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페시스 카펜트리
(125/210)
126화 페시스 카펜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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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페시스 카펜트리
2023.02.06.
암살자 9명을 모두 죽이고, 흔적조차 남지 않게 마법으로 완전히 불태웠다. 마차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미오네가 얘들 죽은 걸 알아차리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냐?」
“따로 사람을 보내 알아보지 않는 한은 적어도 반년 가까이 걸릴 겁니다.”
대륙 서쪽 끝과 동북쪽 끝은 그 정도로 멀리 떨어진 거리였다. 미오네가 소식이 끊긴 부하들의 행방을 수상히 여겨 제대로 조사를 시작하는 건 한참 나중이 될 것이다.
「다행이네요. 좀 느긋하게 가도 되겠어요.」
「생각해 보면 바보 같은 걱정이긴 하군. 그 여자가 이제 와서 자이안한테 뭘 어쩌겠어?」
자이안 역시 암살자들을 상대하며 확신했다. 미오네의 힘은 이제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한다. 그녀가 무슨 음험한 짓을 꾸미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얘네들 근데 되게 신기하다. 보통 눈앞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누가 죽고 그러면 엄청 놀랄 텐데. 말은 원래 엄청나게 겁이 많은 동물이잖아.”
자이안과 교대해 마부석에 앉은 유리아는 마차를 이끄는 말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느긋하게 뜨개질을 하던 소아레스가 흘리듯 중얼거린 그 말을 예민하게 알아듣고 말했다.
“그 아이들은 모두 군마입니다. 폐하께서 심혈을 기울여 황실에서도 손꼽히는 명마들을 골랐지요.”
“군마였어?!”
새로이 밝혀진 사실에 자이안과 유리아가 깜짝 놀랐다. 대를 걸쳐가며 품종을 개량하고 오랜 시간 훈련을 거듭해 비로소 완성되는 군마는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아주 값비싼 재산이다.
황실에서도 손꼽히는 명마라는 표현을 생각하면, 이 말들의 가치가 얼마나 될지 쉽게 환산되지도 않았다.
“아니, 소아레스……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요.”
“묻지 않으시기에 알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만.”
태연하게 대꾸하는 소아레스의 말에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소의 장난기는 느껴졌지만. 결국 자이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와 다시 만나면 그때 제대로 감사인사를 드려야겠네요.”
마차는 이대로 남서쪽, 법왕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며 하나둘 쌓아 올린,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약속들을 하나씩 지켜나가기 위해서였다.
일행들이 세계수의 숲에 머물며 바깥과 단절된 동안 대륙 정세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보석탑은 들르지 않아도 될까?”
“아는 사람도 없는걸요. 마법사들이 남아있지도 않을 거고.”
“페시스 씨가 있잖아.”
“아.”
따로 약속을 한 건 아니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한때 보석탑이 자행한 인체실험의 피해자였던 페시스 카펜트리.
그와 인연을 쌓으며, 특히 보석탑을 완전히 와해시키는 데 크게 도움을 받았다. 그가 없었더라면 증오에 사로잡힌 피해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죄가 없거나 오히려 피해자에 가까운 소수의 마법사들까지 억울하게 죽었을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꺾을까?”
“일단 다음 마을에서 쉬면서 생각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네요. 푹 쉬면서 일정을 확실히 정해보죠.”
그러나 휴식을 위해 들른 마을에서, 뜻밖의 인연이 제 발로 찾아왔다.
“자이안 님! 유리아 님과 소아레스 님까지! 모두 오랜만에 뵙습니다.”
숙소를 찾고 있는 그들에게 페시스 카펜트리가 찾아왔다. 우연일 것 같지는 않았다. 만면에 환하게 웃음을 띠고 있는 그는 반가워하기는 했으나 놀라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저희가 올 거라고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요?”
“보석탑이 와해된 지금, 대결계 내의 마을들을 카펜트리 상회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관리라고는 해도 왕처럼 통치하는 게 아니라, 물류 유통을 관리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정도입니다만. 정보의 순환이 빠르다보니, 여러분께서 숲을 나와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지요.”
그는 일행을 환대하며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 카펜트리 상회 지점으로 안내했다. 상회 직원들이 말과 마차를 정중히 관리했고, 일행들은 홀가분하게 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귀빈실은 남아돌고 있으니 원하는 대로 쓰셔도 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각 지점에 마련된 귀빈실은 모두 여러분들을 위한 겁니다. 언제가 됐건 여러분께서 다시 돌아오리라 확신했고, 그때 여러분들께서 어느 마을에 가더라도 푹 쉴 수 있도록 최고의 숙소를 제공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 말하는 페시스는 기쁨을 참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뒤를 따르며 그를 바라보는 유리아는 점점 치밀어 오르는 호기심을 결국 억누르지 못했다.
“페시스 씨. 그, 등에…… 그거 있잖아요?”
“예? 아, 이것 말입니까?”
페시스가 등허리에 붙은 ‘그것’을 움직였다. 마치 손발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것은, 그러나 사람의 몸에 결코 붙어있어서는 안 되는 이형의 조직이었다.
갑각질로 덮인, 세 개의 마디로 나뉜 가느다란 곤충의 다리 한 쌍. 그것은 그가 한때 마법사들에게 끔찍한 짓을 당했다는 확고한 증거였다.
“그거 이제 필요 없지 않아요? 유민 언니, 저거 본인이 떼고 싶으면 얼마든지 뗄 수 있는 거 아니었어?”
「그, 그렇지? 이상하다? 내가 그때 백마법을 잘못 썼나? 그럴 리가 없는데?」
“하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제가 원해서 붙이고 있는 거니까요.”
페시스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보기에 별로 눈에 띄지도 않고, 주변 분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간혹 무서워하는 분들이 계시기도 하지만, 이렇게 허리춤에 감아 놓으면 벨트처럼 보여서 거의 티가 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새까만 두 다리가 날렵하게 움직였다. 높은 선반 위에 얹힌 비싼 찻잔을 붙잡아 눈앞까지 가져왔다가, 다시 같은 자리에 재빨리 올려놓았다.
“팔이 두 개 더 달린 셈이라 일할 때 아주 편해요.”
그 움직임은 오랫동안 곤충 다리를 사용해온 듯 능숙했다.
“처음에는 이대로 뽑아내서 흔적도 없이 불태워버릴까, 하는 안 좋은 생각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원망을 쏟을 상대도 없는데,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페시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자이안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에 찬 미소를 지었다.
* * *
각자 귀빈실을 잡고 휴식을 취하며 일정을 검토한 뒤, 페시스의 제안으로 각성자들까지 모두 모여 만찬을 가졌다. 소아레스도 이번에는 얌전히 손님으로서 자리에 앉았다.
“구원자들을 기리며. 건배.”
페시스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선창했다. 낯간지러운 호칭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옆자리에 앉은 프레이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뭘 부끄러워하고 있냐? 네가 그동안 열심히 굴러다니며 고생한 보람이 바로 이런 거야. 넌 지금 미뤄둔 보상을 받고 있는 거다. 가슴 펴고 떳떳해져.”
자이안은 수줍게 웃으면서도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 님께서 사람이 아니라 용이셨다고요? 맙소사. 이렇게 어린 분이 어떻게 자이안 님과 함께할 수 있었을지 항상 궁금했는데, 그런 비밀이 있었군요.”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페시스가 자리를 주도했다. 덕분에 일행들은 편하게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면…… 이따가 혹시 살짝만 본모습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냥 여기서 보여주면 되는 거 아냐? 이젠 변신도 익숙해져서 작게 변할 수도 있거든!”
집채만 한 크기의 성룡이 식당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공간이 조금 좁았던지라 케이는 그 자리에 엎드려 최대한 몸을 움츠려야만 했다.
실존하는 용을 눈앞에 둔 페시스가 탄성을 터뜨리며 감격하고, 요리를 나르던 급사가 기겁하며 나자빠지는 사소한 사고도 있었다.
서로 간에 나눌 얘기는 얼마든지 있었다. 만찬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마물에게 그런 비밀이 숨어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자이안 님께서 복마전으로 향해 여정을 끝마치게 된다면…….”
“아마 마물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될 거예요.”
마물은 순수 에너지에 불과한 MP가 마계가 아닌 다른 차원의 환경과 접해, 그 성질이 변질되며 만들어지는 존재다. 어디까지나 에너지를 정화할 뿐인 세계수의 기능은 이미 실체를 이룬 마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복마전이나 세계수의 숲을 비롯해 대륙 곳곳에 남아있는 균열에서 MP가 흘러나오며, 여기저기에 마물이 나타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마족을 하나둘 쓰러뜨리고 복마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균열이 닫힌 지금, 대륙 각지에 마물이 모습을 나타내는 빈도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낮아질 터였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이 위대한 일을 이루셨군요.”
“그게, 어쩌다 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기는 했는데…… 의도하고 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과장해서 띄워줄 정도는 아니에요.”
“아뇨, 자이안 님. 그렇지 않습니다. 눈앞의 사람들을 구하고자 그런 행동을 하신 것. 그런 순수한 선행이 하나씩 쌓여, 비로소 큰 뜻을 이루는 위업이 되는 법입니다. 그 하나하나의 선행이야말로, 사실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도 없는 위대한 일인 셈입니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자이안의 볼이 더 붉어졌다. 페시스는 이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을 가진 청년을 자신이 너무 몰아붙였음을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이렇게 면전에서 칭찬을 받는 건 아직 부끄러워서…….”
“하하. 이제 더 안 괴롭히겠습니다. 하지만 자이안 님, 되도록 빨리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자이안 님께서 말씀하신 일정대로라면, 앞으로도 몇 번이나 같은 소리를 듣게 될 테니까요.”
밤이 더욱 깊어지고 만찬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페시스는 모두가 떠난 식당에 홀로 남아 마지막 잔을 비웠다.
‘이다음 바로 법왕국…… 아니, 얼마 전부터 이름을 바꿨다고 했지? 그래, 성국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자이안 님이 곧 갈 거라고 성국에 미리 연락을 넣을까?’
법왕국과 보석탑의 피해자라는 공통의 유대로 함께하던 시기. 그는 퀴나스와도 안면을 터놓았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상인의 감이 그녀와의 인연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고 시끄럽게 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퀴나스가 정식으로 성녀로 추대되고, 성무에 시달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지금도 부담 없이 연락을 나눌 수 있는 사이였다.
페시스는 왕처럼 마을들을 다스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굳건히 하는 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조용히 있는 게 낫겠군.’
빈 술잔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곧 장난스럽게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귀인은 원래 예고 없이 찾아왔을 때 더 반가운 법이지. 나중에 전대 성녀님께 퀴나스가 얼마나 놀랐는지도 한번 들어보고 싶고.’
다음날.
하룻밤 푹 쉰 일행은 여독을 마저 풀고 정오를 넘어설 즈음부터 다시 여행을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식재료나 모닥불 용 장작, 각종 장비 손질 도구, 새로운 옷가지, 기타 등등 필요한 여러 여행용품은 페시스가 돈 한 푼 받지 않고 상회에서 취급하는 최상품으로 제공했다.
자이안은 상인에게 상품을 공짜로 받을 수는 없다며 한사코 거절했으나 페시스의 호의 역시 만만찮게 막무가내였다.
「적당히 하고 받아, 인마. 상대방 호의에 먹칠하지 말고.」
결국 프레이의 조언에 자이안이 먼저 꺾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유리아와 소아레스는 페시스가 전해준 여행용품의 가격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가 자이안의 정신 건강을 위해 알려주지는 않기로 합의했다.
“무운을 빕니다, 자이안 님. 혹 휴식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다시 찾아오십시오. 항상 여러분께서 머물 자리를 비워놓겠습니다.”
작별인사를 나누고, 마차가 다시 남서쪽으로 나아갔다.
법왕국으로 향하며 들르는 마을마다 카펜트리 상회의 지점이 세워져 있었다.
페시스의 말대로 모든 지점에는 그들을 위한 귀빈실이 준비되어 있었고, 이미 모든 지점에 연락을 마친 건지 지점장은 자이안 일행의 마차를 귀신같이 알아보고 환대했다.
덕분에 일행은 여행의 피로를 충분히 녹이며 불편함 없이 법왕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오? 자이안! 날씨가 좀 쌀쌀해진 것 같아!”
대결계 내, 서쪽 가장 끄트머리의 마을을 떠나고 며칠이 지났을 무렵.
추위에 예민한 유리아가 가장 먼저 변화를 알아차렸다. 소아레스와 자이안도 곧 공기가 차가워졌음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얼마간 더 나아가자, 시야 끝에 희미하게 산맥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나라, 법왕국.
두 번째 목적지가 어느새 눈으로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