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스승과 제자(1)
(108/210)
108화 스승과 제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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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스승과 제자(1)
2023.01.19.
엘프들에게 그 광경은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각성자들에게 로봇일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받았지만, 실제로 엘프들에게 감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하게 감정을 절제할 수 있도록 뇌에 칩을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을 뿐이다.
때문에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희생이 필요한 상황에서 결코 망설이지 않고, 최저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율을 내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정확히는, 전력의 1할 희생을 각오한 초대형 마물이 단 5명의 인간의 손에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줄 알았다.
“전원, 1차 저지선으로 복귀.”
그래도 그들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소란을 피우거나 혼란에 빠지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벌이지는 않았다. 다만 경악과 곤혹을 가슴속에 눌러 담은 채 조용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머니의 싸움을 보는 것만 같았어.’
그 무리에 에일레나도 섞여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어쩌지? 뭐부터 물어봐야 하지? 저 네 명의 인간은 어디서 나타난 거지? 자이안은 어머니께 대체 어떤 가르침을 받은 걸까? 어떻게 사람의 몸으로, 마나에 오염되지 않고 그걸 자유자재로 다루며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지?’
마침내 호기심이 절제를 때려눕혔다. 한 번 둑이 터지자 의문은 해일처럼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도 어머니께 가르침을 받으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에일레나의 두 눈이 전에 없이 의욕에 차 반짝거렸다.
“수비대의 대장이 누구죠?”
“접니다, 휴먼.”
자이안의 말에 전투복을 차려입은 엘프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에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한 두루뭉술한 인상이었다.
사실 엘프들 대부분의 인상이 그랬다. 마치 모두가 형제자매이기라도 한 것처럼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그나마 단둘이 차를 타고 오래 얘기를 나눈 에일레나 정도만 구분이 됐다.
“보다시피 마물은 저희가 쓰러뜨렸습니다. 한동안은 추가 습격은 없을 것 같네요.”
“불필요한 행동이었습니다, 휴먼. 마물 저지는 본래 저희 수비대의 역할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당신들이 저희의 힘을 명확히 알 수 있게 됐잖아요. 그러니 저희가 만에 하나라도 멋대로 날뛰기 시작한다면 당신들 선에서 결코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깨달았겠죠.”
수비대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이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힘을 앞세운 강제적인 협상.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휴먼?”
“스승님이 어디 계신지 알려주세요.”
“어머니의 위치는 저희도 모릅니다. 돌아오실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십시오, 휴먼.”
자이안은 입을 꾹 다물고 수비대장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수비대장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대치가 얼마간 이어졌다가, 자이안이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게요.”
“저희는 거짓말을 혐오합니다, 휴먼. 당신들과는 다르게.”
단호한 말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엘프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일관적으로 그런 태도였다.
「얘네들 아무래도 진짜 모르는 것 같은데.」
결국 안 좋은 예상이 들어맞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엘프들이 신스 웰플레인의 행방을 모른다는 게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엘프들은 그녀를 어머니라 칭하며 신성시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다 한들, 이를 붙잡고 어디로 가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우리끼리 숲속을 뒤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글쎄다. 이게 보통 넓어야지. 그렇다고 닥치는 대로 불 지르고 다닐 수도 없는 거 아니냐.」
「아저씬 왜 불태우고 때려 부술 생각을 먼저 해요?」
「그렇게 해야 찾기 더 편하니까. 뭐, 왜. 꼬우면 네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해보든가.」
「으그극.」
유민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각성자들은 잠시 어떻게 하는 게 더 좋을지 논의를 시작했다.
그때, 자이안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닿았다. 그 소리는 조금 전 초대형 마물을 쓰러뜨렸던 산맥 건너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무언가를 두드리는 듯한…… 혹은 높게 쌓은 무언가를 무너뜨리는 듯한, 그도 아니면 수많은 생물이 요란하게 발을 구르는 듯한 기묘한 소리. 자이안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마물의 습격이 끝이 아닌 건가?’
자이안의 표정에서 불온한 낌새를 느낀 각성자들이 답이 없는 논의를 멈췄다.
「자이안? 왜 그러냐?」
‘산맥 건너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마물의 2차 습격이 시작될지도 몰라요.’
산맥으로 가로막힌 탓인지 마물의 냄새는 아직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면서 들은 에일레나의 설명에 따르면, 마계와 이어진 균열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곳이 바로 북쪽 산맥 너머라고 했다.
소리의 근원이 마물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조금 지나자 엘프들도 이를 느꼈다. 수비대 사이로 긴장된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산맥을 노려보던 수비대장이 두 눈을 검게 물들이며 더듬이를 뻗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으로 한숨을 뱉었다.
“뭐 하는 겁니까? 어서 싸울 준비를 해야죠.”
“긴장하지 마십시오, 휴먼. 적이 아닙니다.”
“뭐라고요? 그럼 이건 대체 무슨 소리…….”
산맥 너머에서 그것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이 바위로 이루어진…… 아마도 동물인 것 같았다. 울퉁불퉁한 굴곡 탓에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곰을 닮은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크기였다. 산맥 꼭대기에 서 있는 그 곰은 마치 작은 동산 위에 올라서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곰을 시작으로, 산맥 너머에서 나뭇가지나 진흙, 자갈 따위로 만들어진 온갖 동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선선한 바람을 타고 냄새가 자이안의 코끝에 닿았다.
MP의 냄새였다. 지금까지 맡은 어떤 마물, 마인, 마족과도 전혀 달랐다. 저도 모르게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은은하고 온화한 냄새였다. 처음으로 맡아보는 냄새였지만, 신기하게도 그리움이 느껴졌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곰이 지축을 뒤흔들며 산맥을 뛰어 내려왔다. 자이안도 마주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걷는 속도였다가, 점점 빨라지더니 순식간에 뜀박질이나 다름없는 속도가 됐다.
곰의 머리 위에 누군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호방하게 웃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손수 찾아온 제자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것처럼. 10년에 달하는 공백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바로 어제 봤던 것 같은 그 웃음이었다.
자이안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소리쳤다.
“스승님!”
* * *
“자이안, 내 하나뿐인 제자야. 이제 보니 네가 보기보다 성격이 제법 급했구나? 이렇게 일찍 나를 찾아오다니 말이다.”
천천히 속도를 줄인 곰이 얌전히 자리에 멈췄다. 머리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녀 ― 하이엘프, 신스 웰플레인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자이안은 당장이라도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모자란 제자가…… 하나뿐인 스승님을 뵙습니다.”
일리움에서 통하는, 제자가 스승에게 바치는 극상의 예법이었다. 신스 웰플레인이 손수 자이안에게 가르친 예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설마 그걸 자기가 받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한 그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되었다, 제자야. 일어나렴. 너와 나 사이에 그런 딱딱하고 번거로운 예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잠시 예를 지켰던 자이안이 고개를 들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신스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자이안이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는 불쑥 들어 올렸다.
“하하하하! 스승님! 세상에,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그래, 그래. 네가 정말 많이 반가운 모양이구나. 잘 알겠으니 이것 좀 내려놓지 않으련?”
“제가 저택 별관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는 동안 얼마나 당신이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아뇨,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그것만은 모르실 겁니다! 지금 제가 얼마나 감동하고 있는지도!”
“그래, 내가 다 안다니까? 그러니까 일단 나 좀 내려놓으렴.”
“스승님, 그런데 대체 키가 왜 이렇게 작아지셨습니까? 바람 훅 불면 그냥 날아갈 것 같네요. 제가 한 번 안아 봐도 되겠…….”
“내려놓으라고 했지 않느냐, 이 녀석아!”
어디선가 나타난 나뭇가지를 쥐고 신스가 자이안의 정수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깡! 빈 캔을 후려치는 것 같은 청명한 소리와 함께, 조심조심 신스를 내려놓은 자이안이 머리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제 좀 진정됐느냐?”
“……예, 스승님.”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맘은 내 이해하마. 그래도 이 녀석아, 사제 간의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할 게 아니냐? 내가 무슨 어린아이더냐?”
“아뇨, 스승님. 제 하나뿐인 스승님이시죠.”
“두 번은 없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문득 신스의 시선이 자이안의 목에 걸린 펜던트에 닿았다. 잠시 펜던트를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숨죽이고 지켜보던 각성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심정이 되어 한숨을 뱉었다.
「펜던트가 어떤 물건인지 눈치 챘나 봐요.」
「난 우리 존재까지 모조리 까발려졌다는 쪽에 10달러 건다.」
이어서 신스는 산맥 중턱에 널브러진 초대형 마물의 시신에 눈길을 줬다. 턱을 매만지며 시신을 살피던 신스가 빙긋 웃었다.
“자이안, 네가 잡았느냐?”
“저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습니다.”
“엘프들과 힘을 합쳤다는 뜻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신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펜던트에 닿았다.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내가 네게 들어야 할 얘기가 아주 많을 것 같구나.”
“저도 스승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엄청나게 많아요.”
“크후후. 기대되는구나.”
마지막으로 신스는 정자세로 도열한 엘프 수비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수비대장이 한 걸음 나서서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했다.
“수비대 임무 수고 많았네.”
짧게 그들의 노고를 치하한 신스가 자이안을 흘깃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라면 자이안에게 깃든 내 기운을 못 알아보지는 않았을 터. 자이안을 맞이하는 데 미비함은 없었겠지?”
“규칙대로 시행했습니다.”
담담한 대답에 신스는 저도 모르게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신인류 보호조약의 내용이 하나씩 떠오르고 자이안이 이 만리타향에서 무슨 대접을 받았을지 자연스럽게 상상됐다. 신스는 이마를 탁 짚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으르렁거리듯 말하던 신스가 도중에 맥이 탁 풀려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 자리에서 윽박지른다고 들을 리도 없고, 제자 앞에서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 잘 알겠네.”
고개를 휘휘 저은 신스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