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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3.
자이안 알코스.
그 이름을 처음 접한 순간 미오네가 접한 감정은,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끔찍한 공포였다.
‘자이안 알코스. 웨코스 공화국 수도 코르니카에서 발발한 내분 및 대규모 마물 발호 사태를 큰 피해 없이 해결하는 데 지대하게 공헌함.’
보고서를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미오네는 그 내용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자이안 알코스. 40년 넘게 프리엔 황실을 지배하며 폭정을 일삼았던 마족 ― 아마도 마물의 상위 격인 듯 보이는 존재를 직접 쓰러뜨리고 제국에 평화를 가져옴. 이후 클라비수스 제5황자가 황제로 즉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움.’
그 내용을 이해할수록 미오네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자이안 알코스. 보석탑이 벌이는 비인도적인 실험을 모두 폭로하고, 다시 같은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미궁을 제패한 후 완전히 파괴함. 이후 보석탑을 침공한 법왕국의 군세를 단신으로 막아서고, 법왕국의 부패를 폭로한 뒤 기존의 수뇌부를 모두 실각시켜 성녀를 중점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의 수립을 도움.’
읽으면 읽을수록 가관이었다. 차라리 신화적인 주인공을 대상으로 하는 영웅 서사시가 이보다 더 현실감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 보고서를 가져온 사람이 문제였다. 그녀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가 직접 서대륙까지 건너가 정보를 취합한 뒤 작성한 것이었다.
“웨코스에서는 어설프게나마 정보를 통제하려는 의도가 엿보였습니다. 그러나 서대륙으로 건너간 시점부터는 이름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더군요.”
그 말은 미오네에게 어떤 하나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웨코스에서 나름 정보를 숨기려 했던 건, 미오네가 아직 수를 쓸 수 있는 범위이니까. 그러나 서 대륙으로 넘어가 버리면 제아무리 미오네라도 손 쓸 도리가 없다.
즉, 그 행적은 미오네의 추적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기 위해 계산된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쇠약증을 극복했어? 그 상황에서 살아남았다고? 말도 안 돼. 자이안은 그때 죽었어. 시체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살아있을 리가 없어.’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미오네는 천천히 눈을 떴다.
“토리안. 이 사람이 제가 생각하는 자이안일 가능성은…….”
“높습니다. 10대 후반의 어린 소년이라는 연령대, 검은 머리를 가졌다는 외형 묘사 역시 일치합니다. 성은…….”
“아마 바꿨겠죠. 하긴, 저였어도 알레프라는 이름은 두 번 다시 쓰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억지로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미오네는 결국 참지 못하고 탄식을 터뜨렸다.
사람은 자신이 타인에게 준 악의는 쉽게 잊어버리지만, 반대로 타인에게 받은 악의는 결코 잊지 않는다. 미오네는 그것이 사람의 본성이라 믿었다.
‘자이안 알코스. 보석탑과 법왕국의 분쟁을 해결한 뒤 북상. 서대륙 최북단의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후, 그대로 북상하여 사라짐.’
그나마 마지막 문단이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알레프 백작가는 대대로 하이엘프와의 맹약에 의해 축복을 받는다고 했던가. 미오네는 빛바랜 지식을 들춰보았다.
페르지오 백작 역시 젊었을 적 맹약을 이행하기 위해 세계수의 숲으로 원정을 떠났다. 나이아를 만난 시기가 바로 그때다.
‘자이안은 유년기에 2년간 바로 그 하이엘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어.’
자이안이 그대로 북상해 종적을 감춘 것 역시 그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이대로 돌아오지 마. 그 숲에서 네가 좋아하는 하이엘프 스승과 평생 살아. 안 죽었잖아? 암살자들의 습격에서 살아남았잖아? 그럼 됐잖아. 과거 따위는 잊고, 원망 따위는 버리고 거기서 평화롭게 살아.’
그게 얼마나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인지 미오네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해서 스스로를 합리화하지 않으면 숨이 막히는 공포를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첩보원 일부를 세계수의 숲 근처에 심어놨습니다. 자이안이 숲을 나와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해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잘하면…… 그와 협상을 할 수도 있겠지요.”
“토리안……!”
그 말은 한 줄기 광명과 같았다. 감격에 찬 나머지 미오네가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붙잡았다.
토리안. 그녀가 어릴 때부터 친우로서 함께 했으며, 한때 호위 기사였고, 이제 충실한 수족이며 그림자인 그는 이번에도 그녀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부인. 부인께서 걱정하시는 일, 부인께 누가 될 일은 이 한 몸을 바쳐서라도 모두 막아 보이겠습니다.”
“그런 말 말아요, 토리안. 전 당신이 없으면 반쪽짜리예요. 잘 알잖아요? 그러니 끝까지 살아남아서, 제 곁에서 저를 도와주세요. 제가 일리움을, 그리고 바란드를 위해 이 한 몸을 남김없이 불사를 수 있게.”
“알겠습니다. 부인께서 바라신다면.”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고 둘이 백작 몰래 밀회를 나누고 있다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사이에 이어진 유대의 끈은 고작 남녀의 연정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깊고, 결코 끊을 수 없는 견고한 것이었다.
“덕분에 진정이 됐어요. 고마워요, 토리안.”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좋아요. 겁에 질려 움츠러들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죠. 백작 각하에 대한 정보 통제는 어떤가요?”
“현재로서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각하께서는 유배지에서 보내진 자이안의 가짜 편지를 의심 없이 믿고 있습니다.”
“잘 했어요. 왕실의 상황은 어떻죠? 전하의 상태는요?”
“전하께서는…….”
토리안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백 마디 말보다도 더 명확한 대답이었다.
시모스 국왕의 정신상태는 날이 지날수록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무모한 폭정을 일삼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국정 운영에 자잘한 실수가 조금씩 늘어나고, 충신들의 직언을 고깝게 여겼다. 자칫 길을 잘못 들었다간 암군으로 타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림자들을 허무하게 잃지만 않았더라면…….’
국왕이 변하기 시작한 건 미오네가 자이안의 암살을 실패한 뒤였다.
미오네도 억울하기는 했다. 왕실이 자랑하는 최정예 암살자 12명이 고작 어린애 하나도 못 죽이고 목숨을 잃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서 이미 엎질러진 과거가 고쳐지는 것은 아니다.
“전하께 기별을 넣어 주세요. 곧 찾아가겠다고. 제가 곁에서 지켜보면 상태가 조금 안정될 거예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전에 왕성에 방문하셨을 때…… 그게, 뺨에, 상처를…….”
토리안이 조심스럽게 우려를 드러냈다. 국왕의 난폭해진 성정은 자식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손찌검을 당한 적도, 집어던진 물건에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상처는 치료하면 그만이에요. 그 정도는 값싼 일이죠. 자이안이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토리안은 침음하며 말을 삼갔다. 이윽고 그가 조용히 물러나고, 미오네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왕도로 향할 채비를 시작했다.
바쁜 나날이 지나갔다. 미오네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나, 잊을 만할 때가 되면 자이안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가 언젠가 복수를 위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런 감정들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큰 사건 없이 시간이 조용히 흘렀다.
미오네의 두려움도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차츰차츰 잦아들었다. 어느 날,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자이안의 이름을 떠올려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몽에 시달린 끝에 한밤중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이안이라는 이름이 주는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확신했을 무렵.
* * *
세계수의 숲, 이북.
장벽처럼 늘어선 길고 거대한 산맥은 대륙을 외적으로부터 지키는 견고한 보루를 연상케 한다.
인간은 대륙 서쪽 복마전이야말로 마의 근원지라 믿지만, 그보다도 더 위험한 마물의 군세가 바로 그 산맥 너머에 진을 치고 있다.
어찌 보면, 인간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건 축복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산맥 너머의 광경을 그들이 직접 목도한다면 지나친 두려움에 미쳐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자― 이― 안― !”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사시사철 눈보라가 몰아치는 변덕스러운 극한의 땅을 작은 그림자가 빛살처럼 내달렸다.
두 손에 단검을 쥐고 소리를 찢어발기며, 스쳐 지나가는 마물들의 심장을 정확하게 꿰뚫어 일격에 쓰러뜨린다. 약한 대신 무리를 이루는 마물도, 무리를 이루지 않아도 되는 크고 강력한 마물도 예외는 없었다.
마물의 시체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픽픽 쓰러지며 메마른 땅 위에 기묘한 족적을 남긴다.
“이쪽 다 끝났어! 어때? 이번엔 내가 이긴 거 같은데?!”
막 바실리스크 한 마리를 세로로 양단한 자이안이 잠시 허리를 폈다. 그 앞에 멈춰선 유리아가 밝게 웃으며 단검을 흔들었다. 자이안도 마주 웃었다.
“제가 졌어요. 이제 속도로는 유리아한테 못 당하겠는데요.”
“히히. 그동안 노력한 보람이 있다!”
나태의 최후를 지켜본 그 날로부터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당초 자이안은 신스의 훈련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신스는 그녀가 했던 말대로, 자이안을 문자 그대로 죽일 기세로 굴렸다.
「잘한다, 신스. 더 굴려라. 저놈 어차피 저 정도로는 포기 안 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빡세게 굴려도 악착같이 버틸 거다.」
“여기서 두 배 더 힘들어지면 정신보다 몸이 먼저 박살 날 걸세.”
설상가상으로 프레이까지 훈련에 힘을 보태자,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성장을 실감할 수 있는 충실한 시간이었다.
다른 일행이라고 놀고 있지는 않았다. 신스의 훈련은 자이안만 받을 수 있도록 제한된 게 아니었으니까. 유리아가 먼저 자진해서 참여했고, 소아레스가 뒤따랐다.
지난 1년간 둘의 성장은, 자이안이 보기에 그야말로 눈부셨다.
만약 지금 그들과 진심으로 싸울 경우, 설령 1:1이라도 완벽하게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숫자로 치면 7:3정도.
둘을 한 팀으로 해 2:1의 싸움이 되면 승산은 4:6정도로 크게 기운다.
“근데 이건 좀 불공평하지 않아? 자이안 너는 마법도 안 쓰고 성검도 안 쓰잖아.”
성검. 스펙트럼의 변형 한계를 뛰어넘어 거대한 빛의 파도를 쏘아 보내는 기술의 이름이었다.
크룩스가 가장 먼저 지나가듯 말했고, 다른 각성자들이 괜찮은 이름이라며 동의했다. 큰 기술에는 알기 쉬운 이름을 붙이는 게 편하다는 설명과 함께.
“유리아도 광역공격은 안 쓰잖아요? 조건은 동등하니까, 공평한 거죠.”
“혹시 봐주는 건 아니지?”
“제가 마물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할 것 같아요?”
물론 힘을 어느 정도 아끼고 있는 건 맞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돌발 상황에 대비한 전력 온존이다.
“안 되겠다. 이따 대련 한 번 하자.”
“소아레스도 부를까요?”
“아니. 오늘은 꼭 1:1로 이길 거야.”
“기대하고 있을게요.”
빙긋 웃으며 대답하고, 자이안은 새삼스럽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산맥 너머의 황폐한 땅. 1년 전만 해도 곳곳에 마계와 이어진 수많은 균열이 열려 있었고, 쏟아져 나오는 마물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훈련에 적응되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일행들은 적극적으로 신스의 일을 도왔다. 각성자들까지 발 벗고 나서자 그 많던 마물들도 결국 씨가 말랐다. 균열도 하나둘 닫히기 시작했다.
“균열이라는 게 본래 빨리 닫히지 않는데…… 자이안, 네가 마족들을 쓰러뜨린 게 영향을 미친 것 같구나.”
교만과 음욕에 이어 나태, 폭식까지 죽으면서 이쪽 차원에 미치는 찬탈자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게 신스의 추측이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은 두 마족인 ‘탐욕’과 ‘분노’를 마저 쓰러뜨리고 나면 복마전을 포함한 모든 균열이 닫힐 가능성이 높았다. 찬탈자의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이안의 차원이 평화를 되찾는 것이다.
“찬탈자를 쓰러뜨리고 싶다는 마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느냐?”
신스의 그 물음에 자이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탐욕과 분노를 죽이고 이대로 평화를 맞이한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왕 마음먹은 거, 끝을 보고 싶었다. 애초에 남은 두 마족이 다른 마족들처럼 제 발로 이쪽 차원으로 넘어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 둘이 제 발로 찾아오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차피 이쪽에서 찾아가야지 않겠습니까?”
그 대답에 신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어쩌면 남은 마족이 폭식과 마찬가지로 세계수 이북의 균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일행이 신스의 일을 도운 것은 그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남은 마족은 끝끝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이 모습을 내가 살아생전에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신스는 눈앞의 광경을 보며 감회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허공을 세로로 쭉 찢으며 벌어진 검붉은 틈. 지금까지 끝도 없이 마물을 쏟아낸 균열이었다.
세계수 이북에 존재했던 그 많던 균열이 하나둘 닫혀 사라지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균열. 그 균열이 조금씩 크기를 줄이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신스와 마찬가지였다. 여러 감정이 북받쳐 올라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신스가 저도 모르게 자이안의 팔을 붙잡았다. 자이안은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주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스승님.”
균열이 마침내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