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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전면전(2) (117/210)


117화 전면전(2)
2023.01.28.


-정신 꽉 붙잡아라!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휩쓸린다!

프레이가 거세게 충고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케이의 몸이 거대한 성룡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둘을 뒤따르듯 크룩스가 선두에 나섰다. 정자세로 깊게 심호흡을 한 그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발을 가볍게 굴렀다. 전위 포지션의 알파이자 오메가, 도발. 그가 특성의 한계를 극복해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거리 MP 방출 기술이었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MP의 파동이 지면을 타고 고요하게 뻗어 나갔다. 쏟아져 내려오던 마물들이 짧은 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직후, 광기에 찬 고성과 살의로 번들거리는 무수한 눈동자가 크룩스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

프레이가 내던진 소형 태양과 케이가 내뿜은 고열의 숨결이 그 위를 사정없이 덮쳤다. 마물들은 불타 사라지고 재가 되어 쓰러지면서도 완전히 이성을 잃고 오직 크룩스 하나만을 향해 내달렸다.

-아저씨! 비행 마물!

유민의 날카로운 외침에 프레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케이의 거대한 몸이 그의 곁을 스치며 바람과 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비행 마물 두 마리를 앞다리로 붙잡은 케이가 한 마리를 입으로 씹어 찢어발기고 나머지 하나는 악력으로 그대로 으깨 죽였다.

그러나 두 마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를 이어 비행 마물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육상 마물에 비해 수가 적기는 했으나, 비행 마물 역시 객관적으로는 상당한 숫자였다.

-자이안, 잠깐 전방으로 가서 크룩스의 부담을 덜어줘. 프레이, 넌 지상에 화력을 집중해. 케이, 네가 공중을 맡아.

도발로 육상 마물들의 주의를 모조리 끌어모은 크룩스가 우직하게 놈들을 때려눕히고 있었으나, 압도적이기까지 한 물량에 조금씩 밀렸다.

강철 같은 육체는 무수한 수의 마물을 상대로 조금의 상처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순수하게 질량에서 밀렸다.

변으로 빠져나가는 마물들을 정리하던 자이안이 즉시 크룩스에게 향했다. 자이안이 이탈한 빈자리를 프레이의 마법 폭격과 아르스의 화력 투사가 대신 채웠다.

-으웩! 이것들 엄청 맛없어!

쉴 새 없이 날아오는 마물들을 꼬리로 후려쳐 날려버리고, 손으로 찢어발기고, 입으로 물어 부수며 케이가 불평을 터뜨렸다. 결국 그는 육탄전을 포기하고 숨결을 뿜기 위해 공중에 멈춰 서서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순간을 노리기라도 한 듯 마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의 안구와 눈꺼풀 따위에 달라붙었다. 몸서리를 치며 마물들을 떨쳐낸 케이는 결국 육탄전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참아, 케이. 유민아, 케이한테 축복.

-알았어요!

빠르게 축언을 읊은 유민이 손을 내밀자 케이의 등허리 부근에 하얗게 불타는 성흔이 새겨졌다. 안 그래도 거대했던 케이의 몸이 한순간 더욱 거대하게 부풀었다.

날갯짓만으로 마물들을 멀리 날려 보낸 케이가 다시 한번 숨을 끌어 모았다. 다음 순간, 고열로 달아오른 산성 가스가 마물들을 휩쓸었다. 온몸이 녹아내린 마물들이 고통스럽게 버둥거리며 추락했다.

-자이안, 다시 요격으로 돌아. 가능하면 범위공격을 부탁할게. 프레이, 케이, 비행 마물은 얼추 섬멸한 것 같으니 더 깊이 들어가 봐.

범위공격이라는 지시에 자이안이 마법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프레이에 비하면 협소한 수준이었으나, 자이안의 검술과 합쳐지자 안 그래도 파죽지세였던 섬멸 속도가 더 올랐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물이 쏟아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사실이었다.

-전선을 아주 살짝 물려야겠어. 이대로는 수비대가 화력을 투사하기 어려워. 고도 50미터 정도만 더 내려가자.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한창 숫자를 줄여나가던 프레이와 케이가 먼저 뒤로 빠졌다. 자이안 역시 전황을 살피며 조금씩 물러났다. 가장 선두에 선 크룩스만이 우직하게 그 자리에서 버텼다.

“음!”

쏟아지는 공격을 그대로 온몸으로 맞으며, 그 자리에서 오우거 하나를 맨손으로 찢어발겨 두 쪽으로 만든 크룩스가 마지막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냥 물러나지는 않았다. 자세를 낮춘 크룩스가 두 팔을 넓게 펼쳐 지면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지반을 통째로 뜯어내 내던졌다.

그 위에 올라타 있던 마물들이 맥없이 하늘을 날고, 멀리 던져진 지반이 굉음을 내며 마물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그제야 크룩스는 만족한 표정으로 빠르게 산비탈을 내려갔다.

쾅! 콰광! 뒤쪽에서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기회를 엿보던 수비대가 마침내 화력을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사정없이 날아간 포탄과 미사일들이 해일처럼 몰려들던 마물들의 허리를 완전히 끊어놓았다.

-조금 뒤 몇 분간 화력 공백이 생길 걸세. 그때는 다시 부탁하겠네.

신스의 텔레파시가 전해지고 얼마 뒤 거짓말처럼 폭음이 잠잠해졌다. 잠시 물러서서 힘을 비축하고 있던 자이안 일행이 나섰다. 그들 사이로 신스가 소리도 없이 가볍게 착지했다.

“자네들에게만 맡기려니 좀 미안하더라고. 이제부턴 나도 힘 좀 보태겠네.”

“그러냐. 마물이랑 착각해서 케이 공격하고 그러지만 마라.”

“으응? 그게 무슨…… 허어. 세상에. 용이로군? 내 살아생전에 용을 이 두 눈으로 보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다시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졌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마물을 크룩스가 쉴 새 없이 도발하며 한 곳으로 끌어모았다.

그 위에 프레이가 마법을 쏟아붓고, 다시 날아들기 시작한 비행 마물을 케이가 육탄전과 숨결을 섞어 빈틈없이 틀어막았다.

지상의 전투는 공중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원초적이고 격렬했다.

온몸에 중소형 마물을 덕지덕지 매단 채 크룩스가 정권 하나에 정직하게 마물 한 마리를 터뜨리는 동안, 자이안은 그의 곁에서 최대한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둘렀다.

전신이 마물의 피로 흠뻑 젖었고, 몸에서 피어나는 헤일로가 그 피를 증발시키며 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신스는 끊임없이 대지를 조종하며 적들의 전선을 강제적으로 묶어둔 채 거대한 동물들을 부려 마물들의 수를 줄여나갔다.

유리아와 소아레스 역시 아르스의 주의가 잘 미치지 않는 외곽을 계속해서 순회하며 통신기로 그녀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그렇게 취합한 정보를 정리해 아르스는 쉼 없이 일행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전투는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 * *

“……젠장. 이거 하루 이틀 안에는 안 끝나겠는데.”

달빛조차 비추지 않는 심야. 수비대가 화력을 퍼붓는 동안 잠시 후퇴한 프레이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없지는 않았다. 밤이 깊어지며 산맥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던 중소형 마물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반대로 안 좋은 소식도 있었다. 그렇게 중소형 마물이 열 마리 빠져나가면, 고작 그런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귀찮은 대형 이상의 마물이 그 자리를 채웠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이건 게이트 재해가 아냐. 이 악물고 버티면 언젠가 게이트가 닫히고 마물들이 그만 쏟아지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그 말은…… 차라리 적의 본진에 직접 쳐들어가겠단 소리예요, 형?”

온몸이 마물의 피로 푹 젖은 크룩스가 팔짱을 끼며 반문했다. 프레이는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크지 않을까요, 아저씨?”

“이대로 지키기만 해서는 천천히 말라 죽는다. 난 도박이라도 하는 게 낫다고 본다.”

“난 찬성일세.”

의외로 신스가 가장 먼저 프레이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었다.

“폭식의 노림수가 이런 식으로 우리가 지쳐서 말라붙기를 기다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이쪽에서 먼저 날카롭게 허를 찌르는 게 좋지 않겠나?”

“으음…… 나도 찬성.”

아르스가 두 번째로 찬성했다. 이를 기점으로 모두의 의견이 찬성으로 기울었다. 유일하게 기권한 건 케이였으나 애초에 그는 어느 쪽이든 신경 쓰지 않고 따르겠다는 태도에 가까웠다.

“그런 거라면 저도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신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나태가 호위 한 명 없이 절뚝거리며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모자란 관리자야. 지금 네가 우릴 따라온다고 무슨 보탬이 된다는 게냐?”

“전 폭식의 능력이 뭔지, 그걸 어떤 방식으로 쓰는지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도움이 안 되진 않을걸요?”

깔끔한 정론에 신스의 말문이 막혔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프레이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해라. 뭐라도 도움이 되면 감지덕지지.”

신스가 재차 반론하려 했으나, 나태와 눈이 마주치고는 결국 힘없이 한숨만 뱉었다. 각오가 깃든 눈이었다. 어쭙잖은 말로는 결코 꺾을 수 없으리라.

“어차피 전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목숨이었어요. 이런 데서 폭식을 막다가 죽는다고 해도 딱히 아까울 건 없죠.”

“……부탁이니 그런 안타까운 말은 하지 말거라, 모자란 관리자야.”

“이런. 미안해요. 내가 또 입이 방정이네.”

잠시 뒤 폭격이 그치고, 다시 각성자들이 나섰다. 낮부터 시작해서 셀 수도 없이 반복된 광경. 그러나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케이와 프레이, 아르스와 유민이 적들을 틀어막는 데 주력했고 나머지는 신스가 만들어낸 거대한 호랑이 위에 올라타 전속력으로 산맥을 거슬러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능선을 넘었다.

산맥 반대편의 모습이 드러났다. 낮에 유리아가 했던 말은 결코 과장도 착각도 아니었다. 정말로 그 깊은 계곡을 마물들의 시체가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비행능력이 없는 마물들은 그렇게 계곡 틈에 쌓인 시체를 짓밟고 넘어오고 있었다.

“자이안, 한눈팔지 말거라. 우리가 지체하면 뒤에서 버티고 있는 이들이 위험해진다.”

“읏…… 알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자이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가 마물의 바다를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때때로 날아드는 공격은 대부분 무시했다. 위험하다 싶은 건 크룩스와 자이안, 신스가 나서서 튕겨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릴 무렵, 신스가 위화감에 인상을 썼다.

“뭔가…… 이상하군.”

깊이 파고들수록 적들의 밀도가 더 높아질 거라 생각했다. 대장이 후미에 있다면 대장을 지키는 것들이 있는 게 당연하니까. 그러나 반대였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적들의 밀도는 점점 더 적어졌다. 여기까지 오면서 폭식이 있을 법한 장소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다른 방향으로 한 번 가보죠, 스승님. 저희가 미처 못 찾고 지나친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

갑자기, 신스의 얼굴에 핏방울이 튀었다.

자이안과 크룩스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나태의 뱃가죽을 찢어발기며 튀어나온 피투성이 손이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자이안이 그 손을 근원부터 베어낼 각오로 스펙트럼을 휘두르자, 허공을 휘적거리던 손은 거짓말처럼 정확하게 스펙트럼의 칼날을 붙잡았다.

“자이안!”

그와 교체하듯 크룩스가 돌진했다. 그러나 그가 주먹을 내지르는 것보다 한발 먼저, 상완까지 완전히 튀어나온 팔이 바닥을 짚고 그대로 훌쩍 아래로 몸을 날렸다.

“크…… 커헉……!”

나태가 피를 토하며 배에서 튀어나온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 순간, 이번에는 그의 가슴을 뚫고 반대쪽 팔이 튀어나왔다. 나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캇하하하.”

광기와 살의에 가득 찬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견디지 못한 나태의 몸이 좌우로 처참하게 찢어졌다.

“캇하하하하핫! 멍청한 놈! 내가 네 어설픈 계획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거냐!”

나태의 시체가 힘없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서, ‘그것’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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