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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모의전(1) (110/210)


110화 모의전(1)
2023.01.21.


“훈련은 모두 끝났다. 고생 많았다, 자이안.”

맑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흙투성이가 된 채 주저앉아 있던 자이안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신스 웰플레인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이안은 비틀비틀 일어나 그녀에게 향했다.

신스의 키가 묘하게 크게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자기 두 손이 조막만 했다. 자이안은 잠시 위화감을 느꼈다가 금세 자기 상태를 받아들였다.

일곱 살의 여름. 숲에서의 생존 훈련 도중이었다.

훈련 막바지. 자이안은 실수로 야생 곰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외적의 침입을 감지한 곰이 흥분해 그에게 달려든 순간, 신스가 난입했다. 무기 하나 없이 맨몸으로, 마법조차 사용하지 않고 온몸을 물어뜯기면서도 곰들을 두들겨 패 쫓아냈다.

신스의 훈련은 대부분의 경우 그런 식이었다. 어린 자이안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가혹한 내용이었으나, 신스 본인도 똑같은 제한을 짊어지고 끝까지 그의 곁에서 훈련을 함께했다.

때문에 자이안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고된 순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스승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곱 살 어린애를 맨몸으로 숲에 던져놓고 생존 훈련을 시켰던 건 좀 지나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가까이 다가간 자이안은 어느새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키가 컸다. 몰라보게 자란 제자를 올려다보며 스승은 껄껄 웃었다.

“너라면 분명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너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지. 게다가 자이안, 난 네게 포기하면 안 된다며 훈련을 강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지 않느냐?”

그랬다. 신스의 훈련은 몹시도 엄격했지만, 반대로 그녀 자신은 자상한 스승이었다. 그녀는 자이안이 언제 어느 때 포기하더라도 그를 위로하고 보듬어 안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이안이 결코 훈련을 포기하지 않은 두 번째 이유였다.

“스승님,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제가 그런 말을 들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저를 자극하려고 하신 말씀이었던 거 아닙니까?”

자이안의 추궁에 신스는 대답 대신 껄껄 웃기만 했다.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숲 전체에 메아리쳤다. 노골적으로 대답을 피하려는 태도에 자이안의 표정이 삐딱해졌다.

“스승님, 웃지만 말고 제대로 대답해주세요. 스승님?”

스승님? 스승님?

스……?

…….

….

“……스승님?”

눈을 뜬 자이안이 잠긴 목소리로 멍하니 말했다. 눈을 끔뻑거리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씩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주섬주섬 일어난 자이안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기지개를 켰다.

아주 그리운 꿈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정작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지만. 영문 모를 불만스러운 기분만 희미하게 입맛에 남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엘프 시종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그것도 이제 와서는 적응됐다.

자이안은 가볍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향했다. 도중 유리아와 만나 그녀도 함께했다.

성 앞쪽 넓게 펼쳐진 공터에 선객이 와 있었다. 기척을 느낀 신스가 둘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럼 훈련을 시작할까?”

신스를 만나고, 성에서의 생활에 몇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먼저, 신스가 아예 성에 눌러앉았다. 당초에는 일행들 모두를 세계수 최상층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엘프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자 아예 발상을 바꿔버린 것이다. 엘프들은 규칙을 명분으로 일행들을 막을 수는 있었으나, 하이엘프의 행동에는 아무 제지도 할 수 없었다.

신스는 자이안이 조심스럽게 정체를 밝힌 각성자들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자이안이 하나하나 설명하기도 전에 그들이 다른 차원의 존재고, 그 육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임시로 만들어진 인형과 같은 것이며, 그 모든 것이 펜던트와 연관되어 있음을 단번에 꿰뚫어 봤다.

“페르지오가 네 엄마, 나이아를 만난 게 바로 이 숲이었다. 맹약을 이행하던 도중이었지. 나이아가 나타남과 동시에 대륙 곳곳에 남아있던 균열들이 대부분 모습을 감췄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나이아가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깨닫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작 본인은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말이다.”

자이안이 기억하기로 신스는 나이아와도 가깝게 지냈다. 어쩌면 그게 나이아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반 정도는 맞다. 나머지 반은…… 그래, 불쌍해서 그랬던 게지.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다만, 기억을 잃은 채로 다른 차원에 떨어져서 하필 코가 꿰인 게 알레프의 핏줄이라니.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었다.”

“전에 스승님이 저희 가문을 싫어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알레프 말이냐? 당연한 일이지 않느냐. 너희가 복마전이라 부르는 그 땅은 본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알레프는 자기 터전은 자기 손으로 지켜야 한다며, 남의 힘을 빼앗아간 채로 돌려주지도 않고 고집불통이니 원. 내가 좋아할 이유가 있겠느냐?”

말은 불평불만이었으나 정작 목소리는 그 반대였다. 자이안은 그제야 일전에 들었던 ‘신스는 알레프 가를 싫어한다’는 말의 진짜 뜻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네가 태어났지. 특별한 별을 타고난, 인과의 연쇄를 끊어낼 힘을 가진 네가 말이다.”

“인과의 연쇄?”

“이런, 내가 너무 쓸데없는 말만 했구나. 신경 쓰지 말거라. 별을 타고났다고 한들, 정해진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길이라 함은 네게 걸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법이지.”

성에 머물며, 그녀는 일행들의 훈련을 봐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가르친 건 아니다. 애초에 그건 각성자들의 역할이었으니까.

다만 그녀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훈련을 지켜보며 간혹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나, 하고 의견을 꺼냈다. 각성자들은 그게 타당한 의견이라면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으면 논의를 거쳤다.

“……쯧. 마음에 안 들어.”

그런 상황이 탐탁지 않은 이가 한 명 있었다. 프레이였다.

“저거 보라고. 호시탐탐 우릴 감시하면서 우리 역할을 빼앗아가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잖아.”

“형. 말은 바로 해야죠. 자이안의 스승으로선 저분이 대선배인데.”

크룩스의 정정에 프레이는 다시 한번 혀를 찼다. 프레이도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신스가 훈련에 최소한으로만 개입하는 것이 각성자들을 배려하는 행동이라는 사실도.

프레이는 자신의 성격이 아주 가끔 어른스럽지 못할 때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마땅한 이유도 없이 타인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런 자각이 프레이의 태도를 더 삐딱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신스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면서,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의 표출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수를 써야겠어.”

“자이안한테 민폐 끼칠 만한 짓은 하지 마세요, 아저씨.”

“내가 뭔 어린애냐? 그 정도도 구분 못 하게.”

두 번째 변화는 에일레나였다.

“훈련 끝났지? 고생했어. 여기 수건이랑 물.”

훈련이 끝나기 30분 쯤 전부터 찾아와 기다리고 있던 에일레나가, 훈련이 끝나가 곧장 자이안에게 다가갔다. 벌써 며칠 동안 반복된 광경이었다. 자이안은 어색하게 수건과 물통을 받아들었다.

“에일레나. 이러지 않아도 괜찮다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날 가르쳐줄 거야?”

“그건…….”

자이안은 곤혹스런 심정에 말을 흐렸다. 그녀가 갑자기 찾아와 자이안에게 호의를 드러내는 건 자이안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였다.

그 얘기를 들은 첫날, 자이안은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고작 자신의 실력으로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자이안은 예전에 유리아에게 단검술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각성자들의 존재를 밝힐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그녀를 가르칠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다. 그런 가르침 자체가 안정적인 신분을 얻기 위한 일종의 거래이기도 했다.

지금은 신스도, 네 각성자들도 있었다. 자신보다 스승으로서 한참이나 뛰어난 이들이 즐비한데 자신이 나서서 에일레나를 가르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주제넘은 행동 같았다.

“저 말고 다른 분들에게 배우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될 거예요. 이미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럼 나도 몇 번이나 똑같이 대답할게. 난 네가 마음에 들어.”

꾸밈없는 순수한 말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 싸움에서, 내 눈에는 네가 가장 빛나 보였어. 그러니까 너한테서 배우고 싶어.”

“스승님은요?”

“어머니는…… 그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서.”

그것은 엘프라는 종족의 근본에 각인된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으로 보였다. 엘프는 모두가 신스를 존경하며 따르지만, 개인 대 개인으로서 관계를 갖는 것에는 부담을 넘어 두려움과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아직 어린 탓에 종족의 규칙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에일레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일 또 올게.”

경비대 일이 있는 에일레나는 성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었다. 그렇게 귀중한 시간을 쪼개 자신에게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이안은 때때로 터무니없이 미안했다. 그렇다고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스승님이나 삼촌에게 조언을 구해 볼까.’

홀로 떠나는 에일레나를 복잡한 심정으로 배웅하며, 자이안은 속으로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이봐, 신스 웰플레인. 잠깐 얘기 좀 하자.”

“무슨 일인가, 프레이 알코스?”

“……그냥 프레이라고 불러.”

“자네도 날 신스라고 편히 부르게나.”

“그래, 뭐, 그럼…… 신스.”

프레이가 고민 끝에 행동을 시작했다.

훈련을 마치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프레이가 신스를 따로 불러 멀찍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훈련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아 한껏 예민해진 청각으로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들은 신스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이건 어떠냐는 표정으로 프레이를 올려다보며 뭐라 말했다. 프레이는 떨떠름해 하며 침묵했다.

그러다가 한참 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스가 하하 웃으며 그의 팔뚝을 친근하게 두드렸다. 그리고 둘이 돌아왔다.

“무슨 얘길 한 거예요?”

“비밀이다.”

“이상한 얘기 한 거 아니죠?”

“비밀이라고 이 자식아.”

꼬치꼬치 캐묻는 유민을 밀어낸 프레이가 이번엔 아르스에게 향했다.

“아르스, 만들어줬으면 하는 게 하나 있다.”

“아티팩트?”

고개를 끄덕인 프레이가 이번에도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말했다. 아르스는 뭘 잘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왜?”

“왜긴 인마, 필요하니까 그러지. 얼마나 걸리냐?”

“글쎼에. 아무래도 견적을 좀 짜봐야겠는데. 하루 이틀 가지고는 안 될걸?”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

“그걸 대체 어디 쓰려고…… 에구, 난 모르겠다아.”

아르스가 될 대로 되라는 듯이 두 손을 아무렇게나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자이안은 점점 불안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크룩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크룩스는 슬쩍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프레이를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크룩스 형이 가만히 있는 걸 보니, 이상한 일을 하려고 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며칠 뒤, 오후.

「슬슬 약속 시각이군. 자이안, 잠깐 나 좀 소환해 봐라.」

갑작스런 요청에 자이안은 의아해하면서도 프레이를 소환했다.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당장이라도 어디 싸우러 갈 것처럼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장갑은 물론이고, 부츠와 로브, 목걸이까지 몸에 걸친 대부분이 고도의 아티팩트였다.

손에는 마치 드론처럼 보이는 원통형 기계장치를 하나 들고 있었다. 자이안은 직감적으로 눈치 챘다. 그가 며칠 전 아르스에게 만들어달라고 했던 모종의 아티팩트가 바로 저것이리라.

“신스는…… 벌써 나와 있나.”

창문을 내려다본 크룩스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바깥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자이안은 문득 그때 느낀 불안한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급히 프레이를 따라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대로 시작하겠느냐?”

“보는 사람도 없는데 우리끼리 시작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 일단 애들 좀 불러 모으고…… 어, 자이안. 안에 들어가서 애들 좀 불러와라.”

“갑자기 뭘 하시려고요?”

“모의전. 나랑 신스랑.”

“……예?”

상상도 못 한 전개에 자이안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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