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마족과의 조우(4)
(115/210)
115화 마족과의 조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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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마족과의 조우(4)
2023.01.26.
“폭식은 저희 중에서도 손꼽히는 과격파였습니다. 생전에도 성격이 좀 그런 편이었고, 찬탈자의 손발이 된 뒤로는 비교할 수도 없이 심해졌죠. 덕분에 찬탈자가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아주 열심이었으니까요.”
마계에 있을 때, 나태는 자기 의견은 거의 드러내지 않고 항상 중립이나 소극적 옹호만을 고집했다. 찬탈자에게 먹히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은 꼴을 보지는 못했을 테니.
그러나 폭식은 그런 모습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사건건 나태와 충돌했다. 사소한 걸 가지고도 집요하게 나태를 물고 늘어졌다.
“저와 폭식은 예전부터 사이가 좀 안 좋은 편이긴 했습니다. 그 원한이 다시 태어난 뒤에도 남아 있었던 걸지도 모르죠. 아니면, 그런 성격과는 달리 눈치가 빠른 편이었으니 제가 뭘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고요.”
나태는 최대한 신중하게 스스로를 감췄으나, 결국 폭식의 집요한 공격에 허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사소한 허점에 불과했으나, 다른 마족들이 만장일치로 그를 유폐시키자는 합의를 내리기에는 충분했다.
“제가 마음이 급해지고 말았던 거죠. 찬탈자가 이미 한 번 포기한 저희 고향을, 폭식이 다시 침공해서 그에게 갖다 바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거든요. 대책을 세우려다가 어처구니없게 덜미를 잡혔습니다.”
그가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했으나 조금도 웃을 수 없는 얘기였다.
“찬탈자가 세계를 침공하고 먹어치우는 방식은 생각보다 음습해요. 지구, 라고 했던가요? 여러분의 차원처럼 억지로 문을 열고 마물을 쏟아내는 무식한 수단은 사실 거의 쓰지 않는 편이죠. 아마도 찬탈자가 제 동족을 먹어치우고 마물을 잔뜩 만들어낼 수 있게 되니 흥분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네요.”
“그 괴물 덩어리한테 그런 감정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찬탈자가 다른 차원을 침공하고 먹어치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마나 오염이에요. 마물의 침공, 우연히 열리는 게이트, 모두가 목표로 삼은 차원을 마나에 오염시키기 위한 사전준비죠. 찬탈자는 기본적으로 먹잇감으로 삼은 차원이 마나에 완전히 오염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간섭도 할 수 없거든요. 힘을 소모해서 슬쩍 게이트를 연다거나 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수작을 부리는 게 한계죠.”
선주인류가 바로 그 수법에 당했다. 그들이 우연히 열었다고 생각한 게이트는 찬탈자가 그렇게 되도록 간섭한 결과였다.
“하지만 찬탈자가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죠. 마나를 받아들이고 급속도로 발달한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대규모 마나 정화장치, 세계수.”
선주인류가 고향을 떠나고 세계수가 제 기능을 발휘하자, 마나 오염은 빠른 속도로 정화되었다. 찬탈자 입장에서는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진 심정이었을 것이다.
차선책으로 선주인류의 차원 항행 함선을 마계로 향하도록 유도했고, 아무 소득도 없이 손해만 보는 일만은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세계수가 파괴되면, 찬탈자가 다시 여기를 먹어치울 수 있게 된다는 뜻이군요.”
“정답이에요, 신인류. 그 전에 마나 오염으로 대륙 전체가 다시 죽음의 땅이 되는 게 더 빠를 것 같기는 하지만요. 어느 쪽이 먼저든 결말은 똑같겠죠.”
“자이안이라고 부르세요.”
“아, 미안해요. 제가 다른 사람 얼굴이나 이름 기억하는 게 좀 서툴러서. 찬탈자한테 한 번 먹힌 뒤로는 더 심해지더라고요.”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그냥 흘려 넘길 말이 아니었다. 그 역시도 찬탈자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뜻이니까.
“찬탈자는 한 번 침공을 실패한 차원에 미련을 두지는 않아요. 한 번 사냥에 실패한 먹잇감을 굳이 또 사냥하려고 애를 쓸 게 아니라, 그냥 그것보다 더 쉽고 만만한 다른 사냥감을 찾으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지적 생명체가 살지 않는 크고 작은 차원은 사방에 널려 있거든요. 근데 그렇다고 누가 떠먹여 준다는 걸 거부할 만큼 자존심이 있는 건 아니죠. 폭식이 세계수를 파괴해버리면, 찬탈자는 반드시 여기에 다시 눈독을 들일 겁니다.”
그것은 무거운 경고였다. 나태의 말을 무시하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다른 마족은 몰라도 폭식은 반드시 쓰러뜨려야 했다.
“이거 잔뜩 말했더니 배가 엄청 고프네요.”
갑자기 나태가 진중한 표정을 거짓말처럼 풀었다. 그러고는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기 후식은 언제 나와요?”
“……너 진짜 나태가 아니라 폭식 아니냐?”
프레이의 말은 그 자리의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 * *
깊은 밤. 신스는 세계수 최상층의 자기 집에 잠시 돌아가 청주 한 병을 챙겼다. 다시 성으로 돌아오니, 식당이 있는 층 한쪽 창문에만 불이 비치고 있었다. 신스는 곧장 그리로 올라갔다.
“모자란 관리자야. 술은 좀 즐길 줄 알게 됐느냐?”
식당 한구석에 앉아있던 나태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신스는 주방에 잠시 들어가 술잔을 세 개 챙긴 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잔이 왜 세 개예요?”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면 뭐, 예비용이라 생각하면 그만 아니겠느냐.”
뚜껑을 연 신스가 먼저 나태의 잔에 술을 채우고, 마찬가지도 자기 잔에도 부었다.
“별빛을 그러모아 직접 담근 술이다. 부드러운 목 넘김이 일품인 맛이지. 모자란 관리자의 입맛에도 맞을 거다. 음, 아마도?”
둘이 잔을 들어 가볍게 서로 부딪쳤다. 안주 하나 없는 적적한 대작이었다. 단번에 잔을 들이킨 신스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손에 든 잔을 바라보던 나태 역시 미소와 함께 술을 삼켰다.
“켁! 케헥! 헤흑! 으아, 쓰, 쓰다.”
“…….”
신스의 눈에 감출 수 없는 한심함이 드러났다.
“모자란 관리자야. 그 나이 먹도록 술맛도 모르면 인생 헛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좀 든다만, 네 생각엔 어떠냐?”
“마계엔 제대로 된 음식이 없더라고요. 술을 배울 기회도 당연히 없었죠.”
“그럼 지금이라도 배우거라.”
신스가 다시 각자의 잔에 술을 따랐다. 나태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숨을 참고 술을 쭉 들이켰다.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는 쉽게 넘어갔다. 몸서리를 참는 그를 바라보던 신스는 킥킥 웃으며 두 번째 잔을 비웠다.
“멋진 땅이 됐네요. 예전만큼…… 아니, 예전보다도 더욱.”
“흥. 한 것도 없으면서 생색 부리지 말거라. 다 내가, 나와 동족들이 일궈낸 거다.”
“저도 알아요. 저는, 그냥, 그게…… 고맙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서요.”
“이제 와서? 염치도 없구나. 역시 모자란 관리자에게는 모자란 관리자라는 말이 제격이야.”
“하하. 그 말 계속 들으니까 옛날 생각나네요.”
술잔을 매만지며 나태는 작게 웃었다. 그리움이 섞인 아련한 웃음이었다.
“당신이 저를 기억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흥, 하고 코를 울리며 신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제 아비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식이 어디에 있겠느냐.”
신스는, 가장 첫 번째로 빚어진 하이엘프였다.
당시 세계수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나태는, 이대로는 계획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리라는 불안을 품고 있었다.
시기가 홀로 남아 세계수의 관리를 맡기로 했으나, 반 억지로 떠맡겨진 역할인 데다가 당시에도 정신 상태가 불안정한 그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나태는 자신의 생명 공학 전공을 살려 급히 추가 프로젝트를 발안했다. 하이엘프, 오직 세계수의 관리만을 위해 조정된 인공생명체가 그렇게 탄생했다.
배양액 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처음에는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듯했다. 그러나 갑자기 성장 속도가 급증해 보통 사람의 열 배에 달하는 속도로 10살가량까지 성장한 뒤에는, 반대로 거짓말처럼 모든 성장을 멈췄다.
급하게 진행한 연구의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다행히 본연의 역할을 맡기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고, 이제 와서 연구를 재검토할 시간도 물적 여유도 없었으므로 그 상태로 그냥 나머지 하이엘프의 탄생을 강행했다.
나태는 평생 독신이었다. 대속자가 된 후는 말할 것도 없고 대속자가 되기 전 평범한 연구원일 때에도 그랬다. 그에게는 연구가 부인이었고 연구 결과가 자식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신의 손으로 빚어낸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에게 그는 상상도 못 한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깨지기 쉬운 공예품처럼 소중히 대했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마치 딸처럼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첫 딸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신스Sins.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해 미안해. 웰플레인Well-plane. 떠나는 우리를 대신해, 이 땅을 더욱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줘. 우리가 고향을 버린 사실을 후회할 만큼.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책임한 이름이란 말이지. 그리 생각하지 않느냐, 모자란 관리자야?”
“그래요? 나름 잘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네가 언제까지고 모자란 관리자 소리만 듣는 게다.”
“저를 모자란 관리자라고 부르는 건 언제나 당신뿐이었어요, 신스.”
시기만큼은 아니어도, 당시는 대속자 모두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고향을 버릴 날이 가까워지자 나태는 근거 없는 불안과 우울 증세에 시달렸다.
대부분은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꾹 눌러 참았다. 그러나 단 한 번, 약한 소리를 토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주 가관이었지. 이러다 실패하면 어쩌지, 저러다 실패하면 어쩌지, 소설에서도 안 일어날 일들을 온갖 창의적인 상상력으로 쥐어 짜내지 않았더냐.”
“하하. 모자란 관리자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죠. 그전까지는 그래도 아빠라고 불러 줬는데.”
“모자란 관리자에게 아빠라는 호칭은 사치이지, 암.”
다시 잔이 비었다. 이번에는 나태가 먼저 병을 들고 서로의 잔을 채웠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술을 눈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며 신스는 나직이 말했다.
“그래도, 너의 불안은 이해할 수 있었다.”
“…….”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게 두렵지 않은 이가 어디에 있을까. 하물며 제대로 된 타지에 도착할 가능성도 낮고, 그렇게 도착한들 제대로 살아남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느냐. 너의 불안은 결코 이상한 것도, 과장된 것도 아니었다.”
신스가 잔을 들어 올리고 부드러운 눈으로 나태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불안에 공감했고…… 마침내 내가 부여받은 역할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지.”
떨리는 눈동자를 급히 내리깔며 나태가 잔을 들었다. 부녀의 잔이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짠.
“언젠가, 고향을 떠난 너희가 지치고 더 나아갈 힘조차 모두 잃어버렸을 때. 두려움 속에 빠져 망망대해를 방황할 때. 그때 너희가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 막막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이정표로 남는 것. 후회에 젖어 돌아오고 싶었을 때, 돌아올 수 있는 장소를 남겨놓는 것.”
술을 입안에 잠시 머금은 신스가, 그것을 삼키고 대신 쓴웃음을 머금었다.
“너무 늦게 돌아오지 않았느냐. 모자란 관리자야.”
나태는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여러 번 마시면서 슬슬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잔은 너무나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