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마족과의 조우(3) (114/210)


114화 마족과의 조우(3)
2023.01.25.


“하하하. 여러분 정말 좋은 분들이네요.”

성 내부에 마련된 넓은 식당은 때 아닌 인파로 붐볐다. 식탁 한 가운데에 앉은 정체불명의 마족은 빈 접시를 쌓아올리며 끝도 없이 음식을 먹어치웠고, 엘프 시종들은 그의 앞에 음식이 비지 않도록 옮겨 나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자이안은 그의 정체가 ‘폭식’의 원죄를 짊어진 대속자라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폭식이 아니라 다른 원죄라면 놀랄 것이다.

“마물들 사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저를 구해주시고, 이렇게 대접까지 해주시다니. 혹시 주변 분들에게 보증 좀 서달라는 말을 자주 듣지는 않나요?”

“칭찬하든지 비꼬든지 하나만 해라. 우린 아직 너를 적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게 아니니까.”

“아차, 이거 미안합니다. 오랜만에 몸이 편해지니까 또 안 좋은 버릇이 나왔나 봐요. 한 번만 봐주세요. 제가 지금 거의 백 년 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입에 대는 거거든요. 아니, 백 년도 더 지났나?”

속 편하게 웃으며 사과한 그가 다시 음식을 흡입하는 데 집중했다. 다시 대화가 이어지려면 아마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일행들은 결국 그의 뒤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신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뱉고는 대신 대답했다.

“이 남자는 ‘나태’다.”

“‘폭식’이 아니었어……?!”

일행들 사이에 전율이 흘렀다.

“그러는 여러분은 이 대륙에 새로 태어난 신인류분들이 맞으시죠?”

나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건 자이안과 유리아, 소아레스 뿐이었다. 나태는 잠시 식사를 멈추고는 멀뚱멀뚱 나머지 각성자들을 바라보았다.

“여러분들은 왜 대답 안 해요?”

“우린 네가 말하는 신인류가 아니다.”

“엥?”

나태가 식사를 완전히 멈췄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신스가 그의 뒤통수를 툭툭 두드렸다.

“적당히 좀 먹고 슬슬 얘기 좀 해 봐라, 이 모자란 관리자야.”

“모자란 관리자…… 하하, 그 말 되게 오랜만에 듣는 거 같네요.”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잔에 담긴 물로 손을 닦은 그가 엘프들을 불렀다. 엘프 시종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를 치우고 식탁을 정리하고 나자, 마침내 제대로 된 대화의 장이 만들어졌다.

“네놈, 마계에서 온 거지?”

“마계요? 거기가 어딘데요?”

“선주인류…… 그러니까 네놈들이 수천 년 전에 여기를 버리고 도망쳐서 도착한 외계 차원 말이다.”

“거기를 여기서는 마계라고 불러요? 되게 절묘하게 잘 지은 이름이네.”

잠시 감탄한 나태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제는 자기 차례라는 양 질문을 꺼냈다.

“거기 네 분. 신인류가 아니라고 했죠?”

“그래. 우리는 지구…… 아니, 이렇게 말하면 네놈은 못 알아듣겠군. 네놈들이 침공했던 차원의 인간이다.”

“다른 차원의 인간? 침공? 이게 다 무슨 소립니까?”

프레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기만을 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멍청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너희들이 멋대로 우리 차원에 게이트를 열고 마물들을 쏟아냈잖아. 아니면 그게 침공이 아니라 다른 선한 의도였다는 개소리라도 지껄일 셈이냐?”

“세상에. 제가 유폐된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나태가 손뼉을 두드리며, 그제야 알았다는 듯 감탄사를 뱉었다.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를 이번에는 신스가 걸고넘어졌다.

“모자란 관리자야. 유폐라니?”

“저랑 다른 제 동료들이랑 의견 충돌이 조금 있었거든요. 그래서 좀 오랫동안 유폐 당했습니다.”

“의견 충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고요. 동료들은 찬탈자의 의사를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다른 차원을 공격하자는 의견이었고, 저는 제발 민폐 좀 끼치지 말고 마계에서 조용히 살다가 다 같이 죽자는 의견이었어요. 제 동료들은 그런 미적지근한 의견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더라고요.”

말도 안 되게 심각한 얘기였다. 나태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족의 지배계층이라고 생각한 칠종주 사이에 내부분열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아, 찬탈자니 뭐니 해도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네요. 이걸 어디부터 어떻게,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려나.”

“아마 네가 하려는 말은 대부분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거다. 우린 이전에 시기를 만났거든.”

쿠당탕! 의자가 뒤로 쓰러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식탁 너머로 얼굴을 바짝 들이댄 나태의 눈이 불신과 놀라움으로 이글거렸다.

“시기를…… 만났어요?”

“그래. 보석탑 아래 대미궁…… 이렇게 말하면 네가 못 알아듣겠군. 아무튼 너희가 떠나기 전에 시기를 가뒀던 그곳에서 만났다. 그리고 선주인류가 무슨 짓을 저질렀고, 왜 고향을 버리고 도망쳤는지도 다 들었고.”

“시기는…… 로물루시오르는, 그러면…… 지금도 거기에 있습니까?”

“죽었다.”

“…….”

한순간 나태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과 감정이 사라졌다. 천천히 몸을 당긴 그가, 갑자기 탈진한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피를 토하듯 말했다.

“제가…… 너무 늦었군요.”

회한으로 얼룩진 그 모습에 프레이조차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의 감정은 기만도 무엇도 아닌 진짜다. 거기에 대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뱉을 만큼 뒤틀린 성격은 아니었다.

“거 뭐냐, 너무 자책하지 마라. 오랫동안 유폐 당했다면서. 네 탓은 아니지 않냐.”

투박한 위로에 나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길고 긴 한숨을 뱉었다. 하. 하하. 하. 메마른 웃음소리를 몇 차례 낸 뒤 그는 주섬주섬 일어서서 의자를 세우고 다시 거기에 앉았다.

“알겠습니다.”

나태가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무거운 표정이었다.

“여러분들을 저와 대등한 입장에 있다고 판단하고, 모든 것을 얘기하겠습니다.”
 

* * *

나태의 얘기는 선주인류가 오랜 세월 차원 간을 항행한 끝에 남은 인구의 절반 이상을 잃고 간신히 미지의 차원에 불시착한 데에서 시작됐다.

“아주 황폐한 차원이었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동식물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죠. 그때까지만 해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던 대속자들은 그 차원이 바로 마나의 근원지, 모든 사태의 원흉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함선이 하필 그 차원에 불시착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리로 향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되었다. 처음 게이트를 열었던 그 순간부터, 선주인류의 운명은 예정되고 만 것이다.

“마나는 낮은 농도일 때는 아주 느릿느릿 차원을 오염시키지만, 고농도가 되면 그에 영향을 받은 모든 생명체를 빠른 속도로 물들입니다. 타락, 침식, 오염. 어떤 표현이든 상관없겠죠. 저희들 중 그 현상을 버텨낼 수 있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완전히 침식된 선주인류는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함선에서 내려 마계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는, 생물인지 아닌지도 분간할 수 없는 괴이한 존재에게 제 몸을 바쳤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부글거리며 팽창하는 진흙 속에 몸을 바친 순간, 목소리가 들려오더군요. 더 많은 세계를 공격해라. 더 많은 세계를 내게 바쳐라. 더 많은 세계를 먹어치워라. 그러면서 스스로를 찬탈자라고 칭했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프레이가 문득 인상을 썼다. 10년도 더 전, 최후의 순간 나이아가 보낸 통신 내용이 바로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다.

“어머니가 마지막에 상대하셨다는 그 괴물이 찬탈자일까요?”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높지.”

나이아를 잡아먹으려고 직접 말을 걸었다는, 검은 진흙 덩어리처럼 생긴 초월적인 존재. 그런 끔찍한 괴물이 둘 이상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상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머니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요?”

“아, 그래. 이것도 네가 유폐 당했을 때 일어난 일이니 넌 모르겠구만. 아까 내가 우리 차원이 너희한테 공격받았다는 얘길 했지?”

프레이가 지구에서 있었던 일을 나이아의 활약 위주로 간추려 얘기했다. 그녀가 혼자 마계로 떠나 찬탈자와 싸웠으나 실패하고 여기로 몸을 피했다는 얘기까지 모두 듣자, 나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분이셨네요.”

“그, 그런가요? 헤헤.”

뜬금없는 칭찬에 자이안은 조금 쑥스러워졌다.

“그 얘기는 조금 이따 다시 자세히 듣기로 하고…… 아무튼, 찬탈자에게 몸을 바친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서 사라졌습니다. 찬탈자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마물의 양분이 되었죠. 덕분에 찬탈자는 마물을 만들어내는 데 스스로를 소모할 필요 없이 마음껏 자신을 팽창시킬 수 있게 됐고요.”

잠시 말을 멈추고, 목이 마른 듯 물 한 모금. 한숨을 뱉으며 머릿속을 정리한 뒤 나태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를 포함한 대속자들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다행히도 본모습을 유지한 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걸 살아남았다…… 고 표현해야 할지는 좀 미묘하긴 하네요.”

“완전히 타락했다는 말이군. 너나 시기하고는 달리.”

“타락이라기보다는, 재탄생? 재구성? 그런 느낌에 가깝습니다. 원래 있던 걸 재료로 해서, 겉모습만 똑같은 전혀 다른 존재를 만들어내는 거죠. 자의식과 기억은 가졌으나 찬탈자의 명을 최우선으로 받들고 그에게 충성하는 것만이 삶의 의미가 된, 노예나 수족 같은 존재가 된 겁니다.”

만일 나이아가 제때 도망치지 못했더라면, 그녀 역시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을지도 몰랐다. 프레이는 소름 돋는 상상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다가 놓치고 있던 위화감을 하나 알아차렸다.

“아니, 잠깐만. 좀 이상한데? 시기는 애초에 마계로 간 적도 없으니 그렇다 치고, 넌 어떻게 그런 놈한테 먹히고도 제정신을 간수한 거냐?”

“마계에 도착하자마자, 아, 이거 큰일 나겠다 싶어서 미리 영혼을 살짝 분리해놨습니다. 그랬다가 찬탈자에게 한 번 먹힌 몸이 완전히 재구성된 다음 다시 들어갔죠. 솔직히 도박이긴 했는데, 다행히 제가 이겼습니다. 운이 좋았죠.”

“영혼을 분리…… 아, 뭐,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선주인류의 기술력을 생각하면 영혼에 간섭하는 수단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으리라. 그렇게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게 현명했다.

“그럼 찬탈자를 빼면, 마계에 지배계층이라고 할 게 너희 대속자 밖에 없는 셈이겠구만.”

“그렇죠. 나머지는 모두 본능뿐인 마물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럼 이제 절반도 안 남았군.”

“예? 아, 산수에 약하시구나. 저와 시기를 빼면 남은 건 다섯 명이에요.”

“교만과 음욕은 전에 우리가 죽였다.”

“……?”

나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이 되었다.

“에이, 거짓말 마세요. 음욕이면 모를까, 교만은 저희 중에서도 힘만 따지면 가장 강한 친구였는데.”

“진짠데. 어차피 넌 유폐 중이어서 몰랐겠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나태가 이번에는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판단하기에 프레이는 모를까 자이안은 거짓말을 전혀 못 하는 성격 같았으니까.

그러나 그 자이안마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다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됐다.

“……제가 운이 좋았네요.”

허탈한 건지 안도한 건지 잘 구분되지 않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여러분들 말이 사실이라면…… 다행이네요. 안심하고 믿고 맡길 수 있겠어요.”

그 말에서 느껴지는 묘한 뉘앙스에 프레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착각이 아니라면, 나태의 말은 또 다른 마족과의 싸움을 암시하는 듯했다.

“제 동료 중 하나…… 아니, 한때 동료였던 ‘폭식’이 곧 세계수를 노리고 침공을 시작할 겁니다.”

프레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저는 여러분께 이 사실을 알리고, 폭식을 막기 위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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