선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다시 이마를 땅에 박았다.

“일어나 보세요. 잠깐 얘기를 좀 하죠.”

“무, 무슨 얘기를……?”

주춤거리며 일어난 그가 두려움에 떨리는 눈으로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자이안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검문소장에게는 그 웃음이 독 안에 든 사냥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의 만족스러운 웃음으로만 보였다.

* * *

「다행이구만.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놈이었어.」

기사들로부터 돌려받은 마차에 올라타는 자이안에게 프레이가 만족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러나 프레이의 말에는 사실 어폐가 좀 있었다. 검문소장은 자이안이 무슨 말을 해도 미친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일 뿐이었으니까.

“왜 그렇게 절 무서워했을까요?”

「뭐? 진짜 몰라서 묻냐?」

자이안의 순순한 의문에 프레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이안 본인은 짚이는 점이 없었다. 프레이는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모르면 됐다. 네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프레이는 끝까지 자이안의 물음에는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근데 그 남자가 뒤통수라도 치면 어떡해요?」

유민의 의문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프레이와 크룩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놈이 어느 날 갑자기 홰까닥 돌아서 거창한 자살 쇼를 벌이고 싶어지면 그럴 수도 있겠지.」

「형 말이 맞아요. 그리고 사실, 그 남자가 자이안의 입국을 성도에 알린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애초에 성국을 찾아온 가장 큰 목적은 두 성녀와 만나는 것이고, 이렇게 정체를 숨기고 성국의 변화를 살펴보는 과정은 곁다리였다. 정체가 알려져서 불편해질 것 같으면 그대로 성도로 직행하면 그만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놈에게도 좋은 일이지. 언제든지 자이안이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죽을 때까지 나쁜 일은 꿈도 못 꾸게 될 테니.」

사실 검문소장은 굳이 자이안과 재회하지 않더라도 그럴 마음이 없는 상태였지만, 일행들에게는 어찌 되든 좋은 일이었다.

“그나저나…… 확실히 사람이 많네요.”

객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자이안이 새삼 중얼거렸다. 물론 1년 전 성국을 찾았을 때는 전쟁이 끝난 직후였으니 그때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숲을 정비해 만든 가도는 굉장히 붐볐다.

하나 의외인 것은 순례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 그 대신 인파의 절반은 각종 상품을 짊어진 행상인, 나머지 절반은 아무리 봐도 용병처럼 보이는 무장 집단이었다.

「이놈들, 설마 또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에이, 설마요. 전쟁을 벌였다가 저희들한테 얻어맞은 게 고작 1년 전인데.」

「전쟁이 아니면서 무력이 필요한 일이라면…… 마물 출몰이 아닐까요?」

크룩스의 추측은 그럴듯했다. 본래 성국은 성유물의 힘이 약해지며 마물이 출몰하는 빈도가 늘어나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전쟁을 거치며 국방력이 크게 약해지기도 했으니, 그때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고 싶어요.”

「조만간 역참 마을이 보일 테니, 거기서 쉬면서 무슨 일인지 좀 알아보자고. 정말로 마물이 나타나는 거라면…… 쯧. 어쩔 수 없지.」

프레이는 혀를 차면서도 얌전히 자이안에게 찬성했다. 내키지 않는 듯 보이는 그 태도가 본심에서 비롯된 게 아님을 이제는 자이안도 잘 알고 있었다. 자이안은 대답 대신 고마움을 담아 작게 미소만 지었다.

“형씨들. 혹시 상인이쇼?”

인파에 섞여 가도를 나아가기를 얼마간, 말을 타고 다가온 남자가 대뜸 마차 문을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마부석에 앉은 소아레스가 슬쩍 시선만 돌리며 대답했다.

“단순한 여행자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 미안, 미안. 너무 경계하지 마쇼, 아가씨. 그냥 신기해서 말 좀 걸어본 거요. 솔직히 이런 고급스러운 마차를 몰고 다니면서 눈에 안 띄기를 바라는 건 과한 욕심 아니오?”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소아레스는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에, 남자는 어깨를 움츠리며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혹시 호위가 필요하지 않소? 보아하니 꽤나 비싼 짐들을 실어놨을 것 같은데. 병사 한 명 안 붙이고 이런 길바닥을 돌아다니는 건 너무 무방비…….”

“호의에는 감사드립니다만.”

소아레스가 단검을 꺼내 가볍게 한차례 허공을 그었다. 정작 남자는 그녀가 언제 단검을 꺼내 어떤 각도로 휘둘렀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호위가 필요치 않으니 이렇게 다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침을 꿀꺽 삼킨 남자가 뻣뻣한 목을 움직여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내가 잠자는 사자의 수염을 건드릴 뻔했구만. 무례하게 굴어서 미안하오.”

솔직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 남자가 다시 말을 몰고 멀어졌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자초지종을 지켜본 자이안이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러나 나쁜 사람은 아닐지언정 필요한 사람이 아닌 것 역시 분명했다.

「옛날에 비하면 치안이 좀 안 좋아지긴 한 모양이구만.」

「정치체제가 한 번 뒤집혔으니 한창 어수선할 때죠. 인력도 부족할 테고. 그래도 길바닥에서 칼부림이 나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하! 실력도 없는 길바닥 삼류 용병 나부랭이가 아가리만은 일류인 모양이네!”

“니미럴 호로잡놈의 새끼가! 그렇게 뒈지고 싶거든 내가 오늘을 직접 네년 제삿날로 만들어주마!”

크룩스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가도 한구석에서 거친 말다툼이 들려왔다. 한쪽은 남성, 한쪽은 여성이었다.

근처의 인파가 식겁하며 거리를 벌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공터에서 둘이 곧 칼부림을 벌이기 시작했다. 의외로 승기를 붙잡은 것은 여성 쪽이었다.

채찍을 전투용 무기로 쓰는 것도 신기한데, 간혹 채찍 끝이 빛나며 공중에서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기도 했다. 평범한 무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1년 사이에 대체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프레이의 말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소란을 피하며 나아간 끝에 마침내 역참 마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아레스가 속도를 올렸고, 행인들이 기겁하며 좌우로 갈라졌다. 다행스럽게도 불미스러운 일에는 엮이지 않고 무사히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뭔…….」

마을의 전경을 확인한 프레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일행들도 비슷한 심정이긴 마찬가지였다.

정치체제가 뒤집혔다고는 해도, 여전히 ‘성국’이라 불리는 종교 국가다. 마을마다 교회가 서 있는 게 당연하고, 그게 그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이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역참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은 교회가 아니었다.

커다란 보석을 뒤에 두고 칼과 채찍이 교차하는 그림이 그려진 독특한 간판. 그 아래, 넓은 현관문에 용병이라고 생각했던 무장 집단이 바쁘게 드나들고 있었다.

자이안은 위화감을 가득 담아 간판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보물 사냥꾼 협동조합……?”

전혀 연이 없을 줄 알았던 그 단어가 당당히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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