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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기만(2) (119/210)


119화 기만(2)
2023.01.30.


눈보라와 마물이 사정없이 쏟아지는 악천후를 다시 뚫고 산맥을 거슬러 오르는 길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여정보다도 고달프게 느껴졌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마물들을 최소한의 힘으로 쓰러뜨리며, 세 사람은 도저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 말을 꺼내든 스스로의 한심함만 통감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아마도.”

가장 먼저 용기를 낸 이는 크룩스였다.

“아마도 폭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희를 기만하고 있었을 겁니다. 나태를 포함해서, 마계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아주 교활한…… 마족이에요.”

그 말은 폭식 하나에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폭식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버려야 합니다. 그 목표가 세계수 파괴라는 것만 빼고 전부 다.”

신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자이안. 그놈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 수 있겠느냐?”

“거리가 멀어져서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산맥을 넘어간 건 확실합니다.”

산맥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기후가 다른 것은 물론이고, 각종 감지 능력이나 원거리 텔레파시 등이 산맥을 넘어가는 순간 전부 무용지물이 됐다. 그 탓에 반대편에서 고생하고 있을 프레이 일행에게 나태가 죽고 폭식을 놓쳤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못하고 있었다.

“폭식은 아마 곧장 세계수로 향할 겁니다. 지금은 이빨 하나만 남은 상태니까, 힘을 회복하기 위해 중간에 좀 지체할 가능성이 높긴 해요.”

“억지로 희망적인 말을 꺼낼 필요는 없다네, 크룩스. 일단 산맥을 넘은 뒤 대책을 다시 세우든 하도록 하세.”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끝에 셋은 간신히 능선을 넘었다. 그러나 실제로 지난 시간은 10분 정도에 불과했다.

“자이안! 크룩스! 신스! 이 자식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위쪽에서 프레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산맥 남쪽을 끝도 없이 넘쳐나는 마물들이 모조리 뒤덮고 있었다. 엘프 수비대가 펼친 저지선 역시 처음과 비교해 남쪽으로 상당히 멀어졌다.

“폭식은? 발견했냐? 이미 잡은 거냐? 아니 잠깐만. 나태는 또 어디 갔어? ……너희들 표정이 왜 그러냐? 불안하게.”

“나태는 죽었고, 폭식은 놓쳤다.”

신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레이는 잠시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한 표정이 됐다.

“……이런 염병할.”

프레이가 욕설을 씹으며 이마를 짚었다.

“이거 완전 좆된 거 아냐?”
 

* * *

자이안과 신스, 크룩스의 합류 덕분에 속절없이 밀리기만 하던 저지선을 다시 북쪽으로 밀어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전선의 분위기는 결코 밝지 않았다. 겨우 숨 돌릴 여유를 얻은 일행이 급히 한자리에 모였다.

“다른 거 다 제치고 무조건 폭식을 최우선으로 찾아서 확실히 죽여버려야 한다.”

“잠깐만요, 아저씨. 이 상황에서 저희가 물러나면 엘프들이 모조리 전멸해버릴 거예요. 그렇게 둘 수는 없어요.”

“돌겠네, 진짜.”

프레이가 한숨과 함께 눈을 지그시 감았다. 유민의 말에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현상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폭식을 막지 못해 세계수가 파괴되면 엘프만의 문제가 아닐세. 대륙 전체가 죽음의 땅이 되고 말아.”

“신스, 당신이 엘프의 창조자라면서요? 그러면 창조자로서의 책임을 져야죠!”

유민의 날카로운 일침에 신스는 뭐라 반론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할 말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다 변명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수단이 없는 건 사실이잖니, 유민아.”

“인원을 나누는 거예요. 폭식을 추적해 그 마족을 상대하는 팀하고, 여기 남아서 마물들을 막으며 엘프들을 지키는 팀. 이렇게.”

“10명도 안 되는 인원을 또 둘로 쪼개자고? 그러다가 죽도 밥도 안 되고 다 망하면?”

“제가 모두에게 극대 축복을 걸게요.”

그녀가 꺼낸 말에 지구 측 각성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백마법 계통 각성자들은 치유, 저해, 축복으로 분류된 세 가지 종류의 마법을 배우며 아군을 보조한다.

치유는 문자 그대로 다치고 지친 아군을 회복하는 마법. 저해는 적들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거나 감각을 혼란시켜 적을 약화시키는 마법. 마지막으로 축복은 아군을 강화해 직접적으로 전투능력을 끌어올리는 마법이다.

백마법사가 만전의 상태에서 아군을 축복할 때 평균적인 전투능력 상승량은 약 20%가량. 이를 강화율 1.2배라고 부른다.

백마법에 독보적인 천재성을 타고난 유민의 경우는, 컨디션에 따른 기복이 다소 있으나 가장 저조할 때에도 강화율 1.5배에 달했다. 그 어떤 백마법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수치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강화율 1.5배조차 모자라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조금만 더 강화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부상자를 줄일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 목숨을 잃고 만 이들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 바람이 유민이 스스로를 갈고닦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침내 극대 축복이라는 그녀 자신만의 백마법이 탄생했다.

극대 축복의 강화율은 3배에 이른다. 아무런 축복도 없는 상태의 3배, 유민의 축복을 받았을 때를 기준으로 해도 산술적으로 2배는 더 강해지는 것이다.

“유민이 너…… 괜찮겠어?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그런 엄청난 마법에 아무런 단점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극대 축복은 유민의 수명을 제물로 삼는다.

당장 영향을 미칠 만큼 큰 수명을 가져가는 건 아니다. 그래도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유민의 목숨을 확실하게 깎아낸다.

“괜찮아요, 언니. 전 누굴 살리지 못해 후회한 적은 많아도, 누굴 살리고 나서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아르스의 우려 섞인 질문에 유민은 일말의 갈등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짧은 문답이었으나 아르스는 그녀의 의지가 철옹성처럼 견고함을 깨달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 잠깐만요! 그래서는 유민 누나 혼자 너무 큰 부담을…….”

뒤늦게 프레이에게 극대 축복의 전모를 전해 들은 자이안이 급히 유민을 말리려 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역시 다른 각성자들과 같은 심정이 되었다.

“포기해라, 자이안. 이 녀석 한 번 이러면 나이아를 데려다 놔도 고집 못 꺾는다.”

“……반드시, 성공할게요.”

결의를 다잡으며, 자이안은 무거운 목소리로 다짐했다. 자신을 희생해 모두를 구하려 하는 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오직 그것뿐이리라.

“유민 언니…… 나, 절대 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게.”

“얘는,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다. 끽해야 수명 1~2년 줄어드는 거야. 어차피 각성자는 오래 사니까, 사실 별로 큰 영향도 없어.”

케이를 제외한 일행들이 유민을 중심으로 빙 둘러섰다. 그 중심에서 유민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긴 축언을 읊기 시작했다.

그녀의 온몸에서 은은한 빛의 기류가 흘러나오고, 이윽고 머리 위에 백마법사 특유의 현상, 천사의 고리를 연상케 하는 님버스(Nimbus)가 나타났다.

유민의 몸에서 흘러나온 빛이 천천히 확장되어 모두를 포근하게 감쌌다. 그 순간 자이안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렬한 힘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

강화율 3배? 적어도 자이안의 체감은 그보다 훨씬 대단했다. 이만한 힘이라면, 폭식을 또 놓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

“아윽…….”

모두에게 축복을 내린 유민이 흐린 신음 소리와 함께 그대로 쓰러질 듯 자세를 무너뜨렸다. 아르스와 유리아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괘, 괜찮아요. 한 번에 너무 많은 힘을 써서 잠깐 지친 것뿐이에요.”

“됐으니까, 유민이 넌 어서 본진으로 돌아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어.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유민은 몽롱한 눈으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완벽히 마쳤다. 이제 일의 성공은 남은 이들에게 달렸다.

“나와 케이, 아르스가 여기 남는다. 나머진 모조리 폭식을 잡으러 간다. 이의 있는 사람?”

타당한 인선이었다. 산맥 너머에서 끝도 없이 쏟아지는 마물을 막으려면 광범위한 섬멸 능력이 가장 중요했다. 그렇지 못한 이를 굳이 이쪽에 남겨놓고 어설프게 써먹느니 모조리 폭식을 막기 위해 보내는 게 나았다.

“아 참, 신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급하니까 짧게 말하게.”

“이 산맥 말이다. 고도를 좀 깎아 내거나, 아니면 좀 없애버리거나, 그래도 별로 상관없냐?”

“…….”

잠시 말문이 막힌 신스가 잠시 뒤 허탈하게 웃었다.

“적당히 하고 자제하게나.”
 

* * *

폭식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멀리 세계수가 보이는 평원을 가로질렀다.

자이안과 크룩스, 신스를 상대로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솔직히 간담이 서늘했다. 나태에게 기생한 동안 살펴본 결과, 그들을 상대로 이기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요원한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나태를 성공적으로 먹어치우면서 순간적으로 본래의 2배가 넘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덕분에 끈질기게 시간을 끌면서 그들을 기만하는 데 성공했다.

온몸에 자리 잡은 여러 개의 심장은 적을 속이기 위한 가짜 약점이었다. 식탐에게 있어서의 심장은 바로 이빨. 죽음을 위장하고 도망치기 직전까지 그들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래도 입맛이 좀 쓰군. 모처럼 나태를 먹어치우고 생긴 힘이 전부 바닥났어.’

일련의 기만을 통해 노린 것은 바로 적 전력의 분단, 그리고 시간 끌기였다. 그들은 분명 터무니없는 힘을 가졌으나 완전무결한 초인 집단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마물을 보내 전황이 늘어지면,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침투조를 따로 만들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게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자이안 일행이 둘로 분단되면, 마물의 군대를 조종해 양쪽에게 있어 가장 취약한 상황을 만들어낼 생각이었다. 그러면 확실하게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한 가지 변수는 나태가 산맥 너머 침투조에 동참했던 것. 폭식은 계획을 망치지 않기 위해 그들의 눈앞에서 본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마물을 조종하려면 본모습이 아니면 안 됐으니까.

‘운도 좀 따라줬지. 두 번은 못 할 짓이다. 두 번씩이나 할 이유도 없지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세계수의 거대함이 피부에 와 닿았다. 평범한 이라면 경외감이나 두려움을 느낄 테지만 폭식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뒤틀린 비웃음이었다.

그게 나태의 작품인 이상, 폭식은 그 어떤 고도의 산물이거나 뛰어난 예술품일지라도 얼마든지 비웃음을 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폭식이 땅바닥에 시커먼 진흙 덩어리들을 토했다. 바닥에 흩어져 부글거리던 진흙이 이윽고 불쑥 솟아나더니 마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폭식의 힘은 기본적으로 섭식에서 비롯된다. 기본적으로는 먹어치운 존재가 그대로 그의 힘이 될 뿐이지만, 필요하다면 이렇게 다시 토해낼 수도 있다.

세계수에 가까워질수록 마물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가 지척에 다다랐을 즈음엔, 군단이라고 표현해도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마물들은 만약을 위한 호위이며, 동시에 탐지기였다. 그가 세계수 내부를 파괴하느라 바깥에 신경을 쓰지 못해도, 마물들이 이상을 감지하면 그 감각이 직접 전해진다.

“좋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군.”

-그러게요.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네요.

“……뭐라고?”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렸다. 폭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상해 보이는 건 없었다. 환청을 들었나? 잔뜩 움츠리고 주변을 경계하던 폭식은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폭식. 설마 잊어버렸어요?

“……!”

환청이 아니었다.

-저는 생명공학자이면서, 동시에 영혼 공학자이기도 했잖아요?

그 목소리는 폭식의 내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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