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모의전(2)
(111/210)
111화 모의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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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모의전(2)
2023.01.22.
50미터 가량을 떠오른 원통형의 드론이 상승을 멈추고 반구형의 역장을 펼쳤다. 모의전의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통칭 ‘모의 훈련실’이라고 불리는 이 드론 형태의 아티팩트는, 안에서 각성자들이 전력으로 치고받아도 실질적인 부상을 입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특수한 역장을 만들어낸다.
역장 내부는 증강현실 영역이기 때문에,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증강현실로 마물을 구현해 모의 전투를 펼칠 수도 있다.
게이트 시대 중반기에 완성된 이 고도의 아티팩트는 이제 막 실전에 투입된 신입 각성자들의 허무한 개죽음을 막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저걸 만든 사람이 바로 이 누나란 말씀. 엣헴.”
자이안의 곁에 선 아르스가 가슴을 펴며 자랑했다.
실전에서는 아무래도 프레이를 비롯한 다른 이들에 비해 눈에 덜 띌 수밖에 없지만, 그녀 역시 게이트 시대의 막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웅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녀는 반투명한 고글 형태의 헤드기어를 쓰고 있었다. 본체인 드론과 연동되어 영역 내부의 각종 상황을 수치화해서 보여주는 보조 장치였다. 그녀가 똑같은 헤드기어를 하나 더 꺼내 자이안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니까 우리 자이안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축제라고 생각하고 즐기렴. 전력을 다하는 프레이의 마법을 바로 옆에서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거든.”
물론 역장이 모든 피해를 완벽하게 없던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력을 발휘하는 프레이 두 명이 싸운다고 가정했을 때, 역장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최대 10분가량.
승부가 그 이상으로 길어지면 그냥 그 자리에서 강제로 싸움을 중지시키고 무승부로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이쪽 세계에서도 쓸 수 있는 모의 훈련실을 만들어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프레이에 대한 작은 복수였다.
“삼촌이 대체 왜…… 스승님과 싸우려는 거죠?”
“글쎄에. 나도 쟤 속마음까지 다 알고 있는 건 아닌데. 그냥 내 근거 없는 추측이라도 듣고 싶다면…… 아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아닐까?”
“삼촌이 스승님을 싫어한다고요?”
“아하하. 그게 아니라 반대야. 신스가 싫은 게 아니라, 아무 잘못도 없는 신스한테 엉뚱하게 질투하고 있는 자기가 싫은 거야.”
질투라니.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자이안은 멍청히 입을 벌렸다. 가끔 애처럼 유치하게 굴기는 하지만, 그런 감정하고는 연이 없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쟤 원래 겉보기보다 집착이 심해. 여자 입장에서 보면 좀 찌질한 것 같기도 하고. 옛날엔 나이아가 그 대상이었고, 지금은 자이안 바로 너가 그렇지.”
“……근데 자기한테 화가 났는데 왜 스승님이랑 싸움을 해요?”
프레이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돌발행동이 납득되지는 않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아……. 자이안은 잘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프레이 쟤는 진솔한 대화하고 정면승부를 비슷한 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경우가 가끔 있거든. 그러니까 이 싸움은 화풀이 같은 게 아니라, 대화 대신인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저희들끼리 싸우는 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싸움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당사자들이 정하는 거야. 어떤 사람은 대화가 아닌 다른 수단을 통해 상대를 더 깊이 이해하고 친밀해지기도 하거든. 그러니, 자이안. 둘이 이미 이 싸움을 받아들인 이상, 아무리 자이안이라도 그걸 막을 자격은 없어.”
자상한, 그러나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한 말에 자이안은 말문이 막혔다.
“저는, 그냥…….”
한참을 고민한 자이안이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이 안 싸우고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냥 그게 다예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바람이었다. 아르스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게 끝나고 둘이 친해질지, 아니면 완전히 척을 지고 갈라질지는 그때가 돼야 알겠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내가 아는 프레이는 승패를 가지고 뒤끝을 질질 끄는 성격은 아니거든. 아니면 혹시 신스가 그런 성격이야?”
“그럴 리가요.”
“그럼 괜찮을 거야.”
안심시키듯 자이안의 어깨를 토닥인 아르스가 역장 안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축제라고 생각하고 재밌게 구경이나 하자, 우리.”
* * *
“놀랍군. 구시대의 기술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기계장치야.”
주변을 감싼 역장을 한 번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머리 위의 드론에 시선을 던진 신스가 감탄을 뱉었다. 실제로 이 ‘모의 훈련실’은 아르스와 그 산하 연구소가 아니면 누구도 만들 수 없는, 현대 지구의 기술의 정수가 담긴 아티팩트였다.
“무기는 따로 없는 거냐? 어디 놓고 온 거면 다시 가져와도 된다. 그 정도야 기다려주지.”
“싸우면서 무기가 필요했던 적이 없었던지라. 충고만 고맙게 받겠네.”
“나중에 질질 짜면서 후회해도 난 모른다.”
맨손으로 초연하게 서 있는 신스에게 빈정거리는 소리를 쏘아붙이면서도, 프레이는 내심 묘한 기분이었다.
사실 이 판은 프레이가 짠 것이 아니었다. 당초 프레이는 그냥 신스에게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 자리에서 후련해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얘기를 묵묵히 듣던 신스가 대뜸 모의전을 제안했다. 어정쩡하게 흐지부지되는 것보다는 치고받고 싸워서라도 깔끔하게 끝맺음을 내는 걸 좋아하는 프레이의 성격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처음에는 곤혹스러웠으나, 프레이도 곧 그게 좋은 제안인 것 같다고 받아들였다.
‘아르스가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사고가 터지지는 않겠지.’
헤드기어를 쓴 아르스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태평하게 손을 흔들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한손에는 팝콘이 가득 담긴 컵을 들고 있다.
유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가 소아레스의 귓속말에 납득했다는 기색이 됐고, 케이는 흥미진진하게 싸움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이안은 아르스의 곁에서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마라, 자이안. 네가 그렇게 존경하는 스승님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날 일 없을 테니까. ……다만.’
프레이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게 승패를 양보하겠다는 뜻은 아니지.’
프레이의 시야 한쪽 구석에 LP:10,000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신스도 비슷한 것을 보고 있으리라. 공격을 당하면 실제로 부상을 입는 대신 LP가 소모되고, 그렇게 해서 LP가 먼저 바닥난 쪽이 패배하는 직관적인 방식이다.
‘1만이라. 최대 화력을 집중해도 한 번에 쓰러뜨릴 순 없겠군.’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프레이가 피식 웃었다.
‘그럼 두 번 때리면 되지.’
“과연, 그렇구먼. 먼저 이 숫자가 바닥나는 쪽이 지는 게로군.”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신스는 전투의 규칙을 저 혼자서 파악했다. 그것이 특유의 통찰력인지, 아니면 선주인류 시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랐다.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하나뿐이었다.
눈앞에 카운트다운이 나타났다. 프레이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온 의식을 집중해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선공은 양보하겠네. 연장자의 배려일세.”
“……!”
프레이의 머리 위에 작은 불의 구슬이 나타났다. 동시에 그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손끝에서 뻗어 나간 번개의 사슬이 신스의 팔다리를 묶었다. 이윽고 불의 구슬이 신스를 향해 날아갔다.
쿠르르릉! 땅이 뒤흔들리더니 신스의 눈앞에 단단한 흙벽이 불쑥 솟아올랐다. 불의 구슬이 흙의 벽과 맞닿은 순간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결과를 기다리던 프레이는 손끝에 연결된 번개의 사슬이 산산이 찢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후폭풍이 잠잠해지고, 흙의 벽은 흔적도 없이 부서졌으나 그 뒤의 신스 역시 어딘가로 사라진 뒤였다.
‘머리 위!’
“이제 내 차례로군?”
마안이 신스의 행방을 읽은 순간, 머리 위에서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이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위쪽에 다수의 불똥을 흩뿌렸다. 무언가와 닿는 순간 즉시 폭발을 일으키는 공방 일체의 견제기였다.
신스의 온몸에 바람이 휘감겼다. 그녀는 그 상태로 대담하게도 흩뿌려진 불똥 사이를 그냥 뚫고 프레이에게 내리꽂혔다.
산발적인 폭발이 일어났으나 바람의 장벽을 두른 그녀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폭발의 기세를 타고 속도를 높일 뿐이었다.
“칫!”
혀를 찬 프레이가 신스와 비슷하게 전신에 번개를 둘렀다. 거의 동시에, 공중에서 수직으로 떨어진 신스가 그에게 손에 쥔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두 팔을 들어 공격을 막은 프레이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프레이도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신스가 착지한 순간, 발을 디딘 땅이 갈라지며 새하얀 불의 기둥이 치솟았다.
기둥 속에 갇힌 그녀의 움직임이 마치 물에 잠긴 것처럼 무거워졌다.
“이것도 먹어라!”
한 손으로 불의 기둥을 유지하며, 남은 한 손으로 번개의 검을 만들어낸 프레이가 이를 신스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그 순간 프레이의 발밑이 불쑥 치솟으며 흙과 바위로 이뤄진 곰의 머리가 나타나 그의 온몸을 물어뜯었다.
불의 기둥의 구속력이 약해지고, 안에서 유유히 걸어 나온 신스가 번개의 검을 바닥으로부터 흙벽을 만들어 막아냈다.
프레이의 온몸이 새하얗게 변해 그대로 폭발했다. 곰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지고, 자리에 멈춰선 신스가 재차 흙벽을 만들어냈다. 열과 압력이 흙벽의 표면을 사정없이 깎았다.
“후…… 빌어먹을.”
7천을 밑돈 LP를 확인한 프레이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젓고 마음을 다잡았다. 신스 역시 만만찮게 유효타를 허용 당했다. 프레이와 마찬가지로 적잖이 LP가 소모됐을 것이다.
‘큰 거 한두 방으로 확실하게 끝내고 싶은데. 그럴 만한 틈이 없군.’
훈련 도중에 끼어드는 걸 보며 무예에 나름 일가견이 있을 것 같다고 예측하기는 했다. 직접 상대해보니, 정형화된 무술가의 움직임은 아니었으나 마치 야생동물을 보는 것처럼 날렵했다.
자연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특수한 능력도 성가셨다.
‘아마 전력을 내고 있지는 않을 거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내가 더 유리해.’
“작전을 구상하는 겐가? 얼마든지 기다려주겠네.”
프레이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신스 역시 가만히 서서 그를 기다렸다. 어차피 프레이가 무슨 수를 써도 소용없을 거라는 듯한 태도였다. 프레이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그렇게 굴어야 쓰러뜨리는 보람이 있지.’
그의 등 뒤에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동시에 신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밑이 갈라지며 바위로 만들어진 호랑이가 나타났다. 신스를 목덜미에 태우고, 호랑이가 프레이를 향해 쇄도했다.
호랑이가 지척까지 도달한 순간, 지면에 심어 놓은 지뢰가 폭발했다. 바위로 이루어진 몸은 불에도 번개에도 강했지만 폭발로 인한 순수한 압력에까지 강할 수는 없었다.
주변에 흩뿌려진 지뢰가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산산이 부서지는 호랑이의 머리를 박차고 신스가 뛰어올랐다.
다시 한번 그녀가 바람을 휘감았다. 아까 전보다 훨씬 더 거칠게 휘몰아치는 바람이었다. 동시에 프레이 주변의 땅이 굉음과 함께 솟구쳤다. 모의 훈련실의 역장을 꽉 채울 만큼 거대한 곰 네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스가 만들어내는 동물들은 하나하나가 상위 마물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만한 덩치를 가진 곰이라면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힘을 가졌으리라.
‘끝장을 볼 셈인가. 좋아, 받아주지.’
바람을 두른 신스가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프레이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가속했다. 동시에 네 마리의 곰이 집채만 한 앞발을 휘둘렀다. 그리고,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마법진으로부터 발생한 고열이 한 점에 뭉쳤다. 퍼져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한계까지 뭉친 끝에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들끓었다.
그러나 프레이의 마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선을 그어, 오직 그 방향으로만 열의 이동을 허락했다.
열선이 쏘아졌다.
신스의 가슴팍에 열선이 꽂혔다. 거창한 폭발은 없었다. 대신 그녀를 보호하고 있던 돌풍의 갑옷이 순식간에 와해되어 사라졌다.
신스가 눈을 부릅떴다가, 이윽고 걷잡을 수 없이 즐거워하며 웃었다. 그리고는 무방비하게 드러난 프레이의 정수리를 발꿈치로 내리찍었다.
“야 이 미친……!”
프레이의 몸이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설마 열선을 그대로 맞으면서 공격을 감행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프레이가 바닥에 고꾸라진 채 헛웃음을 터뜨렸다.
LP:0. 깔끔한 패배였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급소를 그런 엄청난 힘으로 얻어맞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런. LP가 0이 됐군. 이럼 내가 진 겐가?”
신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초연히 패배를 받아들이고 있던 프레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주섬주섬 일어선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마 내 LP가 먼저 바닥났을 거다. 내 패배다.”
“하지만 먼저 공격을 맞춘 건 자네이지 않나? 그러니 내 패배라 봐야 할 것 같은데.”
“그 전에 네가 만들어낸 곰이 나를 공격하고 있었지. 난 방어조차 할 수 없는 무방비한 상태였고. 애초에 넌 그걸 피할 수도 있었는데 그냥 정면으로 들어온 거잖아. 내가 진 게 맞다.”
“피하지 않은 게 아닐세. 너무 빨라 피할 수 없었던 게지. 이 싸움은 자네의 승리가 맞네.”
서로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인상을 쓰고 신스를 노려보던 프레이가 어느 순간 탁, 하고 힘을 풀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힘 빠진 얼굴로 자연스럽게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냥 무승부로 하자고.”
“무승부라. 자네가 그걸로 만족한다면야.”
신스가 마치 대단한 타협안이라도 들은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자식, 처음부터 이럴 셈이었구만?”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먼. 인간의 말은 가끔씩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을 때가 있더란 말이지.”
속 보이는 연기에 프레이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내 말이 맞았지, 자이안?”
그 모습을 보며, 아르스가 헤드기어를 벗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자이안은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