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거물 살해 (107/210)


107화 거물 살해
2023.01.18.


-자잘한 놈들은 내가 정리한다! 너희는 초대형의 시선을 끄는 데 집중해!

날아오른 프레이의 손끝에서 청백색 뇌전이 번뜩였다. 이윽고 수십 가닥의 번개의 사슬이 뻗어 나가 초대형 마물 주변의 적들을 일시에 구속했다.

그대로 손을 확 끌어당기자, 소형 중형 대형 가릴 것 없이 묶인 마물들이 속절없이 끌려오기 시작했다.

우직하게 전진하던 초대형 마물이 이를 알아채고 껍질 속에 파묻혀 있던 목을 길게 빼냈다. 그 순간, 크룩스가 내지른 주먹이 포탄처럼 쏘아져 놈의 턱을 후려쳤다. 몸길이만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체가 뒤뚱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자이안!

반동으로 튕겨 나온 크룩스와 교체하듯 자이안이 뛰어올랐다. 사선 위로 휘두른 칼날이 놈의 목 가죽에 부딪힌 순간 엄청난 반탄력이 손아귀를 후려쳤다.

칼날이 표면을 찢고 파고들었으나, 제대로 상처를 남기기에는 무기가 턱없이 작았다.

자이안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내력을 운용했다. 혈관을 타고 날카롭게 정련된 MP가 스펙트럼을 타고 뻗어 나가 놈의 체내로 파고들었다. 상처가 벌어지며 회색 피가 쏟아졌다.

그―오―오―오―오―오―!

놈이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소리라기보다는 충격파에 가까웠다. 지근거리에 있던 자이안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놈이 머리를 다시 껍질 속에 집어넣었다. 여섯 개의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겁먹고 껍질 속에 숨은 거북이 같은 모습이었다.

동시에, 놈의 등껍질 위에 펼쳐져 있는 숲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메말라 있던 나무들이 되살아나 순식간에 녹음이 우거지더니 열매가 맺히고, 이윽고 툭툭 떨어졌다. 그리고 열매가 쪼개지면서 중소형 마물들이 태어났다.

-젠장! 하필 마더 타입이네!

다른 마물들을 모두 정리한 프레이가 그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찼다. 터무니없이 높은 방어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마물들을 만들어내며 물량전을 펼치는 귀찮은 마물이었다.

-제가 움직임을 막을게요!

마물의 머리 위에 거대한 빛의 십자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대로 내리꽂혀 놈의 등껍질을 짓눌렀다. 등껍질 위 마물들의 움직임이 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둔해졌다.

땅에 착지한 크룩스가 다시 한번 뛰어올라 놈의 등껍질 위에 올라섰다. 잠시 나가떨어졌던 자이안도 한 박자 늦게 크룩스를 뒤따랐다. 한 차례 시선을 교환한 뒤, 둘은 유민의 마법에 묶인 마물들을 파죽지세로 섬멸하기 시작했다.

-아르스 누나, 이거 너무 단단한데요. 일단 방어력을 약화시켜야겠어요.

-대응되는 아티팩트를 만들게.

몇 번 등껍질을 때리기도 하고 걷어차기도 한 크룩스가 결국 도움을 요청했다. 유민을 호위하던 아르스가 곧장 아티팩트 생산을 시작했다.

-둘 다 비켜봐라. 내가 한번 해볼 테니까.

아직 처리하지 못한 마물이 소수 남아있었으나 둘은 지체 없이 마물의 등껍질 위에서 벗어났다. 머리 위에서 어마어마한 열기가 느껴졌다.

-섭씨 4만 8천도 작열검이다. 이것도 한 번 버텨봐라!

프레이가 두 손을 후려치듯 내리그은 순간, 그의 머리 위에 나타난 길이 수십 미터의 불꽃의 검이 그 손동작을 따라 수직으로 휘둘러졌다. 놈이 짊어진 마를 낳는 숲이 삽시간에 불타 재가 되어 사라졌다.

-빌어먹을. 손아귀가 다 얼얼하네.

프레이가 욕설을 뱉으며 불꽃의 검을 거둬들였다. 마물의 등껍질에 검게 그을린 커다란 자국이 두 줄기 새겨졌다. 그러나 그뿐, 프레이의 마법마저도 제대로 된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등껍질을 공격해서는 답이 없겠다. 뒤집어서 뱃가죽을 공격하든, 아니면 저 껍질 속에서 대가리를 끄집어내든 해야겠어.

우―우―우―우―우―!

머리가 파묻혀 있는 부분 안쪽에서 마치 오열하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직경 수백 미터의 등껍질이 땅을 갈아엎으며 제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씹.

프레이가 급히 거리를 벌렸다.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유민과 아르스를 각각 자이안과 크룩스가 붙들고 마물에게서 멀어졌다. 제자리에서 프로펠러처럼 회전하는 놈의 주위로 토사가 폭발하듯 솟아오르며 무시무시한 폭풍이 일어났다.

-가만히…… 있어욧!

오랜 시간 집중한 유민이 다시 한 번 구속형 백마법을 펼쳤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강력한 것이었다. 마물의 전후좌우 위아래, 모든 위치에 거대한 빛의 장벽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대로 마물을 동시에 찍어 눌렀다.

쿠르르릉―! 산맥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비명을 질렀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토사와 바윗덩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중심에서 마물은 세 쌍의 다리만 밖으로 내놓은 채 혼란스러운 듯 버둥거리고 있었다.

-다리가 나왔군. 다시 한 번 간다!

프레이가 재차 작열검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한 자루, 대신 그 길이는 백 미터가 넘었다.

-뜨거울 테니까 다들 잠깐 물러나!

칼날이 지면을 기듯 낮게 휩쓸었다. 터무니없는 고열에 산맥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거창한 자연 파괴였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작열검이 놈의 다리 두 개를 깔끔하게 절단했다.

우―워―어―어―!

마물이 비명인지 포효인지 모를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그러더니 남은 네 다리는 물론 꼭꼭 숨어있던 머리까지 길게 빼내고는 메말라버린 산맥 중턱에 힘없이 널브러졌다.

모두의 머릿속에 공통된 생각이 떠올랐다. 해치웠나?

오―오오오오오오―!

그럴 리가 없었다.

일부 강력한 마물들은,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 그전까지는 쓰지 않던 특수한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각성자들은 이를 ‘두 번째 국면’이라고 표현하고는 했다.

-최유민! 똑바로 묶어!

-묶고…… 있어요! 하지만 반항이…… 너무……!

쩌정! 유리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물을 구속하고 있던 빛의 장벽이 산산이 부서졌다. 어마어마한 반동에 쓰러질 뻔한 유민을 자이안이 급히 부축했다.

유민은 이를 악물고는 얼굴을 흥건하게 적신 땀을 닦으며 다시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형! 머리를 내밀고 있는 지금이 기회예요!

-나도 안다!

앞으로 뻗은 프레이의 양손에 각각 새하얀 번개와 불꽃이 일렁였다. 유민이 곧장 그에게 축복을 걸었다. 프레이 본연의 힘과 유민의 축복으로 증폭된 두꺼운 번개의 사슬이 마물의 목을 칭칭 감았다.

마물이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으나 프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사슬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놈의 목이 우스꽝스럽게 보일 만큼 길게 늘어났다.

뒤이어 프레이가 불꽃이 휘감긴 손을 높이 들었다.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지고 불꽃의 채찍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귀찮게 굴지 말고 얌전히 뒈져라, 이 자식아!

채찍이 가차 없이 마물의 목을 노리고 뻗어 나갔다. 그 순간, 마물의 등껍질 위에 펼쳐진 황무지가 파도치듯 꿈틀거리고 그 중앙에 삽시간에 거대한 나무가 자라났다.

나무는 두꺼운 가지를 마치 팔처럼 움직여 프레이의 불꽃의 채찍을 대신 막아냈다. 그 대가로 나무의 절반 정도가 완전히 불타버렸으나,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다시 자라났다.

-하. 이건 또 뭐야?

나무껍질이 쩌적 갈라지더니 눈코입을 연상케 하는 형태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이안 일행을 노려보며 화난 것처럼 인상을 썼다. 프레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2페이즈인 모양인데요?

마물이 번개의 사슬을 가까스로 떨쳐내고 다시 목을 집어넣었다. 그 대신 네 다리를 꺼내 지면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표면이…… 단단해지고 있어.

아티팩트 제작과 적의 분석을 동시에 행하고 있던 아르스가 환영받지 못할 소식을 전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물의 전신이 검은색으로 물들고, 동시에 주변의 지면이 급속도로 말라붙기 시작했다.

-지력을 빨아먹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 힘으로 방어력을 올리고 나무를 재생시키는 것 같아요.

-골치 아픈 놈이군. 이거 시간을 오래 끌면 산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

둘의 대화를 들은 각성자들 사이에 불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단 한 명, 전선에서 잠시 물러나 마물의 동향을 가만히 살핀 자이안만이 예외였다. 그가 은색으로 일렁이는 눈동자를 아르스에게 향했다.

-약점을 찾았어요.

망토의 능력으로 동료들의 힘을 빌려 쓸 수 있게 됐으나, 원본에 비하면 성능도 떨어지고 제한도 많았다. 유리아의 마안을 사용하는 것만 해도 가만히 멈춰선 채 오랫동안 적을 응시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도 적의 취약점을 가차 없이 꿰뚫어 보는 그 성질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스 님. 방어력을 약화시키는 아티팩트는 완성까지 얼마나 걸리죠?

-앞으로 8분 정도.

-전신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는 게 아니라 한 점만 잠시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진 아티팩트라면 제작 시간을 줄일 수 있을까요?

-기다려. 계산 좀 할게. ……아마 2분 정도 걸릴 거야.

-알겠습니다. 아티팩트가 완성되면 제게 신호를 주세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제가 지시하겠습니다.

스펙트럼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크고 무거운 무기로 변화시킨 자이안이 다시 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높이 뛰어올라 마물의 등껍질 위에 착지한 뒤, 재차 뛰어오르며 대형 도끼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절단이 아니라 분쇄되어 나가떨어진 두꺼운 나뭇가지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멋대로 꿈틀거렸다. 프레이가 열선을 발사해 나뭇가지를 완전히 불태워 없앴다.

-삼촌, 크룩스 형, 유민 누나. 제게 작전이 있어요.

자이안이 핵심만 간추려 빠르게 작전을 전했다. 각성자들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마물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파괴하고, 재생될 때마다 산맥이 더 빠른 속도로 말라붙었다.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었다. 공격을 멈추면 지력을 빨아들인 나무가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날 것이 뻔했으니까.

다행히 불합리한 소모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준비를 마친 아르스가 텔레파시로 자이안을 불렀다.

-완성했어!

-삼촌! 크룩스 형! 작전대로!

크룩스가 마물의 머리가 숨은 껍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잠시 뒤, 안에서 웅웅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악스런 힘으로 놈의 머리를 밖으로 잡아 빼낸 크룩스가 턱짓에 휘말려 멀리 나가떨어졌다.

-삼촌!

마물의 머리가 다시 숨어들기 전에, 유민에게 축복을 있는 대로 받은 프레이가 열 가닥의 번개의 사슬로 그 목을 붙들었다.

놈이 지면에 박혀 있던 다리를 뽑아내더니 사납게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말라붙은 땅이 쩍쩍 갈라지며 토사가 산비탈을 타고 쏟아져 내렸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토사를 거슬러 오르며, 자이안이 뛰었다. 마물의 턱을 있는 힘껏 걷어차고, 반동으로 잠시 떨어졌다가 발판을 만들어 다시 놈에게 접근해 살짝 벌어진 입 틈새로 스펙트럼을 꽂아 넣었다.

스펙트럼이 무식하게 커지며 마물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마물도 필사적으로 목을 흔들며 자이안을 떨쳐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마물의 신경이 자이안에게만 쏠린 그 순간, 크룩스가 날아들었다.

꽈아앙! 전력을 담은 정권이 마물의 얼굴 측면을 후려쳤다. 놈의 입이 거짓말처럼 크게 벌어졌다. 그대로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며 크룩스는 자이안에게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뒷일은 그에게 맡기겠다는 듯이.

-프레이! 교대!

마물의 입이 크게 벌어진 순간 유민의 곁을 지키고 있던 아르스가 고속으로 날아올랐다. 백팩이 펼쳐지며 포구가 놈의 입안을 조준하고, 자이안의 요구대로 만들어진 아티팩트가 목표를 향해 정확히 쏘아졌다.

유리병에 담긴 액체 상태의 아티팩트가 병이 깨지며 놈의 입안을 적셨다. 이윽고 마물의 입안이 부식된 것처럼 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지속시간이 짧아! 3초 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야!

마물의 입안에 올라탄 자이안이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본래 이건 크룩스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들었다. 가장 손에 익은 모습, 장검으로 변형시켜 천천히 자세를 취했다. 일격필살, 절대명중의 찌르기.

“후우우우―”

길게 호흡한 자이안이 찰나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다음 순간, 그의 등 뒤로 헤일로가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세게 타올랐다.

동시에 유민이 온 힘을 다해 그에게 마지막으로 축복을 걸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강렬한 힘이 온몸에 넘쳐흘렀다.

마물의 체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심장과 자신을 잇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려졌다.

자이안이 뛰었다.

“……된 건가?”

탈진해 주저앉고 만 유민의 옆에 착지하며 프레이가 가늘게 눈을 떴다.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는 게 훤히 보였다. 크룩스가 담대하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자이안이라면 해낼 겁니다. 걱정 마세요.”

“뭐, 인마? 누가 걱정을 했다는 거야? 난 그냥…… 이번에도 못 쓰러뜨리면 귀찮아지겠구만, 하고 불평한 것뿐이다.”

“네네, 그러시겠죠, 아저씨.”

크룩스의 부축으로 간신히 몸을 일으킨 유민이 장난스럽게 비아냥거렸다. 프레이는 대답 대신 작게 코웃음만 쳤다.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던 마물이 돌연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등껍질 위에 자라난 거대한 나무가 힘없이 말라붙더니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다음 순간, 프레이의 공격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던 마물의 등껍질이 처참하게 갈라졌다. 놈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증거였다. MP로 강화된 비정상적인 방어력이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하, 멋지네요.”

마물의 체내를 찢어발긴 자이안이 균열이 번진 등껍질을 깨부수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마물의 피와 살점 조각 따위는 전신을 완전히 뒤덮은 헤일로에 막혀 조금도 그를 더럽히지 못했다.

요란한 땅 울림을 동반하며, 마물의 시체가 힘없이 널브러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