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마족과의 조우(1)
(112/210)
112화 마족과의 조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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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마족과의 조우(1)
2023.01.23.
모의전으로부터 하루 뒤, 오전.
“신스. 잠깐 와 봐라. 네가 보기엔 어떠냐?”
“나쁘지 않은 방침인 것 같네만. 이대로 해도 문제없을 것 같네.”
싸움을 통해 친해지는 사람도 있다는 아르스의 말을 증명하듯, 프레이와 아르스의 사이가 거짓말처럼 가까워졌다. 엄밀히는, 신스의 태도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변한 쪽은 프레이였다.
‘……걱정했던 내가 바보 같네.’
그 모습에 자이안은 마음이 놓였으나,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이기도 했다.
에일레나는 몇 주째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자이안을 찾아왔다. 자이안도 적잖이 마음이 흔들렸다.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몇 주 동안이나 정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대로 쭉 안 된다고만 하는 건 그녀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이지 않나 싶었다.
“뭘 그런 것까지 나한테 일일이 상담하고 있냐?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지금 와서 저희가 자이안에게 가르칠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기껏해야 기초를 되짚어보고 가끔 보이는 안 좋은 버릇을 고쳐주는 정도죠. 더 성장하고 싶다면, 누군가를 가르쳐보는 것도 좋은 선택일 거예요.”
프레이와 크룩스의 의견은 중립 혹은 긍정에 가까웠다. 갈피를 잡지 못해 신스에게도 상담해보니, 그녀는 자이안에게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청하는 엘프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다.
“신기한 일도 다 있구나. 아니지, 아직 어린 엘프라고 했더냐? 그럴 수도 있겠어. 자이안, 네가 이 꽉 막힌 귀쟁이들에게 변화의 씨앗을 심었구나.”
신스는 그가 에일레나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걸 적극 권유했다. 결국 자이안도 마음을 다잡았다.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자신을 찾아온 에일레나에게 자이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게 가르침을 받고 실망하셔도 전 책임 못 져 드려요. 그래도 괜찮다면…… 당신을 가르쳐줄게요.”
처음에는 자이안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에일레나는, 그러나 잠시 뒤 그 자리에서 뛸 듯이 기뻐했다. 더 일찍 결심할걸, 하고 자이안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평온한 일상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어느 날.
“…….”
평소보다 두세 시간이나 일찍 깨어난 자이안은 아직 어둑한 창밖을 바라보고,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었다. 세계수의 숲은 정화기의 역할을 하는 세계수 덕분에 평소에는 MP의 냄새를 거의 맡을 수 없었다.
그 탓에 그 냄새는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옷을 챙겨 입은 자이안이 마지막으로 망토를 조이며 성을 나왔다. 평소 훈련용으로 사용하는 공터 한가운데에 신스가 서 있었다. 자이안에게는 등을 보인 채 팔짱을 끼고 세계수 너머 북쪽, 거대한 산맥을 노려보았다.
“스승님.”
“더 자거라, 자이안.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다.”
“마물들이 오는 겁니까?”
“아니. 오지 못할 게다. 내가 그 전에 모두 처리할 테니까.”
“저도 가겠습니다.”
“이건 내 역할이다, 자이안.”
“제자가 스승의 일을 돕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
팔짱을 푼 신스가 그를 돌아보고는 어깨에 힘을 빼며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고집불통이구나.”
“절반은 스승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무작정 이것저것 가르칠 것만 아니라 성격 교정에도 신경을 좀 쓸 것을 그랬나.”
농담을 뱉은 신스가 다시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발치에서 점토로 만들어진 두 필의 말이 솟아올랐다.
“얼마나 많은 마물이 산맥 너머에서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필시 위험할 게다, 자이안.”
“괜한 걱정이십니다. 스승님도 제가 어떤 여행을 했는지 다 들으셨잖아요. 게다가…….”
자이안이 목에 걸린 펜던트를 툭툭 두드렸다. 프레이의 방에 모인 각성자들은 이미 저마다 전투 준비를 마친 뒤였다.
“하하하. 그 작달막한 아이가 이리도 믿음직스럽게 자랐구나.”
신스가 먼저 말에 올라탔다. 자이안이 뒤따르고, 두 필의 말이 북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산맥 너머에 정확히 뭐가 있는 겁니까?”
“아무것도 없다. 억지로 말하자면, 눈보라와 추위, 그리고 균열뿐이지. 그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땅이다. 인간들이 그리도 두려워하는 복마전보다도 더 가혹한 환경이야.”
MP를 정화하고 환경을 온화하게 만들어주는 기능을 엘프들은 ‘세계수의 축복’이라고 불렀다. 산맥 너머는 축복조차도 미치지 못하는 땅이었다.
곳곳에 퍼진 균열들 때문에 MP의 농도가 터무니없이 짙어, 세계수를 반대로 오염시킬 위험이 있었다. 신스가 수천 년이나 세계수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였다.
“하이엘프는 세계수의 기능 관리와 조정을 위해 만들어진 종족이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지. 구인류는 언젠가 자신들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때를 대비해 우리에게 이 땅을 다시 생물이 살 수 있는 땅으로 일궈놓는 역할을 맡겼다.”
많은 하이엘프들이 대륙 각지로 퍼져 땅을 좀먹는 MP 오염을 정화하기 위해, 끝없이 마물을 쏟아내는 균열을 닫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그 희생은 충분히 보답 받았다. 죽음의 땅에 녹음이 돌아왔고, 우연의 조화인지 아니면 기적적인 필연인지 또다시 스스로를 사람이라 칭하는 지성종족이 태어났다. 그러나 한 번 고향을 버린 원래 주인이 되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일전에 음욕이 저희를 피조물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시기의 얘기를 들은 뒤로는, 어쩌면 인간이 선주인류가 만들어낸 피조물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닌 겁니까?”
“음욕이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럴 리가 없다. 대륙이 재생하고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광경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거늘. 아무래도 마나 오염으로 타락해버려 기억 자체가 개변된 것이 아닌가 싶구나.”
그렇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사실 종족의 태생이 뭐가 중요한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마족과 마주칠 때마다 꺼림칙한 기분에 휩싸일 일은 없어졌다.
“그들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건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 자이안. 제 손으로 고향을 버리고 도망친 이들이다. 무슨 소릴 하든 무의미한 울부짖음에 불과하다.”
“선주인류를…… 좋아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네요.”
“당연한 일이지 않느냐? 의무만 우리에게 떠넘긴 채 무책임하게 도망친 이들을 좋아할 구석이 어디에 있다고. 그래, 뭐, 하이엘프 중에는 죽는 순간까지 그들을 창조주로 여기며 그리워한 이들도 있기야 했지. 허나 난 아니다.”
어쩌면 그런 냉랭한 성격 덕분에 지금까지 혼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신스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스승님이 냉랭한 성격이라고요? 재미없는 농담이군요.”
자이안에게는 그 모습이 그리움을 억누르기 위해 일부러 모질게 구는 것처럼 보였다.
“허, 이런 몹쓸 제자를 보았나. 모처럼 애수에 잠긴 스승의 한마디를 농담 취급을 해?”
산맥으로 향하며 지나친 엘프들의 도시에서는 부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쩌면 그들 역시 산맥 너머 마물들의 준동을 알아차린 것이리라.
“하이엘프가 선주인류 손에 만들어진 거라면, 엘프는 뭡니까?”
“궁금한 게 많구나. 엘프는 하이엘프의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태어난 종족이다. 초기에는 세계수 내부의 생명공학 연구실에서 나와 다른 하이엘프들이 힘을 모아 만들었지. 다만, 우리에 비하면 평범한 생물에 가깝도록 조정했다. 때문에 좀 더 감정적이고, 정상적으로 아이도 가질 수 지. 엘프들이 스스로 번식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우리는 생명공학 연구실을 남김없이 부쉈다. 그런 기술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감정적이요?”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에 자이안은 미묘한 표정을 했다. 신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일레나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 엘프의 본성은 그 아이의 그것에 가깝다. 그러나 엘프들은 미련하게도 우리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구인류들을 닮고자 했지. 그래서 저 스스로 머리를 가르고 뇌 기능을 제어하는 수술을 했다. 그 결과가 네가 아는 엘프다. 오직 원리원칙만 추종하는 앞뒤 꽉 막힌 고집쟁이들 말이다.”
처음에는 뇌를 직접 자르고 신경을 잇는 등 위험부담이 큰 수술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엘프들의 기술 역시 발달했고, 최종적으로는 양산화한 칩을 뇌에 부착하는 위험부담 없는 수술법이 자리 잡았다.
일련의 과정은 하필 하이엘프들이 대륙의 재생과 균열의 봉합 때문에 오랫동안 숲을 비운 사이에 일어났다. 신스가 뒤늦게 엘프들의 변화를 알아차렸으나 이미 손을 쓰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그래서 네게, 그리고 에일레나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좋은 것, 나쁜 것 가리지 말고 그 아이에게 많이 가르쳐주렴. 그 하나하나가 엘프가 달라지기 위한 초석이 될 게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안 그래도 에일레나를 받아들인 게 부담스러웠는데, 신스의 말을 들으니 더 책임이 막중하게 느껴졌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자이안.」
프레이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을 꺼냈다.
「그냥 네가 하던 대로, 네 방식대로 가르치면 된다. 괜히 부담 느끼면서 더 가르쳐줄 거 없나, 그런 고민 같은 건 집어치워도 된다. 신스가 바라는 것도 그런 일일 거다.」
「이왕 사제지간이 됐으니, 친하게 지낼 수 있으면 더 좋겠죠.」
「그래. 딱 그 정도면 된다.」
‘그런 일이라면…….’
각성자들의 충고에 자이안은 조금 편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산맥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농밀하게 느껴지는 MP의 냄새에 후각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산맥 너머에 마물이 아니라 마족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서부터는 말을 타고 가기 어려울 거다. 그렇지. 자이안, 너 혹시 날아다닐 수 있느냐?”
비행 마법을 쓰는 프레이처럼 자유자재로 날지는 못해도 허공에 발판을 만들고 도약하며 비슷한 움직임을 낼 수는 있었다. 자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스가 반색을 했다.
“그거 잘됐구나. 속도를 조금 올려도 되겠어.”
거기부터는 파죽지세였다. 돌풍을 휘감은 신스가 소리조차 초월하는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자이안도 급히 뒤를 쫓았지만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스승님! 좀 천천히 가면 안 되겠습니까!”
“천천히 오거라! 먼저 가서 정리하고 있으마!”
신스는 오히려 속도를 더 높였다. 잠시 멈춰 힘을 모은 자이안도 이를 악물고 그녀를 뒤따랐다.
산맥을 거슬러 오를수록 공기가 희박해지고 공기가 급격하게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자이안이 꼭대기를 넘은 순간.
“……!”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까지는 공기 중에 MP가 가득 찬 느낌에 불과했다. 지금은 마치 물 대신 MP가 가득 찬 심해에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산맥이 끝나고 평지와 이어지는 지점에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거대한 계곡이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시커먼 어둠이 일렁였다. 넘실대는 바닷물처럼. 부글거리는 진흙처럼.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라고 착각할 만큼 무수한 수의 마물이었다.
「……이런 미친.」
욕설을 뱉는 프레이의 반응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적을 눈앞에 두고 즐거워하면 즐거워했지 질색하는 성격은 결코 아닌 그가 이런 반응이라니.
자이안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계곡 건너편, 적들 한복판에 신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중심으로 일정 반경만 뻥 뚫려 있어서 더 눈에 띄었다.
‘스승님. 지금까지 이런 싸움을 해 오신 겁니까?’
정신을 차린 자이안이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스펙트럼을 꺼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