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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스승과 제자(2) (109/210)


109화 스승과 제자(2)
2023.01.20.


나뭇가지가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 황야를 가로질렀다. 자이안은 그 널찍한 등판 위에 앉아있었고, 신스는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반쯤 파묻혀 있었다.

「자이안, 내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는데,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참고 있었거든? 근데 더는 못 참을 것 같다.」

각성자들은 그동안 미뤄온 의문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프레이가 대표로 총대를 멨다.

「이 여자애…… 끽해야 중학생이나 됐을까 싶은 꼬맹이가 진짜 네 스승이 맞는 거냐?」

‘맞는데요?’

자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게 뭐가 이상한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은 말이었다. 각성자들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하이엘프면 적어도 수백 년, 넉넉하게 잡으면 수천 년은 살았을 거 아니냐? 그런데 저런 모습이라고?」

‘그게 왜 이상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자이안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간신히 프레이의 말뜻을 알아듣고 엄한 표정을 했다.

‘스승님을 인간의 잣대로 재단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건 또 뭔.」

‘말 그대로의 의미예요. 삼촌 말씀대로 적어도 수천 년을 변치 않고 살아오신 분이세요. 그 자체가 평범한 생물은 상상할 수도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죠. 그러니까 스승님에 한해서는 그 어떤 이상해 보이는 일도 이상하지 않은 겁니다. 의문을 가지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세요.’

프레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의 말에 납득한 게 아니라, 그냥 대화를 포기한 것이다. 당장은 무슨 얘길 해도 똑같은 말만 돌아올 게 뻔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네요. 어차피 저희는 하이엘프라는 종족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정말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수천 년 동안 사는 종족일 수도 있죠.」

「그래도 되게 애늙은이 같은 말툰데 신기하게 어울리는 거 보면 오래 산 게 맞긴 한가 봐요.」

「아니…… 으으으음. 이거 왠지 사기당한 기분인데.」

프레이는 은연중에 품고 있던 엘프라는 종족에 대한 환상이 이번에야말로 흔적도 없이 산산이 박살나는 기분이었다.

“거의 다 왔구나. 자이안, 세계수를 가까이서 본 적이 있느냐?”

“아까 전에 장로들한테 호출당해서 직접 들어가 보기는 했습니다.”

“뭐라고? 이런 괘씸한 놈들, 감히 내 사소한 즐거움을 빼앗아?”

신스가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뒤통수를 가슴팍에 누르고 빙글빙글 돌리는 자기 스승을 내려다보며 자이안은 문득 떠오른 의문을 말했다.

“스승님. 아까 어린아이 취급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무슨 불만이라도 있느냐?”

“그…… 지금 이건 어린아이 취급이 아닌 겁니까?”

가슴팍에 폭 파묻혀 있던 신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직접 이러는 건 괜찮다. 신경 쓰지 말거라.”

“스승님이 괜찮으시다면야…….”

“수천 년의 길고 지루한 생에 단 한 명 받아들인 제자가 고작 10년, 눈 깜짝할 새에 이렇게 커다래져서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 나라고 어찌 반갑지 않겠느냐.”

무덤덤한 목소리에 그리움과 아련함이 희미하게 묻어났다. 자이안은 대답 대신 신스가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조금 더 거리를 좁혔다.

느릿느릿 걷던 호랑이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호랑이가 완전히 멈춰선 곳은 세계수 바로 앞이었다. 신스가 먼저 내리고, 자이안이 그 뒤를 따라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자 호랑이가 단순한 나뭇가지로 돌아가 바닥에 우수수 흩어졌다. 흙바닥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흩어진 나뭇가지들을 흔적도 없이 집어삼켰다.

“세계수에 직접 들어가 봤다고 했느냐? 그래도 이건 아직 보지 못했겠지. 자, 내 손을 잡아보렴.”

순순히 손을 붙잡은 순간, 갑자기 어마어마한 부유감이 자이안을 덮쳤다. 그대로 수백 미터를 날아올라 하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것만 같았다.

잠시 혼란에 빠졌던 자이안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러자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발밑에 단단한 지면이 닿았다.

“환영하마. 여기가 진정한 세계수 최상층이다.”

주변을 살핀 자이안이 숨을 삼켰다. 지면이라고 생각했던 건 지면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촌락 하나만큼이나 커다란 나뭇잎 위였다.

그런 나뭇잎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이 탁 트여 있었고,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다.

“세계수, 최상층.”

자이안이 멍하니 신스의 말을 따라했다. 앞서 걷던 그녀가 자이안을 돌아보고는 크후후, 장난이 성공한 악동처럼 웃었다.

“어떠냐? 제법 경치가 괜찮지 않느냐?”

“이런 데서 살면 추울 것 같은데…….”

“……잠깐 못 본 새에 낭만이 없어졌구나. 그래, 감기 걸리기 전에 얼른 들어오렴. 세계수 주변은 자동으로 기후가 조절되니 감기 따위는 걸릴 일 없지만 말이다.”

신스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쫓으려던 자이안이 그 순간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스, 스승님, 잠시만요!”

“이번엔 또 뭐냐?”

“제 일행들이 아직 아래에 있어요.”

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혼자 온 게 아니었던 게냐? 이 녀석아, 일행이 있으면 있다고 먼저 얘기를 했어야지. 나만 경우 없는 사람이 될 뻔했지 않느냐.”

급히 되돌아온 신스가 재차 자이안의 손을 잡았다. 또다시 부유감이 느껴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지상으로 돌아온 뒤였다. 결과만 보면 순간이동 마법과 비슷했지만 직접 느낀 감각은 순간이동과는 전혀 달랐다.

「허. 보고도 모르겠네.」

마안을 열고 순간이동이 일어나는 과정을 차근차근 살핀 프레이가 두 손을 들며 혀를 내둘렀다.

「형의 마안이 안 통했다고요?」

「그건 아니다. 힘의 흐름 자체는 읽었어. 근데 그게 왜 저런 결과로 이어지는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프레이의 말에 자이안도 속으로 놀랐다.

마법이 아니라 하이엘프 고유의 비술이거나, 아니면 엘프의 월등한 기술력의 산물일지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프레이조차 항복을 선언할 정도로 스승의 기술이 대단하다는 사실이 괜히 자랑스럽기도 했다.

“바깥에서 찾아온 인간 손님이라면…… 그래, 도시 외곽의 ‘성’에 있겠군. 서두르자꾸나. 모처럼의 손님을 언제까지고 방치할 수는 없지.”

신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자 눈앞의 지면이 불쑥 솟구치더니 점토로 만들어진 말 두 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스가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설득하려 했으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이안이 훌쩍 말에 올라탔다.

“왜 그렇게 보세요, 스승님?”

“아무것도 아니다.”

작게 웃은 신스가 마찬가지로 말 위에 올라탔다.

“어서 가자꾸나.”
 

* * *

두 필의 말이 나란히 달리는 동안, 신스는 자이안이 겪은 여정을 몹시도 궁금해했다.

자이안은 가장 처음, 나이아가 숨을 거둔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정을 빠짐없이 얘기했다. 지금까지는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일부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스에게는 모든 것을 밝히고 싶었다.

“인간들이란…….”

미오네가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마침내 자이안을 내쫓고 그를 암살하려 했다는 얘기를 듣고 신스는 그저 작게 탄식을 뱉었다.

얘기를 하는 자이안이 고통스러운 기색이라도 내비쳤다면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으련만, 정작 자이안은 남 일이라도 얘기하듯 초연했다.

“교만과 음욕은 결국 완전히 타락하고 말았나.”

“스승님께서는 둘을 알고 계셨군요.”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다. 이름만을 간혹 들었을 뿐이지. 한때 교만은 공명정대의 화신이라 불리는 법관이었고, 음욕은 자애로운 성모라고 불렸지.”

두 마족이 보여준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별명이었다. 자이안은 위화감에 신음을 삼키며 얘기를 계속했다.

“시기가 살아있었다고? 이런 맙소사. 그런 얘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거늘. 그럴 줄 알았다면 적어도 한 번은 찾아갔어야 했는데.”

한참을 이어지던 이야기가 마침내 엘프들의 도시에 도착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신스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이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가 시기와 만나고 선주인류에 대해 많은 것을 들었음을 알게 된 이상, 신스도 신인류 보호조약 따위를 되새기며 억지로 비밀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

“미오네, 그 여자가 원망스럽지는 않느냐?”

그러나 정작 가장 처음 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원망이라. 글쎄요…….”

멀리 보이는 성의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며 자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처음에는, 아마도 많이 원망했던 것 같습니다. 미오네 때문에 제가 누려야 할 권리, 짊어져야 할 의무, 모든 것을 강제로 빼앗기고 내팽개쳐진 채 길바닥에서 허망하게 죽을 뻔했으니까요.”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냐?”

“솔직히 말하면, 예. 그렇습니다. 그런 작고 연약한 여자에게 제 감정을 허비하는 게 부질없게 느껴지네요.”

하지만, 하고 자이안은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미오네를 용서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원망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가 지은 죄가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어요.”

죄에 대한 가치관은 보석탑과 법왕구 간의 전쟁을 겪으며 정립됐다. 여행 초기의 자이안이었다면 차마 미오네에게 죄를 묻지 못해 엉뚱하게 스스로를 책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잘못이 없지는 않다면서.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같은 죄라도, 돌이킬 수 있는 죄가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죄가 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죄는, 거의 대부분 그게 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지른 것들이다.

“미오네는…… 죗값을 치러야 해요. 만약 스스로 죗값을 치를 생각이 없다면, 제가 직접 그녀를 찾아가 속죄하게 만들 겁니다.”

“어른이 되었구나, 자이안.”

뜻밖의 말에 자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른이라. 지금도 프레이를 비롯한 다른 어른들에게 신세만 지고 있는 자신이?

“허나 자이안, 네 사상은 한 걸음 잘못 디디면 눈먼 독선이 되어 수많은 이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위태로운 사상…… 이라고, 스승 된 입장으로서 쓴 소리를 해야 옳겠지만.”

잠시 말을 멈춘 신스가 빙긋 웃었다.

“난 내 제자를 믿겠다. 네가 여섯 살 때부터 길러온 내 눈이니 확실할 게다.”

“스승님이 절 키우신 건 어렸을 때 2년뿐이셨잖아요.”

“나무가 제아무리 크고 높게 자란들 뿌리는 하나다.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영혼에 뿌리내린 천성은 결코 변하는 법이 없지.”

신스가 자이안을 똑바로 돌아보았다. 깊은 신뢰가 깃든 두 눈동자가 그를 부드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너라면 판단을 그르치지 않을 게다. 내가 보증하마.”

자이안은 치밀어 오르는 복잡한 감정을 누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란히 달리던 두 필의 말이 머지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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