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기만(1)
(118/210)
118화 기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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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기만(1)
2023.01.29.
크룩스와 자이안이 한 차례 시선을 교환했다. 갑자기 저 남자가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나태는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한 건 차고 넘치게 많았다. 그러나 당장 중요한 건 하나뿐이었다.
저 남자는 적이다. 일이 꼬이기 전에 여기서 쓰러뜨려야 한다.
-제가 놈을 구속할게요. 자이안이 목을 베세요. 스펙트럼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크룩스가 달려 나갔다. 정작 상대는 바닥에 널브러진 나태의 시신을 걷어차며 혼자 지껄이느라 이쪽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절호의 기회다. 자이안과 크룩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일어난 일은 자이안의 눈으론 제대로 쫓기도 힘들 정도로 빨랐다. 크룩스와 남자 사이에서 투박한 타격음이 연달아 터지고, 이윽고 서로의 팔을 붙잡으며 팽팽하게 힘겨룸을 시작했다.
“제법 강하구만. 다른 차원의 인간.”
남자가 상어의 그것처럼 삐죽삐죽한 이빨을 훤히 드러내며 섬뜩하게 웃었다. 크룩스는 침묵으로 대응했다. 대신 내력을 정제하며 남자를 조금씩 힘으로 밀어붙였다. 남자가 재밌는 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태평하게 눈을 치켜떴다.
“굉장한데. 이게 너희 같은 열등하고 불완전한 생명체가 가져도 괜찮은 힘인가? 탐나네. 맛있겠어.”
히죽 웃은 남자가 입을 쩍 벌렸다. 그 순간, 크룩스의 등 뒤편에서 교묘하게 모습을 숨기고 있던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고쳐 쥐며 달렸다. 허를 찌르는 완벽한 기습이라고 자부했다.
오로라에 휩싸인 스펙트럼이 남자의 목을 노리고 횡으로 휘둘러졌다. 그리고, 카앙! 남자가 이빨로 칼날을 물어 그 공격을 막았다.
“퉷. 이런 젠장. 그 검은 뭐냐? 맛이 아주 고약한데.”
칼날을 뱉어낸 남자가 캑캑거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자이안은 그 말을 무시하고 잠시 거리를 벌렸다. 크룩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무수히 많은 전장을 거쳤지만, 자신과 힘겨루기를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건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자네가 폭식인가?”
호랑이의 머리 위에서 내려온 신스가 짐짓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자이안은 그 안에 잠든 활화산 같은 분노를 느끼고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 신스는 자이안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격렬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오! 눈치 빠른 게 그래도 없지는 않구만! 그래. 내가 바로 폭식이다!”
남자가 과장되게 두 팔을 벌리며 자랑스럽게 스스로를 밝혔다.
“하. 내가 지금까지 나태 저놈 몸속에 기생한 채 숨어 지내느라 얼마나 답답했는지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할 거다. 뭐, 덕분에 이렇게 완벽하게 계획이 성공하게 됐지만 말이야. 나태 저 멍청이는 죽는 순간까지 자기 혼자서 내 계획을 알아차렸다고 생각했겠지. 내가 저놈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 봤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는 상상은 하지도 못하고!”
남자, 폭식의 말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했다. 나태는 폭식이 복잡한 전술은 사용하지 않고 정면으로 쳐들어올 거라고 말했지만, 그 전제는 처음부터 잘못돼 있었다.
이쪽 차원으로 도망치기도 전부터, 나태는 이미 폭식에게 속고 있었던 것이다.
“나태의 계획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고요? 어째서죠?”
“아? 그거야 물론 놈이 방심한 순간을 노려 깔끔하게 먹어치우기 위해서지! 덕분에 심장은 물론이고 가장 맛있는 내장 부위까지 모조리 먹어치울 수 있었으니, 저놈의 멍청함에 고마워해야 하나? 캇하하하!”
“이거 제가 오해를 하고 있었군요. 당신, 머리가 꽤 좋은데요?”
“무슨 당연한 소릴 하고 있냐? 동족들 중에서 나만큼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은 없어!”
“그렇다면 이 침공도 당신 혼자 계획하고 나선 거군요?”
“당연하지! 내가 왜 다른 놈들의 힘을 빌려서 내 공을 나눠야 돼?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질문 하나를 던질 때마다 묻지도 않은 얘기까지 술술 꺼내는 그 모습에 세 사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미묘한 기분이었다. 특히 신스는 저런 생각 없는 놈에게 나태가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차마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된 거군요.”
들을 만한 정보는 모두 들었다고 판단한 크룩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두 주먹을 맞부딪쳤다.
“안타깝지만, 당신은 운이 나빴네요.”
“아? 뭔 소리야 그게?”
“당신은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고 죽을 겁니다.”
크룩스가 제자리에서 정권을 내질렀다. 크룩스의 유일한 원거리 공격기, 백보신권이 폭식의 배를 후려쳤다. 그의 몸이 주르륵 밀려난 순간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고쳐 쥐며 내달렸다.
“이런 염병할?!”
혼란스러워하며 욕설을 터뜨린 폭식이 가까스로 자이안의 공격에 반응했다. 목을 베려던 참격은 놈의 손목을 잘라내는 데 그쳤다.
허공에 떠오른 자기 손을 급히 붙잡은 폭식이 그것을 우악스럽게 먹어치웠다. 그러자 절단된 부위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잠깐 비켜 보거라, 자이안. 도무지 화풀이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구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이 땅이 흔들리더니 신스의 등 뒤로 키만 1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곰이 땅속에서 솟아나 몸을 일으켰다. 폭식이 얼빠진 얼굴로 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곰이 앞발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흙먼지가 솟구치며 문자 그대로 지축이 뒤흔들렸다. 그러나 자이안도, 크룩스도 방심하지 않았다. 머리가 좀 나빠 보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크룩스와 힘겨루기가 가능할 만큼 괴력을 가진 놈이었다.
이대로 쓰러뜨릴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짓이야!”
“말했을 텐데요. 당신은 이 자리에서 죽을 거라고.”
두 팔로 곰의 앞발을 간신히 막아낸 폭식에게 크룩스가 지체 없이 접근했다. 그대로 심장을 터뜨리려 내질러진 그의 정권을, 폭식은 어처구니없게도 이빨로 막아냈다.
그러고는 그대로 크룩스의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뼈와 살점이 뭉텅이로 뜯겨 나가며 피가 솟구쳤다.
“윽……! 이건!”
크룩스가 내력을 순환시켜 급히 상처를 지혈하며 신음을 터뜨렸다. 부끄럽게도, 폭식이 보여준 멍청한 모습 때문에 방심하고 말았다.
상대는 썩어도 마족이었고, 그 이빨은 스펙트럼의 칼날마저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을 만큼 단단했다. 게다가 내력으로 강화되어 어지간한 마물의 공격으로는 생채기도 나지 않는 크룩스의 피부를 우습게 찢어발길 만큼 날카롭다.
-자이안. 이빨을 조심해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자이안이 거리를 벌린 크룩스와 교체하듯 튀어 나갔다. 스펙트럼이 3미터가 넘는 거검으로 변하며 칼날을 중심으로 오로라가 넘실거렸다.
거리를 두고 후려치듯 휘두르자, 오로라가 먼저 뻗어 나가 놈의 힘을 거머리처럼 빨아들였다. 눈에 띄게 움직임이 느려진 폭식은 제대로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망이에 얻어맞은 공처럼 맥없이 퉁겨져 날아갔다.
“빌어먹을! 더럽게 아프네!”
멀리 날아가 마물 군단 한복판에 처박힌 폭식이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근처의 마물 하나를 아무렇게나 붙잡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뱃가죽이 절반 이상 갈라져 너덜너덜하던 폭식의 몸이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뭘 먹을 틈을 주면 안 되겠네요. 제가 붙어서 놈의 행동을 제한할 테니, 자이안이 다시 한번 목이나 심장을 노리세요.
-크룩스, 굳이 상성도 안 좋은 자네가 나설 필요 없네. 내가 놈을 묶도록 하지.
그러나 전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었다. 폭식이 무작정 산맥을 향해 달려 나가던 마물들을 조종해 그 물량을 직접 자이안 쪽에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마물들을 상대하는 데에 시간을 너무 할애했다가는 놈이 다른 마물을 먹어치우며 스스로를 강화하거나, 아니면 이대로 세계수를 향해 달아날지도 몰랐다.
-저놈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뒤쫓는 게 먼저겠군.
군세에는 군세로. 신스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산맥 너머 척박한 땅이 뒤흔들리더니 땅속에서 무수한 수의 동물들이 솟아났다.
많은 수의 동물들을 제어하느라 당장 폭식을 완벽히 구속할 만큼의 여력이 남지는 않았으나, 이대로 눈 뜬 채로 놓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동물의 군세가 마물의 군세를 막아내며 폭식에게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다.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달렸다. 길 끄트머리, 닥치는 대로 마물들을 먹어치우며 힘을 모으던 폭식이 화들짝 놀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끝까지 구질구질한 놈이구먼.
신스가 혀를 차고, 자이안과 크룩스가 속도를 높였다. 폭식은 필사적으로 도망쳤으나 그래도 거리는 금방 좁혀졌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크룩스가 백보신권을 내질렀다.
동시에 자이안이 왼손에 번개를 휘감고 프레이에게 배운 번개의 사슬을 휘둘렀다. 백보신권에 등짝을 얻어맞아 고꾸라진 폭식이 번개의 사슬에 발목을 잡혀 속절없이 끌려왔다.
“제기랄. 이거 놔! 놓으라니까!”
셋 중 누구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스가 잠시 멈춰 서서 지면에 손을 가져다 대자, 말라붙은 진흙이 치솟아 폭식의 팔다리를 형틀에 묶인 죄인처럼 단단히 구속했다.
“이, 이러지 마. 내겐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렇다고 저희가 뻔히 다 같이 죽을 걸 알면서 당신을 놔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포기하고 운명을 받아들이세요.”
크룩스가 정권을 내지르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동시에 자이안이 칼끝을 그의 심장에 겨눴다.
그의 심장은 하나가 아니라 총 다섯 개가 몸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으나, 자이안의 단련된 감각은 그 모든 위치를 아무 어려움 없이 파악했다.
그리고 둘의 뒤에서 신스는 싸늘한 눈으로 폭식을 노려보았다.
“이런 제기랄.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다고! 세계수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찬탈자께 이 땅을 바칠 날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는데에에!”
폭식은 마지막까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단말마라 하기에도 유치한 그 말을 흘려들으며 크룩스가 정권을 질렀다. 그리고 자이안이 그의 몸 곳곳에 숨은 다섯 개의 심장을 단번에 베는 궤도로 스펙트럼을 휘둘렀다.
머리가 흔적도 없이 으깨지고 온몸이 산산이 조각난 폭식의 시체가 힘없이 바닥에 쏟아졌다.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건 이빨뿐이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네요.”
자이안은 가장 큰 원흉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코끝에 짙게 느껴지던 마족의 냄새가 무산되어 그대로 사라지는 듯했다.
“멍청한 놈들! 또 내게 속았구나! 캇하하하!”
완전히 흩어졌던 마족의 냄새가 다시 느껴졌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이빨이 지면을 파헤치고는 삽시간에 땅속으로 숨어 사라졌다. 셋 중 어느 누구도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사고가 완전히 얼어붙어 있던 자이안이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마족의 냄새가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도무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이안이 크룩스와 신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둘 역시 그와 비슷한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먼 곳에서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잠잠하던 하늘이 불온하게 꿈틀거리며 눈보라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초대형 마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균열을 타고 나타난 초대형 마물들이 사방에서 그들을 포위하듯 다가오고 있었다. 산맥으로 향하던 마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을 잃고 무조건 앞으로 내달리기만 하던 지금까지의 모습이 거짓말이었다는 양, 그 자리에서 방향을 틀어 세 사람에게 몰려왔다.
“……저희가 완전히 속았네요, 이거.”
크룩스가 눈을 지그시 감고는 씹어뱉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