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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마족과의 조우(2) (113/210)


113화 마족과의 조우(2)
2023.01.24.


사방을 뒤덮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짓쳐 드는 것이 느껴졌다. 자이안은 마물의 시체가 쌓여 만들어진 산을 밟고 올라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몇 시간? 며칠? 어쩌면 몇 년? 지독하게 오랜 시간을 싸운 것 같았다. 마물의 군세는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각성자의 특성은 정직했다.

특히 자이안은 죽인 마물이 그 자리에서 흡수될 정도로 MP흡수 속도가 빠른지라, 힘이 넘치는 것이 더욱 체감이 됐다.

“이거, 끝이 나기는 하려나 모르겠구만.”

공중을 누비며 쉴 새 없이 광범위한 마법을 쏟아내던 프레이가 잠시 자이안의 곁에 멈춰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 끔찍한 전장은 그도 오랜만이었다. 지구에서의 모든 경험을 끄집어내도 한 손에 꼽을 수 있으리라.

“프레이. 놀지 말고 일해. 이 속도면 마물을 모두 죽이는 데 일주일은 넘게 걸릴 거야.”

프레이의 곁을 스쳐 지나간 아르스가 그를 나무랐다. 프레이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친 몸에 활력이 솟구치며 사그라진 의욕이 다시 충만해졌다. 계곡 건너편에서 끊임없이 백마법으로 일행을 보조하는 유민 덕분이었다.

이번에는 크룩스가 그녀의 곁을 호위했다. 그는 특성상 프레이나 아르스에 비하면 일대 다수의 전투에 약한 편이었다. 적절한 인선이라 할 수 있었다.

밤의 어둠을 몰아내며 동녘이 서서히 밝아졌다. 빛이 들기 시작하자 전장의 모습이 더욱 명확하게 보였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마물을 쓰러뜨렸지만, 남아있는 적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어느 정도 수를 줄이면 전의를 잃고 물러날 걸세!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멀리서 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희소식이었다. 프레이가 의욕을 내며 다시 날아올랐고, 자이안이 마물의 산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언제부터인가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눈앞을 새하얗게 틀어막는 눈보라 속에서, 자이안은 차라리 시각에 의지하는 것을 포기했다. 후각과 청각, 촉각, 그리고 미각까지. 대신 남은 감각을 극도로 가다듬었다.

그동안 배운 것들, 격렬한 전투 속에서 깨달은 것들 하나하나가 빛을 발했다.

적의 약점을 효과적으로 찌를 수 있고, 약한 마물들은 한 번에 일소할 수 있는 마법.

제아무리 견고한 적이라도 틈새를 노려 일격에 심장을 벨 수 있는 검술.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몸을 지탱해 주는 백마법. 아르스가 만들어준 망토.

그리고 망토에 깃든 다른 동료들의 힘.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섞여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무언가로 승화했다.

“움직임이 많이 좋아졌구나, 자이안!”

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이안은 거대한 마물의 목을 일격에 베어 쓰러뜨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체감하고 있었다. 이 전투는 자이안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 그리고 그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주는 양식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투가 그랬듯이.

어느 순간, 자이안은 손에 쥔 스펙트럼의 감각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놓친 것이 아니다. 마치 몸의 일부, 손의 연장선이 된 것 같았다.

몸의 일부가 되었다면, 지금보다 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터였다.

스펙트럼의 날이 웅웅거리며 떨렸다. 칼날을 감싼 오로라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자이안이 검을 휘두르자, 오로라가 그 움직임에 맞춰 뻗어 나갔다.

오로라에 닿은 마물들이 마치 MP를 흡수당한 것처럼 급격하게 말라비틀어졌다. 힘이 약한 중소형 마물은 그것만으로도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맙소사.’

문득 자이안은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놀랐다.

‘아니, 어머니. 이런 걸 또 숨겨놓으셨어요?’

펜던트의 기능이 해금되었을 때와 비슷했다. 스펙트럼에도 그와 비슷한 기능 제한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르스나 다른 각성자들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교묘하게.

기능 제한이 해제되는 조건은 어찌 보면 간단했다. 무술과 흑마법, 백마법 실력, 그리고 아티팩트에 대한 지식이 모두 일정 수준에 도달할 것.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제한이 있는 줄은 알지도 못했던 데다가 극한까지 몰린 상황 속에서야 처음으로 제한이 해제된 것을 보면, 그 요구하는 수준이라는 게 까마득하게 높은 경지임은 뻔했다.

“에에엥? 자이안, 그거 스펙트럼이야? 나, 난 그런 거 처음 보는데……?”

우연찮게 그 모습을 보고 만 아르스가 기겁하며 놀랐다. 그러고 보면 스펙트럼의 원래 제작자가 그녀였다. 제작자도 모르는 기능이 붙어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어머니가 남겨놓으셨던 것 같아요.”

아르스가 멍청히 입을 벌리고는 고장 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나이아라면 어쩔 수 없지…… 하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자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느낀 어머니의 그림자는 변함없이 컸다.

MP를 직접 흡수하는 오로라 방사 말고도, 스펙트럼 자체의 변형 한계도 이전보다 훨씬 폭넓어진 느낌이었다. 아마 지금이라면 칼날 길이만 수십 미터에 달하는 터무니없는 무기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MP도 어마어마하게 빨아먹겠지만.

‘괜찮겠는데. 한 번 해보자.’

지금까지는 다소 두루뭉술한 상상과 MP 제어만으로도 스펙트럼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대형 무기로의 변형을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정밀한 MP 제어, 그리고 스펙트럼이라는 아티팩트의 구조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필요했다.

기능 제한을 해금하는 조건 중에 아티팩트에 대한 지식이 포함된 이유가 아마 이 때문이리라.

마물들을 쓰러뜨리던 오로라가 되돌아와 스펙트럼을 감쌌다. 이윽고 스펙트럼 전체가 불타오르는 것처럼 밝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아귀에 느껴지는 무게감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윽…….”

한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일시적인 MP 부족으로 인한 현기증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자이안은 정신을 다잡고 천천히 스펙트럼을 휘둘렀다.

빛의 파도가 전장을 휩쓸었다.

뻗어 나간 빛이 경로상에 놓인 모든 마물을 가차 없이 갈랐다. 그러나 그 사이에 있던 신스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다.

아니, 반대였다.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활력을 불어넣었다. 마물과 그렇지 않은 존재를 철저하게 구분하며 마물에게는 죽음을, 마물이 아닌 이에게는 힘을 주는 것이다.

‘여러 번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냐.’

다시 평범한 장검의 모습으로 돌아간 스펙트럼을 내려다보며 자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규격으로 정해진 한계를 초월해 억지로 변형시키는 기술이다.

한 번 정도는 쓰고 나서 잘 정비하면 별문제 없겠지만, 연속으로 사용했다가는 아티팩트의 구조가 파손되어 영영 못 쓰게 될 우려가 있었다.

빛의 파도가 지평선 끝까지 뻗어 나가며 만들어낸 뻥 뚫린 길을 다시 무수한 마물들이 채웠다. 아직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자이안은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다시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다가 묘한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마물들의 상태가 이상한데.’

적들의 공세가 눈에 띄게 수그러졌다. 아까 신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느 정도 쓰러뜨리고 나면 전의를 잃고 물러날 거라는 말. 어쩌면 그때가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아직 물러날 때가 아닌데.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아직 아니라고요?”

곁에 착지한 신스의 말에 자이안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마물들의 이 반응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잘 보면 전의를 잃은 것과는 조금 다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물들은 마치 상반되는 명령을 동시에 들은 것처럼 제자리에서 우왕좌왕했다. 자이안이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적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뭐가 어찌 됐든, 슬슬 싸움이 끝날 것 같은데?”

공중을 날아 착지한 프레이가 진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스도 한발 늦게 근처에 착지했다. 그러고는 머리에 쓴 고글 형태의 아티팩트로 마물들의 동향을 살피며 말했다.

“신기하네에. 내 아티팩트에도 기록되지 않은 처음 보는 행동 패턴인걸.”

“단순히 전의를 잃은 게 아닌 건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싸울 마음이 없는 건 확실해 보이지?”

일행들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마물들이 이내 느릿느릿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자이안은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뭐가 어찌 됐든 전투가 막을 내렸음은 확실해 보였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눈보라가 그치고, 해는 서쪽 언저리에 걸쳐 있었다. 해가 뜨기 한참 전부터 시작된 전투는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간신히 끝났다.

“……잠깐만.”

신스의 목소리가 굳었다. 마물들은 단순히 물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일행들에게서 거리를 벌린 채, 마치 길을 터주듯 좌우로 갈라서고 있었다. 길을 따라오라는 듯, 아니면 반대로 길을 따라 누군가가 올 거라는 듯.

다른 일행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느슨해져 있던 긴장의 실이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곧 나타날 미지의 적을 기다리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오, 오…… 오오.”

힘을 잃고 말라붙은 신음 소리였다. 길 저편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봐서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평범한 사람일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전투의 여파로 날카롭게 가다듬어진 자이안의 후각이 상대의 정체를 간파했다.

“……마족이에요. 아니, 하지만, 으음.”

말을 꺼낸 자이안이 위화감에 뒷말을 흐렸다. 마족이긴 했으나 교만과 음욕에게서 느꼈던 냄새와는 크게 달랐다. 그보다는 시기의 것에 가까웠다.

“마족이 아니라…… 선주인류라고 말하는 게 옳은 것 같습니다.”

“제정신을 가진 마족이란 말이냐?”

자이안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일행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제정신이라고 생각한 시기가 대화 도중에 몇 번이나 광기를 드러내는 걸 겪었으니까. 단 한 명, 어딘가 처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신스가 예외였다.

“다, 당신들…… 사람…… 사, 사람, 맞습니까?”

가까워진 그가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행은 대답 대신 무기를 겨눴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듯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가까워졌다.

“제, 제발…….”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힘이 다한 듯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서로를 돌아본 일행은 결국 한숨을 뱉으며 전투태세를 풀었다. 어쩌면 상대가 엄청난 기만전술을 펼치는 것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진지하게 이를 고려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먹을 것, 좀…….”

힘겹게 고개를 든 그가 처량하게 말했다.

“배, 배고파 죽을 것 같아요…….”

그러더니 결국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

일행들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이걸 놔둬야 하나? 아니면 데려가서 밥이라도 먹여야 하나? 눈치를 보며 고민하는 사이, 대뜸 다가간 신스가 그를 어깨에 들쳐 멨다.

“돌아가자꾸나. 여긴 이제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으니.”

마물들이 빠른 속도로, 질서정연하게 물러났다. 일행들은 침묵 끝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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