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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처음이자 마지막 술자리 (121/210)


121화 처음이자 마지막 술자리
2023.02.01.


“이번에는 안 늦고 찾아왔구나.”

자리에서 일어선 신스가 빙긋 웃으며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측면으로 쏟아지는 달빛에 감싸인 그 모습은, 마치 그녀 스스로 빛을 내는 듯 몽환적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던 자이안이 천천히 식당으로 들어갔다.

“불도 안 켜고 뭐 하세요?”

식탁에 놓인 술병을 툭 두드리며 신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적을 벗 삼고 추억을 안주 삼아 술 좀 마셨다. 너도 한잔할 테냐?”

일리움에서 남자는 17살이 되는 해에 성인식을 치른다. 자이안은 대답 대신 그녀의 바로 옆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불은 일부러 켜지 않았다. 달빛이 환해서 불빛은 따로 필요 없었다.

“잔이 세 개네요.”

“곧 오겠지. 너처럼 늦지는 않을 게다.”

신스의 말은 나태가 처음 찾아온 날 밤 조용히 열렸던 그녀와 나태의 술자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때 자이안은 깨어 있었으나, 결국 끝까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두 분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고 있는데 제가 거기 끼어드는 것도 좀 이상한 그림이잖아요.”

자이안은 어깨를 움츠리며 난감한 표정을 했다. 신스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작게 코를 울렸다.

“흥. 예의가 너무 바른 것도 생각해봐야 할 일이로구나.”

그러고는 자이안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이안이 자연스럽게 술잔을 이어받아 마찬가지로 그녀의 잔을 채웠다.

“스승님께 다시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나직한 말이 침묵을 밀어냈다. 신스는 턱을 괴고 부드러운 미소로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유가 뭐냐?”

“더 강해지고 싶어요.”

“미오네에게, 알레프에게 복수라도 하고 싶은 게냐?”

자이안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리움을 떠나며 삼촌과 처음 만났을 때, 삼촌께서 제게 그러셨습니다. 제가 제 바람대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남에게 억압당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고.”

그렇게 시작된 여정은 비록 다사다난했으나 오롯이 자이안의 의지로 선택된 것이었다.

“자이안.”

잠시 말이 없던 신스가 손을 들었다. 작은 손이 자이안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었다.

“네 바람을 들어주는 건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허나 자이안. 그다음에는?”

“예?”

“네가 원하는 만큼 강해진 다음에는 뭘 어쩔 셈이냐? 아니면, 그저 계속해서 강해지는 것만이 네가 바라는 네 여행의 종착점이냐?”

생각지 못한 질문에 자이안의 말문이 막혔다. 혼란에 빠진 그를 바라보고, 신스는 피식 웃으며 마지막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여기 머무르며 얼마나 쉬건 나는 막지 않겠다. 그러니 원 없이 쉬면서 한번 생각해보려무나. 어떤 대답이라 한들 나는 긍정하겠다. 오직 네가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찾아보거라.”

신스가 술잔을 들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자이안이 마찬가지로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쳤다. 그리고 신스와 동시에 잔을 쭉 들이켰다. 처음 마시는 술은 지독하게 썼다. 그러나 신기할 정도로 막힘없이 넘어갔다.

“와, 치사하다. 저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둘이서만 마시고 있었어요?”

식당 입구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신스와 눈이 마주친 나태가 마치 눈부신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모자란 관리자야. 너 걷는 게 왜 그러냐?”

“그냥 후유증 같은 거예요.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가 자연스럽게 신스와 자이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남아있던 잔을 들고는 자기 손으로 술을 채워 거침없이 들이켰다.

“크으으으. 가끔은 이해가 안 된다니까요. 사람들은 이 맛없는 걸 왜 그렇게 좋다고 마실까.”

“그런 것치고는 잘만 마시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가끔’ 이해가 안 된다는 거죠. 지금은, 뭐…… 술 마시고 싶은 기분이라는 게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네요.”

잠시 말을 멈추고 서로가 서로의 잔을 채웠다. 나태는 술에 담긴 달빛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폭식이 죽었다는 게 아직 실감이 잘 안 나네요.”

“두 분이 친했었나요?”

“그건 이상하구나. 일전에는 서로 싫어한다고 그러지 않았느냐?”

“둘 다 맞아요. 원래는 같은 고향을 둔 친구였어요. 대속자가 되고 좀 지날 무렵부터 조금씩 사이가 틀어졌죠.”

뜻밖의 사실에 잠시 멈칫한 자이안이 이내 작은 한숨을 뱉었다. 신스는 그저 담담한 눈이었다.

“뭐, 사실상 제 손으로 죽인 거나 마찬가지니 이제 와서 감상에 젖는 건 웃긴 소리겠죠. 다만, 저는 그냥…….”

입을 꾹 다문 나태가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용서가 안 돼요. 저희를 이런 처지에 몰아넣은 그 망할 괴물이.”

그것은 항상 초연하고 가벼워 보였던 그가 지금까지 중 드러낸 가장 격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잠깐에 불과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웃었다.

“뭐, 그냥 그렇다고요. 술맛 떨어지는 소리는 이쯤 하죠. 저, 이래 봬도 두 분한테 궁금한 게 많거든요. 특히 당신, 신인류…… 아, 그래. 자이안이라고 했죠? 오, 신스. 저 지금 다른 사람 이름 기억한 거 봤어요? 와 이거 내가 생각해도 정말 대견하다. 그렇죠?”

자이안이 그를 보며 평소보다 가볍고 말이 많다고 느낀 것은, 아마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밤이 깊어지고 자리가 무르익었다. 궁금한 게 많다는 나태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자이안이 어디서 태어났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이아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펜던트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등등.

나태는 자이안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알아야 직성이 풀릴 기세였다.

그리고 그만큼 스스로에 대해서도 많이 말했다.

덕분에 자이안은 신스가 가장 처음 빚어진 하이엘프이며 덕분에 유일하게 선주인류와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 더 이상 아빠라는 말을 들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도 신스를 자식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 등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주인류가 살아있을 무렵, 대속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직위에 있었으며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로물루시오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 말하는 나태의 눈은 흐리멍덩하게 풀린 채 어느 빛바랜 과거의 책갈피를 들춰보는 듯했다.

“술도 약한 놈이 많이도 마셨구나.”

“다른 친구들에게도 사과하고 싶었어요. 모두를 구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저 혼자 살아남아 미안하다고.”

신스의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힘겹게 잔을 삼킨 나태가 식탁 위에 쓰러졌다.

“이런…… 목숨…… 하나 때문에…….”

쓰러진 잔이 데구르르 굴렀다.

“…모자란 관리자 같으니라고.”

손끝으로 잔을 짚어 멈춘 신스가 곯아떨어진 나태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뱉었다.

“너라도 살아남아 다행이라 여기는 이가 바로 옆에 이렇게 있거늘.”

마침 한 병이 깔끔하게 빈 참이었다. 조촐한 술자리를 마무리 지을 때였다. 자이안과 신스는 나태를 부축해 그의 방에 옮겨 재운 뒤 가벼운 밤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

“……?”

각성자 특유의 해독 능력으로 숙취 하나 없이 말끔히 눈을 뜬 자이안은 문득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그 정체가 뭔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종들이 찾아오는 것보다도 먼저 스스로 준비한 물로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가려던 자이안은 문밖에서 인기척 하나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깨달았다. 신스였다.

“자이안. 일어났느냐?”

“스승님? 일찍부터 무슨 일이세요?”

자이안은 별다른 의문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신스의 얼굴을, 지금껏 없는 동요와 불안을 드러낸 그 눈을 보고는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나태가…….”

자이안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 * *

‘착각이 아니었어. MP의 냄새가 터무니없이 얕아.’

신스를 뒤따라 나태의 방에 도착한 자이안은 예상이 들어맞았음을 깨닫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이 느낌은 시기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비슷했다. 죽음을 곁에 둔 마족 특유의 희미하고 투명한 냄새.

이 상태의 마족은 임종을 눈앞에 둔 노인보다도 더 위태로운 상태라고 봐야 했다. 육체적으로는 이미 죽었어야 정상인 것을 강한 의지로, 영혼의 힘으로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 의지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는 순간이 최후다.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나태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똑같아 보였다. 그러나 정작 침대에 드러누워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이안의 후각을, 그리고 프레이의 마안을 속이기에는 어설픈 연기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였는데. ……아니, 아니지. 하루아침에 이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됐을 리가 없다.」

프레이가 신음을 뱉으며 스스로의 추측을 설명했다.

「오래전부터 오늘내일하는 상태였을 거다. 어제까지는 전혀 안 그런 척, 자이안의 코나 내 눈까지 속일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거지.」

그 말에 자이안도 똑같이 신음을 흘렸다. 지금 나태는, 그렇게 연기할 힘마저 바닥났다는 뜻이었다.

“모자란 관리자야. 얼버무리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라.”

신스가 자이안의 표정을 보고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나태를 지그시 눌러 눕히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게냐?”

“…….”

나태는 대답 대신 가볍게 웃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설프게 힘 빠진 웃음이 한계였다.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웃음을 거둔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몇 년. 하다못해 몇 달, 아무 방해 없이 마음 편하게 신스랑 같이 지내면서, 천천히 말해주고 싶었는데. 쉽지 않네요.”

“……설명해 보거라. 처음부터 끝까지.”

“두 분이 짐작하시는 그대로일 거예요. 저는 곧 죽습니다.”

나태가 침대 속에 묻혀있던 손을 들어 신스의 손을 붙잡았다. 노인을 연상케 하는, 살 하나 없이 말라붙은 손이었다.

“징조는 몇 백 년 전부터 있었어요.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건 그보다 훨씬 전이었고요. 제가 전에 그랬죠? 찬탈자에게 먹혀 완전히 타락하는 걸 막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영혼을 분리하는 편법을 썼다고. 오염돼버린 몸을 되찾는 과정에서 마찰이 좀 있었어요. 알기 쉽게 비유하면, 영혼이 좀 다쳤죠.”

육체의 상처와는 달리 영혼의 상처는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혼공학자이기도 한 나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버티고 있었는데…… 탐식이 제 몸에 기생한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어요. 안정적인 상태면 모를까, 불안정한 상태로 한 몸에 두 영혼이 들어가 있는 걸 버틸 수가 없더라고요. 제 힘으로는 손 쓸 방법이 없었어요. 아마 지구인들의 힘으로도 비슷할걸요.”

“왜…… 말하지…… 않은 거냐?”

“지금 같은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신스.”

이를 악문 신스가 높이 주먹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약하게 때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전 오래 전부터 이 날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무슨 일을 할지도 미리 생각해뒀고요.”

드러누워 있던 나태가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을 쓴웃음을 지으며 매만지다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제 영혼이 완전히 찢어져서 에테르의 바다에 집어삼켜지기 전에, 제 영혼을 세계수와 융합시킬 생각입니다.”

세계수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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