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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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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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성국, 그리고 성녀 퀴나스(1)
2023.02.07.
법왕국 솔레리온. 동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독특한 지형에 자리 잡은 나라다.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는 지형의 도움으로 그들은 외적의 걱정 없이 마음껏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태양신교를 중심으로 발달한 문화를 누리던 그들이 산맥 바깥, 야만인들의 존재를 궁금해 하고 그들에게 구도의 손길을 뻗고자 결심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이것이 과거, 대륙 전역에 태양신교가 퍼지게 된 계기다.
「시계열대로 정리하면, 법왕국이 건국된 까마득한 옛날이겠는데?」
“제국이 아직 나라라는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단순한 야만인 부족 연합일 때부터, 법왕국은 이미 번듯한 나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해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화국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각성자들은 뒤늦게 자이안을 비롯한 일행에게 법왕국의 기원과 흥망성사의 역사를 듣고 있었다.
본래는 보석탑과 법왕국의 전쟁에 개입할 때 알아둬야 할 일이었겠지만, 그때는 전쟁을 막기 위해 애쓰느라 느긋하게 역사를 되짚어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전쟁도 끝나고 원흉도 모두 뿌리 뽑았고, 법왕국의 수뇌부가 지인이기도 하니 어느 정도는 알아둬야 편할 것 같았다.
「흠. 듣다 보니까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떠오르는데요. 한 번 들어보실래요?」
「뭔데? 혹시 법왕국의 건국에 하이엘프가 개입했을지도 모른다, 뭐 그런 소리 말이냐?」
대수롭지 프레이의 않은 말에 크룩스의 표정에 실망감이 어렸다. 그걸 미리 다 말해버리면 어쩌냐는 것이다.
「아니, 형. 이럴 때 잠깐만 눈치 좀 챙기면 어디 덧납니까?」
「난 눈치 못 챙기는 게 아니라 일부러 안 챙기는 건데?」
「아저씨, 그게 더 나쁘거든요?」
사실 프레이의 말은 자이안도 추측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도 신스와 나태에게 하이엘프의 비사를 들은 한참 예전부터.
“경전의 구절을 생각해보면 가능성은 높겠죠.”
암흑천지의 지상에 한 쌍의 남녀가 불과 태양을 이끌고 내려왔다는 내용. ‘암흑천지의 지상’을 마나에 오염되어 마물이 들끓는 땅으로, ‘한 쌍의 남녀’를 이를 정화하기 위해 희생한 하이엘프로 대입하면 딱 맞았다.
「성유물의 기원도 좀 궁금해지는거얼.」
「그건 별 비밀 없을 것 같다만. 그냥 선주 인류가 급히 도망가느라 흘리고 간 아티팩트 중 하나였겠지.」
사실 대륙 곳곳에는 아직도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오지 등에서 가끔씩 정체불명의 유물이 발굴되고는 했다.
거의 대부분 쓸모를 알 수 없는 골동품에 불과하지만, 이를 비싼 값에 모으는 호사가도 물론 존재했다.
오죽하면 평생 오지를 전전하며 유물을 찾아내 일확천금을 꿈꾸는, 스스로를 ‘보물 사냥꾼(treasure hunter)’라 자칭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트레져 헌터?! 하, 좋구만. 아주 좋아. 로망이 살아있어. 이게 판타지지.」
「프레이도 차암. 그 나이 먹고 아직도 그런 걸 좋아하니까 중2병 소리를 듣는 거라구.」
「나보고 그런 막돼먹은 소릴 하는 건 아르스 너밖에 없어, 인마. 남자란 건 말이다, 모험심과 함께 태어나 모험심과 함께 죽는 생물이다. 이런 소릴 듣고도 아무것도 못 느끼는 건 남자로서 죽은 거라고.」
「하하. 그럼 전 남자 포기하겠습니다.」
기대를 부풀리는 그 모습에 자이안은 뭐라 말하지 못하고 쓴웃음만 삼켰다. 프레이에게는 안타깝게도, 앞으로의 여정은 보물 사냥꾼과는 전혀 연이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줄이 제법 기네요.”
삼면이 산맥에 막힌 지형의 특성상, 법왕국에 출입하는 관문은 오직 동쪽에만 존재했다.
평소에는 순례자나 행상인이 가끔씩 출입할 뿐인 한산한 관문.
그러나 어쩐 일인지 지금은 줄을 서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 만큼 많았다. 검문 역시 이전과 달리 상당히 엄격하게 이뤄지는 듯했다. 그 모습은 흡사 총선 중인 공화국을 연상케 했다.
「전쟁이 끝난 지 겨우 1년이 좀 넘었을 뿐이니까요. 혹시 모를 불온분자를 거르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특히나 성녀…… 이젠 전대 성녀지. 아무튼 그 여자는 이런 일 대충대충 하는 성격도 아니니까 말이다.」
둘의 설명에 납득하며 더 기다린 끝에 간신히 일행의 차례가 왔다. 오전 일찍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어느새 정오를 조금 지나 해가 머리 꼭대기에 서 있었다.
검문을 위해 다가온 기사 두 명이 마차의 모습을 보며 흠칫 놀랐다. 일행의 마차는 휘황찬란하지는 않았으나, 식견이 있는 사람은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러운 장식이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잠시 입국을 위한 검문이 있겠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들이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을 꺼냈다. 마부석에 앉은 소아레스는 그 모습에 작게 감탄했다. 상대의 정체를 은연중에 짐작하고도 책임을 완수하려는 모습. 얌전히 일을 맡겨도 될 듯했다.
“반갑습니다. 숙녀분. 일행분을 포함한 성함과 입국 목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소아레스 란키리오. 마차 안에 타고 계신 두 분은 유리아 알즈레드 님, 자이안 알코스 님입니다. 방문 목적은…… 그래요. 순례입니다.”
“순례, 말씀이십니까?”
소아레스의 말에 기사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했다. 그 반응에 소아레스도 조금 의아해졌다. 가장 무난하고 자연스러운 대답이지 않은가?
“크흠. 결례를 범했습니다. 최근에는 순례를 목적으로 입국하시는 분들을 보기가 워낙 어려워져서요.”
“법왕국에 순례를 위해 찾아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법왕국? 아하. 아직 모르시는군요.”
그제야 기사는 이해가 됐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국호가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솔레리오 법왕국이 아니라, 솔레리오 성국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성국? 굳이 이름을 바꿀 이유가…… 아아.”
소아레스도 납득했다. 마지막 법왕이 화형되고 성녀를 중심으로 정치 체계가 격변했는데 법왕국이라고 부르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혹시…… 제국의 귀족분이십니까?”
가까이 다가온 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차의 장식을 보고 그게 제국의 것임을 알아차린 듯했다. 기사가 높은 식견을 가졌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소아레스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이안은 여행 중 그런 식으로 대접받는 걸 원하지 않았다.
“단순한 여행자입니다.”
“……여행자.”
황망히 중얼거리는 기사는, 당연히 전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상대가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자의로 신분을 숨기고 있다면, 괜히 거기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마차에서 위험한 물건이라도 발견되면 모를까.
“허어억!”
그리 생각하며 스스로를 설득하려던 기사에게, 갑자기 겁에 질린 비명 소리가 들렸다.
짐칸 검사를 마치고 객석 문을 연 다른 기사가 낸 소리였다. 소아레스를 상대하던 기사는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붙잡았다. 그러나 정작 소아레스는 의아할 뿐이었다.
객석에 앉은 자이안과 유리아, 케이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뭔가 수상한 것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른 게 아니다. 자이안의 얼굴을 보자 아무 맥락도 없이 기겁한 것이다.
「잠깐, 이놈 설마?」
프레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추측을 말했다.
「전쟁에 참전했던 기사 중 한 명인 거 아니냐? 참전자라면 자이안 네 얼굴을 기억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않냐.」
“아.”
그제야 자이안도 자신이 경솔한 행동을 했음을 알아차렸다.
괜한 소란을 피우며 존재를 알릴 생각은 없었다. 평범한 여행자인 척 입국해 법왕국, 아니 성국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본 뒤, 마지막에 성도로 향할 예정이었는데…….
“자, 자이안 알코스……!”
소아레스를 상대하다가 급히 다가온 기사도 자이안의 얼굴을 알아봤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
“기사님들, 일단 좀 진정하세요. 뒤에 좀 봐요. 사람들이 저희 검문 언제 끝나나 기다리고 있잖아요?”
유리아가 급히 나서서 기사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기사를 손수 일으켜주었다. 자이안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으나 유리아는 알지도 못하고 있는 그 기사는 간신히 떨림을 멈추며 일어났다.
“……위험 물품은?”
“네, 네?”
“위험 물품은 발견된 게 있냐고 물었다.”
“아, 그, 그게, 어, 없습니다. 입국 가능하십니다.”
소아레스를 상대한 기사가 사수, 마차를 검사한 기사가 부사수인 모양이다. 둘 사이에서 빠르게 대화가 오고 간 뒤, 사수는 한숨을 삼키며 일행에게 말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 *
두 기사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웠다. 자이안의 힘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이안은 우선 얌전히 따르기로 했고, 다른 일행도 그 의사에 동의했다. 곧 관문 너머에서 기사 두 명이 긴급히 임무를 교체하기 위해 찾아왔다. 자이안 일행은 마차에서 내려와 처음의 두 기사의 안내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두 분 모두, 작년에 일어난 전쟁에 참전했던 건가요?”
불법 밀입국자를 막기 위해 성벽을 높게 세운 관문을 지나, 기사들이 머무는 병영으로 향하며 자이안이 물었다. 앞서 걷던 두 기사는 잠시 흠칫했으나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법왕국…… 아, 성국이라고 했죠. 미안해요. 아직 적응이 안 되네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았어요. 성국은 요즘 어떤가요?”
다소 두루뭉술한 질문에 두 기사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자이안도 그 사실을 깨닫고 말을 덧붙였다.
“저희가 성국을 떠난 건 법왕 성하께서 처형된 직후였거든요. 당시 성국의 상황이 상당히 어수선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좀 괜찮아졌나요?”
“그런 일이라면…… 예. 지금은 상당히 안정된 편입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진실을 얼버무리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자이안은 안심하며 웃었고, 그 모습에 기사는 묘한 기분으로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성국엔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여러분들의 일은 모두 마무리된 것 아니었습니까?”
아까 소아레스가 순례라고 답하긴 했으나 지금은 두 기사 모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일행들은 잠시 서로를 돌아보고, 이내 자이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정체도 드러났는데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성녀님을 만나러 왔어요. 헤어질 때,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거든요.”
두 기사는 곤혹스런 얼굴로 침묵했다. 자이안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들 선에서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얘기였다.
자이안은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였으나, 두 기사에게 그 모습은 사냥감을 포식하고 잠시 얌전해진 맹수로 보일 뿐이었다. 이런 일에 섣불리 발을 담가 책임을 떠맡고 싶지 않았다.
“국경 검문소장님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그때까지만 안내에 따라주십시오.”
좋은 방법이 하나 있었다. 더 큰 책임을 질 수 있는 직위의 사람에게 떠맡기는 것이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죠. 하지만 만약 그 검문소장이란 사람이 부당한 행동을 강요한다면…… 알죠?”
“무, 물론입니다.”
“하하. 농담이에요.”
바짝 굳어 대답하는 기사에게 자이안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성국에 악감정을 품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원흉이 빠짐없이 처벌되고 마지막으로 법왕이 자살이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화형됨에 따라 그 감정은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자이안에게, 미처 다 잘라내지 못한 지저분한 끄트머리가 모습을 보였다.
“다, 다다, 당신은……!”
쿠당탕! 의자가 요란하게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든 검문소장은 자이안의 얼굴을 본 순간 비명처럼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 얼굴을 보며 자이안도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관문에서 만난 두 기사와 달리,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이놈. 기억난다.」
프레이가 말했고, 자이안도 거의 동시에 묻혀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신, 분명 틴디아 추기경을 따랐던 신성 기사였죠?”
전쟁을 끝내기 직전. 마지막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해, 법왕과 성녀를 감금하고 멋대로 협상을 주도하려 한 틴디아 추기경. 결국 자이안마저 그 어리석음을 참지 못해 직접 두 팔을 자르며 본보기를 보여야 했던 바로 그 남자.
그 끄나풀이 아직 멀쩡히 살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