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전면전(1)
(116/210)
116화 전면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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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전면전(1)
2023.01.27.
“자이……! 크흠, 흠. 휴, 휴먼. 요구대로 북부산맥 수비대장을 데려왔다.”
차에서 내린 에일레나가 크게 손을 흔들려다가 눈치를 보더니 어색하게 말을 고쳤다. 이어서 뒷좌석에서 일전에도 한 번 본 수비대장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내렸다.
일행들을 한 번 슥 돌아보고는, 신스의 모습을 확인하고 재빠르게 경례. 신스는 그냥 손만 휘휘 저었다.
“어머니께서 저를 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8호. 아니, 북부산맥 수비대장 테필로스. 지금 시간부로 네 직위를 해제하고, 그 역할을 에일레나에게 위임하겠네.”
“……정당한 사유를 듣고 싶습니다, 어머니.”
수비대장의 표정이 동요로 흐트러졌다. 신스를 팔짱을 끼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유사시에 도시의 모든 인사임명권을 재량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네. 이는 전시 교범에도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그러니 이 인사이동은 정당하네.”
폭거도 이런 폭거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수비대장은, 아니,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비대장이었던 테필로스는 오랜 침묵 끝에 그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수, 수비대장이요? 제가 왜요?”
정작 다음 대 수비대장으로 임명된 에일레나는 꿈이라도 꾸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신스가 그녀에게 다가가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축하하네, 신임 수비대장 에일레나. 자네에게 걸린 기대가 아주 막중하다네.”
“네? 아니…… 네?”
“테필로스, 자네는 그만 돌아가봐도 괜찮네.”
꾸벅 묵례한 테필로스가 차를 타고 그대로 되돌아갔다. 도무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꽉 막힌 엘프들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편했다.
규칙대로만 행동하면 그 결과가 아무리 불합리해도 이유를 따지지도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으니까.
“미안해요, 에일레나. 너무 갑작스러웠죠?”
“자이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흠흠. 그건 제가 설명해도 괜찮을까요? 엘프라는 종족을 보는 건 처음이라서, 한 번 직접 얘기를 나누고 싶었거든요.”
이번에는 나태가 나섰다. 에일레나는 그제야 일행들 사이에 한 번도 못 본 이상한 남자기 끼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모자란 놈이기는 하지만 나쁜 놈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가서 이야기를 듣게나.”
나태와 에일레나가 잠시 따로 떨어졌다. 그 사이 일행은 폭식을 막기 위한 본격적인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폭식이 언제 침공할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가까스로 마족의 감시를 벗어난 나태는 폭식의 계획을 정탐할 여유도 없이 남은 힘을 모조리 쥐어짜 간신히 차원을 넘었다.
그가 자이안의 눈앞에서 배가 고프다며 쓰러진 이유였다.
“폭식은 마족 중에서도 가장 많은 마물 군단을 거느리고 있어요. 마물을 아예 부리지 않거나, 어디까지나 무가치한 소모품으로만 여기는 다른 마족과는 전혀 다른 태도죠. 물론 폭식도 엄밀히 따지면 마물을 소모품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건 병력으로서의 소모품이라는 의미에요.”
일전에 들은 나태의 말에 따르면, 폭식의 침공은 어마어마한 수의 마물의 군세를 동반하리라 예측됐다.
자이안 일행을 비롯한 소수정예 체제로는 압도적인 물량 앞에 휩쓸릴 가능성이 높았다. 제대로 된 수비 병력을 준비해야 했다.
적의 침공이 한참 나중일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일 수도 있다. 때문에 다소 강압적으로 급박하게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규칙을 맹신하지 않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지휘관이 필요했다. 설령 전임자보다 일을 더 못해도 상관없었다. 때문에 에일레나가 차기 수비대장으로 선정됐다.
“마족은 대륙 곳곳에 아직 남아있는 균열 말고도, 자력으로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서 넘어올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 어마어마한 힘을 소모해야 하죠. 어차피 침식의 목표는 세계수니까, 십중팔구는 북쪽 산맥 너머의 균열을 타고 넘어올 겁니다.”
에일레나와 얘기를 마친 나태가 자연스럽게 토의에 합류했다. 뒤따라온 에일레나는 아직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된 듯 멍한 표정이었다.
“침식도 이미 당신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당신에게서 정보가 새어나갔으리라고 판단하고 변칙전술을 섞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 친구는 복잡한 전술을 안 좋아해요. 어차피 물량으로 압도할 거라고 자신하고 있으니까, 그냥 정면으로 쳐들어올 겁니다.”
일행 중 폭식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가 나태였다. 좋든 싫든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제대로 포지션을 짜야겠구만. 지금까지처럼 두루뭉술하게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행동할 게 아니라.”
비대칭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자이안과 케이, 그리고 네 각성자들도 나름의 방책을 짜기 시작했다.
“크룩스. 전위고, 탱커다. 마물을 죽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놈들의 의식을 잡아끄는 데에 집중해라.”
“항상 하던 거네요. 맡겨주세요.”
“최유민. 후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고 아군의 보조에 집중해라. 너무 우리만 신경 쓰지 말고, 엘프 수비대 병력도 확실하게 챙겨.”
“알았어요.”
“아르스. 네가 관제탑이다. 놈들의 수를 줄이기보다는, 전반적인 전황을 읽으면서 가장 시기적절한 지시를 내려. 하는 김에 최유민의 호위도 맡긴다.”
“흐흥. 나만 믿으라구.”
“케이와 난 공중에서 난 광역 섬멸을 맡으마.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레이는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자이안. 넌 전천후다. 그때그때 네 판단에 따라, 혹은 아르스의 지시를 듣고 그 순간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현역 시절, 나이아가 주로 맡았던 역할이다.”
자이안이 작게 숨을 삼켰다. 이어 그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언제 실전이 시작될지는 모르지만 각자 자기 포지션 잊지 마라. 훈련 때도 연습 좀 해 보고.”
“프레이. 유리아랑 소아레스는 어떡하게?”
프레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말하면, 두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전장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바로 전에 거친 산맥 너머의 전투도 둘에게는 가혹했을 텐데, 이번에는 그보다 더한 격전이 될 것이 확정적이었으니까.
그렇다고 그만한 병력을 마냥 놀게 두는 것도 아까운 일이었다. 턱을 매만지며 고민한 프레이가 마침내 결론을 냈다.
“그 둘은 척후를 맡기지. 가급적 전면전은 피하고, 전황 파악과 정보 수집을 우선하는 걸로 하자.”
* * *
시간이 더 지나자, 자이안 일행이 머무른 성은 물론이고 엘프들의 도시도 불온한 분위기 속에서 서서히 부산스러워졌다.
아르스와 에일레나가 도시를 드나들며 상황을 전하고 대비를 재촉한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엘프들의 도시로부터 자주포와 미사일 포대 등 다종다양한 화력 병기가 북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선두에는 일전에 자이안을 불러 엉뚱한 소리나 하며 속을 긁어댄 장로들이 앞장서고 있었다. 극히 일부의 어린아이, 그리고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한 최소한의 인력을 제외하고 모두가 참전한 기나긴 행군이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말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프레이가 지나가듯 말했다.
“너희 군대에는 왜 전투기가 없냐? 제공권 확보는 현대전의 기본이자 핵심 아닌가?”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적과 전쟁을 하려는 거라면, 자네의 말이 맞겠지. 허나 우리의 적은 마물이라네.”
신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자네도 일전에 보지 않았나? 산맥 너머에서는 말 그대로 마물들이 끝도 없이 쏟아진다네. 제아무리 열심히 청소하고 솎아내고 기어코 산맥을 넘어오는 것들이 나타날 정도지. 고공에서 안전하게 마물들을 폭격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매력적이네만…… 우린 득보다 실이 크다고 생각했네.”
프레이가 잘 이해하지 못한 듯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전투기, 폭격기에 탑재할 수 있는 화기량에는 한계가 명확하네. 그걸 모두 쏟아내고 나면 남는 건 근거리에서나 타격이 통하는 기총 정도지. 그나마 덩치가 좀 커다란 놈들에겐 제대로 먹히지도 않는다네. 게다가 보급을 하려면 번거롭게 착지했다가 다시 이륙해야 하고,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조종사가 탑승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지.”
엘프의 가장 큰 약점은 개체수가 적다는 점이었다. 종족 자체의 어쩔 수 없는 결함이었다. 안 그래도 번식률이 낮은 종족인데 그놈의 뇌수술 때문에 애를 가지려는 생각도 잘 안 했다.
대신 하나하나의 수명이 길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다연장 미사일 포대처럼 지상에서 바로바로 보급ㅍ받을 수 있으면서 한 번에 대량의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 병기에 집중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전에 자동주행 버스는 봤는데, 그게 아직 전투기에 탑재되지는 않은 모양이구만.”
“개량은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네. 하지만 당장으로선 요원한 일이지. 실탄 병기 대신 보급에서 크게 자유로워지는 에너지 병기를 개발하는 방안 역시 당장은 명확한 성과가 없어. 안타깝게도 내 전문분야는 생명공학이거든.”
“……어려운 상황이구만.”
“어려운 상황이라네.”
엘프의 군대가 산맥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에 멈춰 저지선을 펼쳤다. 선두에 선 에일레나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으나,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제 할 일을 다 하는 셈이었다.
신스나 다른 이들의 지시를 규칙 운운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집어삼키는 것. 그것이 에일레나의 역할이었으니까.
“마물들이…… 술렁이고 있네요.”
앙상하게 맨바닥을 드러낸 산맥 너머로 저번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때에 비하면 다소 옅었으나, 그래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본래 저번처럼 한 번 청소를 하면 최소 서너 달은 얌전해지는 놈들이다. 이번엔 한 달도 채 안 지났는데 요란법석인 걸 보니…… 모자란 관리자의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구나.”
이렇게까지 해놓고 아무 일도 없으면 그것대로 큰일이긴 했다. 그렇다고 예측이 들어맞은 게 환영할 일 역시 아니었다.
당사자인 나태는 전선에 나오지 않고 저지선의 후방에 머물고 있었다. 무리하게 차원을 도약한 여파로 그는 아직도 힘을 회복하지 못한 채였다.
전장에 나오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못했으나, 힘을 잃은 지금도 약한 마물들은 강제로 부릴 수 있으니 도움이 될 거라며 고집을 부렸다.
“자이안! 정찰하고 왔어!”
소아레스와 단둘이 적의 동향을 살피러 나간 유리아가 무사히 돌아왔다. 눈에 문제가 생겼는지 연신 눈을 비비고 있었다.
소아레스도 비슷했다. 날카로운 이명이 귓가에 남아, 불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아우, 눈 아파라. MP가 눈에 보인다는 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네.”
“건너편 상황은 어떠냐?”
“마물이 엄청나게, 진짜 엄청나게 많아요! 그리고 아저씨가 말했던 계곡으로 마물들이 무작정 뛰어내리면서 시체로 계곡을 채우고 있어요.”
“지상의 마물에 비하면 적지만, 하늘을 나는 마물의 모습도 확인했습니다.”
“비행 마물이라고? 골치 아픈 놈들이 왔군.”
비행 마물은 하늘을 자유자재로 이동한다는 특성 탓에 비슷한 힘을 가진 육상 마물에 비해 몇 배나 높은 위험도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각성자들에게 제공권을 빼앗긴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실감시켜 주기도 했다.
“비행 마물은 나와 케이가 요격하지. 너희들은 지상에만 집중해라.”
“알겠습니다. 케이, 괜찮겠어?”
“걱정하지 마, 자이안! 나만 믿고 있으면 아무 문제없을 거야!”
근거 없는 호언장담이었으나 그간 케이가 보여준 힘을 생각하면 충분히 믿음직스러웠다.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전선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자이안을 비롯한 각성자들은 마지막으로 서로를 한 번씩 바라보고 뿔뿔이 흩어져 산 중턱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두두두두…… 산맥 너머로부터 희미한 땅 울림이 전해졌다. 침착하게 기다리자, 능선 위쪽에 시커먼 그림자가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마물의 무리가 시커먼 파도가 되어 쏟아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