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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오지랖 (122/210)


122화 오지랖
2023.02.02.


“저를 세계수로 데려다주세요. 제가 마지막 남은 일을 해낼 수 있게.”

아침 일찍, 에일레나가 일행 모두가 탈 수 있는 승합차를 끌고 왔다. 자이안은 그녀를 상관없는 일에 부려먹는 것 같아 미안해했으나, 본인은 어차피 세계수에 들러야 했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세계수 내부는 엘프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나 몇몇 구역은 특정한 지위가 아니면 출입할 수 없었고, 그보다 더 은밀한 구역은 하이엘프가 아닌 이상 접근 자체가 금지되었다.

나태는 그런 보안들을 제 집이라도 되는 마냥 슥슥 무력화시키며 멈추지 않고 안으로 나아갔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침묵하고 있던 조명이 환하게 켜지며, 이음새 하나 없이 매끈한 금속제 벽 안쪽에서 희미하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식별명 ‘총책임자’,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엘프의 도시도 현대 지구와 비슷해 보이는 고도의 문명을 자랑했지만, 나태가 향하고 있는 세계수 안쪽은 그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첨단 시설이었다.

나태가 앞장서서 얼굴을 보이며 신원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모든 시설이 자동화되어 작동했다.

「MP가 전혀 쓰이지 않고 있군.」

마안을 연 프레이가 나직하게 감탄했다. 엘프의 기술도 그렇고, 세계수 역시 기본적으로는 MP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기계 문명의 산물이었다.

하긴, 세계수의 역할은 차원을 오염시키는 MP를 정화하는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네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건…… 그래, 잘 알겠다. 그렇다고 네 영혼을 세계수와 융합시킬 필요는 없지 않느냐? 세계수는 지금도 멀쩡히 기능하고 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신스?”

나태의 바로 곁에서 그를 부축하며, 신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와 대화를 나눴다.

“세계수는 마나로부터 독성을 제거하고 여러분이 부르는 두 가지 힘, 마력과 성력으로 변화시키죠.”

“그건 나도 안다. 그리고 정화 수용량을 초과해 미처 정화하지 못한 마나는 임시 저장고에 누적되지.”

“맞아요. 그러면 마나를 정화할 때, 제거시킨 독성은 어디로 갈까요?”

“……그건.”

생각지 못한 반문에 신스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 역시 세계수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았다.

세계수의 기능은 하이엘프 한 명이서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방대했다. 본래 여러 명의 하이엘프가 각자 기능 일부를 맡고, 그렇게 여러 명의 하이엘프가 힘을 모아야 비로소 세계수를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스를 제외한 하이엘프들이 하나둘 목숨을 잃고, 결국 신스 혼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됐다.

“여러분들을 좀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조율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여러분들을 너무 인간적으로 만들고 말았네요. 미안해요.”

“내 형제자매들은 비록 미련한 짓을 했지만, 그 모두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사과하지 말거라.”

“그런가요.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미안해요.”

신스의 말을 듣고도 나태는 재차 사과했다. 신스는 문득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말이 이상한 데로 샜네요. 하던 얘기로 돌아가죠. 마나로부터 추출된 독성은 세계수 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해독기관을 통해 아주 오랜 기간을 통해 분해돼요.”

“그럼 아무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 아니지. 설마?”

“아마 신스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예요. 균열이 문제가 됐죠.”

현재 대륙에는 세계수 북쪽의 산맥 너머, 서쪽 끝의 복마전 각각 두 곳에 균열이 열려 있다. 하이엘프들이 스스로를 희생하기 전에는 훨씬 더 많았다.

균열은 선주 인류가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차원을 떠나는 그들의 불확실한 모험이 그들이 떠난 자리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 탓에 세계수는 처음 설계하며 계산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MP를 정화해야만 했다.

“균열이 언젠가 닫힌다면 다행이죠. 하지만 그게 너무 늦으면? 세계수마저 마나에 오염돼 버리면, 여기는 정말로 끝이에요.”

나아갈수록 길이 점점 단순해졌다. 마지막 보안을 지나고 나자 일자로 이어진 긴 복도, 그 끝에 이어진 위로 향하는 계단만이 보였다.

처음에는 신스에게 부축을 받고서도 제대로 걷기 힘들어 했던 나태는 어느새 의연한 걸음걸이로 혼자서 걷고 있었다.

“다 왔어요. 여기가 세계수의 심장입니다.”

나태의 말대로, 그것은 거대한 심장이었다.

엘프의 도시에 늘어선 거대한 빌딩보다도 더욱 컸다. 가장 좁은 부분의 너비만 해도 백 미터에 달하리라.

혈관을 연상케 하는 금속관이 사방으로 이어져 있었고, 심장이 맥동할 때마다 내부에서 밝은 빛이 소용돌이쳤다. 자이안의 코끝에 강렬한 MP의 냄새가 닿았다. 그가 탄성과 함께 말했다.

“여기가 당신이 말한 해독기관의 중추군요.”

“역시 자이안은 머리가 좋네요. 제가 설명할 필요를 덜었어요. 맞아요. 저는 이 심장에 제 영혼을 융합시켜서, 해독기관을 더 강하고 튼튼하게 만들 겁니다. 그걸 위해서 아주 오래 전부터 제 영혼을 조금씩 조정했죠.”

난간 끝에 해독기관을 조종하는 패널이 부착되어 있었다. 나태가 그리로 다가가 패널을 몇 번 조작하자, 세계수의 심장이 낮게 진동했다. 마지막으로 나태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제가 마지막에 고향을 지킬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마워요.”

“……!”

갑작스럽게, 신스가 뛰쳐나갔다. 그러나 나태의 행동은 그것보다 조금 더 빨랐다. 그가 망설임 없이 난간 너머로 몸을 던졌다. 다급하게 뻗은 신스의 손은 허망하게 허공만 붙들었다.

나태의 몸이 심장의 표면에 부딪혔다가 그대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신스는 난간을 붙들고 눈을 부릅뜬 채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뒤이어, 심장의 맥동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해졌다. 일행들이 발을 디디고 선 단단한 금속제 발판에까지 진동이 느껴졌다.

“스승님.”

자이안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신스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돌려 그대로 자이안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울음소리도 없고, 눈물도 없었다. 표정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저 모자란 관리자의 최후를 지켜봐 줘서 고맙다.”

잠시 뒤 자이안에게서 떨어진 신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기보다도, 모든 감정을 한 곳에 꾹 눌러 담아 그 위에 뚜껑을 덮은 듯했다.

“돌아가자.”
 

* * *

깊은 밤. 신스는 어김없이 식당 한쪽에 앉아있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예감에 식당을 찾은 자이안이 그 모습을 발견했다.

자이안이 신스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불도 꺼져 있었고, 신스의 앞자리도 텅 비어 있었다. 술도 술잔도 없었다. 창문 너머로 짓쳐 드는 달빛도 흐렸다.

“모자란 관리자는…… 나태는, 언제부터 이 모든 것을 알고, 대비하고, 각오했을까?”

답이 없는 물음이었다. 사실 물음의 형태를 띤 회한이라 보는 게 더 가까웠다.

“못다 한 얘기가 많았거늘. 하긴 예전부터 저 스스로만 챙기는 놈이었지.”

신스가 나태에 대해 꺼내는 날이 선 말들이 사실은 깊은 친애의 표현임을, 이제는 자이안도 잘 알았다.

“그래. 자이안. 생각은 좀 해보았느냐?”

그러나 회한에 젖는 시간을 길지 않았다. 신스가 밝은 목소리로 물으며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그 모습은 바로 직전까지 친인에의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스승님.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요. 게다가 오전에는 나태 때문에 뭘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너라면 그 과정에서 뭔가 깨닫는 게 있지 않을까 했다만. 내가 널 너무 과하게 평가한 게냐?”

짓궂은 웃음을 띠고 자신을 돌아보는 신스를 보며, 자이안은 문득 그의 스승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촌도 그렇고, 스승님도 그렇고…… 제가 이기지 못할 분들이 너무 많네요.”

“호오. 그 말은?”

“아직 두루뭉술하니까 좀 더 정리하고 싶은데…… 그래도 듣고 싶으세요?”

“그런 날것 그대로의 생각을 먼저 들을 수 있는 게 가족이나 스승의 특권 아니겠느냐. 놀라지도, 비웃지도 않을 테니 말해 보거라.”

이렇게까지 듣고 싶다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자이안은 쓴웃음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제 셋이서 함께 술을 마셨을 때부터 생각한 거예요. 이대로 마계를, 찬탈자를 그냥 놔둬도 괜찮을까.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제가 죽고 난 후에라도, 그것들이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뭐?”

신스가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했다. 그녀가 예상했던 건 이런 얘기가 아니었다.

“지구도 그렇고, 저희 차원도 그렇고. 많은 비극이 그 ‘찬탈자’라는 존재로부터 시작됐죠. 어머니께서는 그 원흉을 뿌리 뽑고자 하셨지만 실패하고 말았어요. 그렇다면 어머니께서 못다 한 일을 제가 이루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니, 자이안…….”

망연히 그를 바라보던 신스가 기어이 이마를 짚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건 그냥 쓸데없는 오지랖이지 않느냐.”

“푸흡.”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언젠가 프레이에게 들었던 말과 완전히 똑같았다.

“웃어? 이 못난 제자 놈이, 감히 스승의 말을 듣고 웃어?”

“아니, 그게, 죄송합니다. 스승님이 하신 말씀이 이전에 삼촌이 했던 말씀과 똑같아서요.”

“프레이! 자네는 가족이라는 게 조카가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오지랖 부리는 것도 못 막고 그동안 뭘 한 겐가?”

「그걸 내가 막는다고 막을 수 있었으면 이놈이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다.」

펜던트 너머, 팔짱을 낀 프레이가 심드렁하게 반론했다. 오랫동안 자이안과 함께하고 여러 번 그와 부딪힌 끝에, 프레이는 그의 오지랖에 대해 사실상 체념 혹은 수용의 단계에 들어섰다. 이제 신스가 그 전철을 밟을 차례였다.

“자이안. 네가 살아봤자 얼마나 더 살 것 같으냐? 백 년? 아니, 그래. 마나를 받아들이고 각성자라는 존재가 되어 수명이 늘어났다고 했지. 그래봤자 몇 백 년이다. 인간에게는 길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차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찰나와 다름없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네가 우려하는 일이 과연 일어날까? 나는 결코 그럴 리가 없다는 쪽에 걸겠다.”

그러나 신스는 자기 앞에 놓인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이안을 설득하려 애썼다.

“자이안, 그건 네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네게 주어진 것,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고 천수를 누리며 죽는다 한들 아무도 너를 욕하지 않는다.”

“제 마음이 저를 욕할 겁니다.”

자이안의 대답은 흔들림이 없었다.

“삼촌이나 스승님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그렇고. 제가 오지랖만 부리면 다들 뜯어말리시네요.”

“네가 위험해질까 봐 그렇지!”

“지금까지 그런 위험은 몇 번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극복했고요. 지금까지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거다, 그런 교만을 부리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저는,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불확실한 위험에 겁먹고 제 마음을 속이는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

“널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언성을 높여 소리치던 신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힘이 빠진 듯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자이안의 눈을 마주 보고, 그녀 역시 깨달았다. 자이안이 이미 비슷한 문답을 여러 번 거쳤음을. 프레이를 비롯한 각성자들과도 그랬을 것이고, 유리아나 소아레스와도 그랬을 것이다. 초월자나 다름없는 케이는 예외로 치고서라도.

“프레이. 아르스. 크룩스. 유민. 자네들이 그동안 정말 고생이 많았겠구먼.”

「푸하하하!」

맥이 탁 풀려버린 신스의 말에 프레이는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 엄마에 그 아들이로구나. 가족끼리는 닮는다는 말이 이리도 끔찍한 뜻인 줄 오늘 처음 알았다.”

그 말에 자이안도 웃었다.

“그 마음이 변치 않으리라 맹세할 수 있느냐?”

“스승님께서 원하신다면,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자이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신스는 그 모습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네가 어렸을 때 받은 훈련이 얼마나 가볍고 편한 것이었는지 알게 될 거다. 지쳐 쓰러져 죽을 것 같아도, 울고불고 매달리며 후회해도 결코 그만두지 않을 거다. 타협도 없고, 포기도 없다. 자이안, 네가 선택한 길이다.”

한발 늦게 자이안의 표정이 환하게 피었다.

그것이야말로 자이안이 바라던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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