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기만(3)
(120/210)
120화 기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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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기만(3)
2023.01.31.
“나태 네놈……! 분명 내가 확실히 죽였는데!”
-당신이 좋아하는 기만이에요. 당신의 그 쓸데없이 잘 돌아가는 잔머리를 나름의 존경심을 담아 따라 해 봤어요. 마음에 드나요?
대화가 통하는 듯 통하지 않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폭식은 제 스스로의 배를 갈라 체내를 살폈다. 그러나 거기에 그 무엇도 숨어있을 만한 공간은 없었다.
애초에 나태의 육신은 껍데기만 빼고 모두 먹어치워 흔적도 없이 소화시켰다.
-그거 알아요? 세계수를 만들 당시 저는 극도의 불안 및 공황증세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별의별 게 다 위험해 보였고, 뭐 하나만 대비를 게을리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겪을 것 같았죠. 그래서 그 불안을 모두 세계수를 통해 해소했어요.
그런데도 내면의 목소리는 끈질기게 들려왔다. 마치 그의 귓가에 나태의 망령이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마나 정화기는 말할 것도 없이 기본적인 거죠. 그거 말고도 괜히 눈에 띄어서 생기는 마찰을 피하기 위한 스텔스 기능, 핵융합 폭탄이 근처에서 터져도 끄떡없는 견고한 역장, 혹시 모를 외적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자동요격 시스템, 내부에서 사고가 터졌을 때를 대비한 긴급차폐장치, 그리고…… 동족 중 누군가가 배신할 때를 대비한 동족살해기능.
“그게 무슨……!”
상상도 못 할 무서운 말에 폭식이 저도 모르게 기함을 토했다. 동족살해기능이라니? 그쯤 되면 그냥 미치광이가 아닌가.
-물론 대부분의 기능은 제가 승인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도록 잠겨 있어요. 바꿔 말하면, 제가 돌아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작동시킬 수 있다는 뜻이죠. 그리고 저는 저희 동족 중에서 손꼽히는 영혼 공학자였으니까…… 무슨 얘긴지 이제 슬슬 감이 잡히죠? 제 영혼만 멀쩡하면 세계수의 모든 기능을 문제없이 작동시킬 수 있어요.
전신에 전율이 퍼졌다. 호흡이 가빠지며 컥컥거리는 메마른 기침이 터져 나왔다. 폭식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주춤주춤 세계수로부터 멀어졌다.
-당신이 세계수를 부수고 고향을 찬탈자에게 바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 이걸 막을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어요. 결국 나온 건 당신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간 척을 하면서 반대로 당신을 속인다는 과감한 계획이었죠. 말하자면 기만에 대한 기만인 셈이죠. 그리고 당신이 이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건, 모든 게 제 계획대로 흘러갔다는 뜻일 거예요. 당신이 저를 먹어치우고 의기양양하게 세계수에 가까워지면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설정해 놨으니까.
“이…… 미친 X끼야! 당장 그만둬!”
-아, 참고로 당신이 이걸 듣고 있을 때면 전 소생을 위해서 자의식을 깊이 봉인한 상태일 거예요. 이거, 그냥 제가 미리 할 말을 녹음해서 당신에게 일방적으로 들려주는 거예요. 당신이 아무리 울고불고 소리를 질러도 제가 그 말을 들어줄 일은 절대 없어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세계수로부터 등을 돌린 순간, 땅이 갈라지며 덩굴줄기가 뱀처럼 솟구쳤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려던 폭식의 온몸을 덩굴줄기가 칭칭 동여맸다. 그 자리에 고꾸라진 폭식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새하얗게 질린 채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직경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세계수가 흐느끼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나뭇가지들이 폭식을 향해 꺾이고, 나뭇가지를 뒤덮인 거대한 나뭇잎들이 끝부분을 모조리 그에게 겨눴다.
-세계수는 지난 수천 년간 마나 오염을 정화하고, 채 정화하지 못하고 남은 마나를 내부에 차곡차곡 저장해놓고 있었죠. 동족살해기능은 바로 그 마나를 사용해서 작동하도록 설계됐어요.
나뭇잎 끄트머리에 푸른빛이 점점이 모였다.
“아, 아…… 안 돼……!”
-수천 년간 누적된 마나를 이용한 폭격을 맞고도 만약 살 수 있다면…… 그땐 당신의 끈질긴 생명력을 인정해드리죠.
“사, 살려…….”
초고온 플라즈마의 비가 폭식을 향해 쏟아졌다.
폭식의 마지막 애원은 쏟아지는 비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전속력으로 세계수를 향해 달리던 자이안 일행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비쳤다.
마물들이 세계수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었다.
“……내분이라도 일어났나?”
유리아의 말은 그 광경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폭식의 조종을 받고 있을 마물들이 저들끼리 내분을 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지만, 어쨌든 눈에 보이는 현상은 그랬다.
“마물들은 일단 놔두죠. 지금은 폭식을 쫓는 게 더 급하니까요.”
크룩스의 말에 일행은 잠시 늦춰진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 나아가자 또다시 이상한 광경이 비쳤다. 세계수 바로 앞의 땅이 엉망진창으로 파헤쳐지고 녹아내린 채 뜨거운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세히 보면 사람인 것 같기도 한 무언가가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잠깐, 저거…… 마족인데?”
마안으로 정체를 알아차린 유리아가 어리둥절한 투로 말했다. 어리둥절하기는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 와서 마주칠 마족은 폭식뿐인데, 왜 혼자 쓰러져서는 다 죽어가고 있단 말인가.
“오, 신인류들! 그리고 지구인도! 여러분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갑자기 발치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자이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다. 시커먼 진흙 덩어리 위에 익숙한 얼굴이 펑퍼짐하게 둥둥 떠 있었다.
“모자란 관리자야, 너 설마 살아있었던 게냐? 너, 설마…… 나를 속인 건 아닐 테지?”
팔짱을 낀 신스가 불신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태는 진흙 위에 떠 오른 펑퍼짐한 얼굴을 요령 좋게 움직이며 웃는 표정을 만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되살아나는 중이에요. 그것보다 저 대신 폭식 좀 죽여주면 안 될까요? 저대로 놔두면 또 몰래 도망칠 것 같은데.”
역시, 엉망진창이 된 땅 가운데에 쓰러져있는 게 폭식이 맞는 모양이었다. 자이안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폭식을 얼른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도 역시 동의했다.
그는 일행들을 한 차례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신스에게 시선을 줬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신스가 녹아내린 땅 중심으로 향했다.
신스가 불타고 으스러져 거의 대부분 재만 남은 폭식에게 뭐라 말을 걸었다. 그러더니 무슨 대답을 들은 건지 사납게 인상을 썼다.
신스가 간신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던 폭식의 머리를 발로 짓밟았다. 그의 이빨이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게나 고생시킨 것치곤 허망한 최후였다.
“제가 할 일인데 이렇게 떠맡겨서 미안해요. 근데 어쩔 수 없는 게, 대속자 사이에는 서로를 죽일 수 없도록 제한이 걸려 있거든요. 대속자 전원이 동의하지 않는 이상 결코 해제되지 않는 아주 강력한 제한이죠.”
상반신 일부까지 몸을 재생시킨 나태가 미안해하며 설명했다. 그런 쓸데없는 정보는 둘째 치고, 그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았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 긴 얘기를 나누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프레이 형한테 지금 텔레파시를 보냈는데, 저쪽은 갑자기 마물의 전의가 확 꺾였대요. 지금은 도망치는 마물들을 뒤쫓으며 최대한 숫자를 줄이고 있는 모양이에요.”
지속적으로 명령을 받던 마물들이 갑자기 명령이 백지가 되자 일시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진 모양이었다.
자이안은 그 말을 듣고서야 간신히 실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세계수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이 막을 내렸다.
* * *
어떻게 보면, 이번 일의 전말은 기껏 자기 수명을 깎아가며 극대 축복을 내린 유민의 각오를 허망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나태의 계획은 그의 의도대로 깔끔하게 들어맞았다. 굳이 자이안 일행이 부족한 인력을 쪼개 폭식을 추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쯤 폭식은 이미 세계수의 공격에 당해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으니까.
대속자끼리는 서로를 죽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마무리를 대신하기는 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나태가 그에 대해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막말로,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마물 한 마리를 조종해 대신 마무리를 하게 했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잘 해결됐다니 다행이네. 자이안, 정말 고생 많았어.”
정작 유민은 자기 수명이 다소 허망하게 소모됐다는 사실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사실 극대 축복이 아예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마물의 군단을 상대했던 프레이와 케이, 아르스는 일말의 피해도 허용하지 않고 적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프레이는 산맥을 좀 깎아도 되겠냐는 농담 같은 그 말을 진짜로 지켰다.
“자기 목숨까지 거리낌 없이 도박판에 올린 거 아냐? 또라…… 대담한 놈이구만.”
“제 목숨 하나야 딱히 엄청난 가치가 있지도 않고 아까워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폭식이 절 싫어하는 만큼, 저는 폭식의 성격을 잘 알거든요.”
폭식은 복잡한 전술을 싫어하고 정면으로 쳐들어올 거라던 말. 일전에 나태가 폭식에 대해 했던 그 말조차도 기만이었다.
폭식이 이미 체내에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상태에서, 폭식을 속이기 위해 한 말이었다.
“야…… 이…… 빌어먹을 관리자야. 눈앞에서 네가 반으로 갈라지는 걸 보면서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하느냐?”
“원래 적을 속이려면 먼저 아군을 완벽하게 속여야 하는…… 끄악!”
신스가 어디선가 꺼낸 나뭇가지로 나태의 정수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악! 으악! 으겍! 아, 아파요!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 아파요! 그거 그냥 나뭇가지 아니에요?! 왜 이렇게 아프지?!”
“아프라고 때리니까 아픈 게다, 이 모자란 관리자야!”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또 있었다. 세계수의 동족살해기능이 작동하면서, 신스가 세계수 최상층에 손수 지은 그녀의 집이 흔적도 없이 무너진 것이다.
“아니, 그런데 이건 제가 좀 억울한데. 애초에 세계수는 머리 위에 뭘 더 얹을 걸 고려하고 만들어진 게 아니거든요. 이거는 주인한테 허락도 없이 맘대로 뭘 더 얹은 사람이 문제 아닌가?”
“…….”
신스가 말없이 나뭇가지를 들었다. 눈치를 살핀 나태가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쫓고 쫓기는 살벌한 추격전이 또다시 펼쳐졌다.
“그래서, 결국 세계수는 안전해진 게 확실하냐? 또 이상한 놈들이 세계수를 없애겠답시고 찾아올 일은 없고?”
“지금 마계에 남은 대속자는 ‘분노’와 ‘탐욕’ 뿐인데…… 그 둘은 자기들끼리만 친하지, 좀 고독을 즐기는 성향이 강해요. 아마 폭식이 무슨 짓을 했는지,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잘 모르고 있을 겁니다. 폭식의 복수를 꾸미거나 폭식이 못다 한 꿈을 이뤄주거나 할 성격은 아니란 거죠. 찬탈자야 마나에 완전히 오염된 차원이 아니면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고.”
그 말에 일행은 이번에야말로 가슴 깊이 안도했다. 이제 불필요한 걱정 없이 편하게 휴식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엘프들도 별 탈 없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병기의 소모가 극심한 탓에 다음 방위전에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지만, 그 대신 산맥 너머 균열의 규모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다는 희소식도 전해졌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균열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 * *
……그리고, 달빛이 환하게 비춘 어느 깊은 밤.
불 꺼진 식당에 홀로 앉아 느긋하게 추억을 곱씹고 있는 신스에게 자이안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