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엘프를 수식하는 말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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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엘프를 수식하는 말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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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엘프를 수식하는 말들(3)
2023.01.17.
“네게는 어머니의 행방을 알 자격이 없다.”
엘프의 대답은 단호했다. 자이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자격은 누가 주는 겁니까? 당신들? 아니면 스승님?”
“우린 어머니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세계수와 부락을 관리하는 임무를 대행 받았다.”
“스승님께서 적어도 도시 안에는 안 계신다는 말이군요?”
“네게는 그 대답을 들을 자격이 없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대답에 자이안은 탄식을 쏟아낼 뻔했다. 문득 신스 웰플레인의 말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성의 반대말, 융통성의 천적,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를 까먹는 고집불통!
“며칠 동안 당신들의 지시에 거스르지 않고 얌전히 지냈습니다.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까?”
“너의 행동은 순종적이었다. 그러나 그 행동과 이는 별개의 문제다.”
“제가 아무리 당신들의 지시에 순응해도 스승님이 어디 계신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다. 이런 뜻입니까?”
“그렇다.”
자이안은 이마를 짚었다. 자이안이 그동안 불평불만 없이 구속과 감시, 갇혀 지내는 생활을 받아들인 건 그렇게 하면 신스 웰플레인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첫 단추를 완전히 잘못 끼웠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놈들,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대답을 해줄 것 같지는 않은데.」
프레이의 말대로다. 융통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이 꽉 막힌 엘프들이, 설령 죽을 위기에 처하더라도 대답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대로 죽으면 죽었지.
「수확이 아예 없지는 않네요. 그 하이엘프가 적어도 도시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잖아요?」
지금까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앞으로의 방침을 새로이 세울 수는 있게 되었다.
「하나, 지금까지처럼 얌전히 이 도시에서 기다린다. 자리를 비웠다고 한 이상 언젠가는 돌아올 테니까.」
「나머지 하나는 직접 숲을 돌아다니면서 하이엘프의 행방을 찾는 거고요.」
어느 쪽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전자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고, 후자 역시 어지간한 나라보다도 넓은 숲을 샅샅이 뒤지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자이안, 혹시 스승님이 가까이 있으면 위치를 알 수 있다거나 하는 그런 건 없어?」
‘스승님이라면, 제가 가까워지면 제 위치를 알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마물이나 마족이라면 MP의 냄새를 맡아 위치를 알 수 있겠지만, 그 외의 존재를 상대로는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하이엘프도 선주인류의 유산이기는 마찬가지잖아? 그러면 MP의 냄새를 맡을 수 있지 않을까아?」
아르스의 추측은 그럴듯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드넓은 숲속에서 사람 한 명 찾는 난이도가 유의미하게 낮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젠장.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또 기다리라고?」
프레이가 인상을 쓰며 불평했다. 당장으로선 별다른 수가 없어 보였다. 한편으로, 자이안은 어차피 이제 여행도 막바지인데 조금 더 기다리는 것 정도야 별것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몇 년 동안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 테고.
그런 식으로 자이안이 나름대로 마음을 다잡으려 한 그 순간이었다.
“……!”
일순간 소름 끼치는 감각이 자이안의 온몸을 훑었다. 오감으로는 느낄 수 없는 특수한 MP의 파동이었다. 발산지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그 의미는 경고였다.
“청문회는 이걸로 마쳐야겠군.”
엘프들이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이안 알레프. 네가 맹약을 모른다고 해서 맹약이 없었던 것이 되지는 않는다.”
“가서 맹약을 이행하라.”
듣고 있던 자이안은 기가 차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그 맹약이라는 게 대체 뭔데요?”
* * *
장로들은 끝까지 자이안의 질문에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분을 삭이며 방을 나가니, 복도 끝에 에일레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딘지 미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저들이 제게 맹약을 이행하라더군요.”
“방금 전에 들었어. 네가 맹약을 이행할 수 있게 너를 안내해 주라고.”
“그런 주제에 맹약이 뭔지는 아무것도 안 알려줬습니다.”
“아.”
에일레나의 얼굴이 곤혹으로 물들었다. 그 표정을 보니 자이안은 화가 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에일레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에게 분을 푸는 건 엉뚱한 화풀이다.
“미안해요. 당신에게 화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데.”
“아, 아냐. 나야말로 미안해.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데려와서.”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며 에일레나가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알레프 가의 가주는 대대로 유년기에 하이엘프의 축복을 받아. 그 대가로, 성년이 되면 가문을 잇기 전에 한 번 숲에 찾아와서 우리 대신 마물을 토벌해주지. 우리들만으로 숲 전체를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여기도 마물이 나온다고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나무라는 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납득에 가까웠다.
“너, 지금 몇 살이야?”
“17살이요.”
“17살…… 너무 어려. 알레프의 적자가 맹약을 이행하기 위해 찾아오는 건 보통 스무 살이 넘은 뒤야. 알레프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상으로 나와 차에 옮겨 타면서 자이안은 대략적으로 알레프 가의 사정을 얘기했다.
“저는 적자이긴 하지만 가문에서 쫓겨난 처지예요. 지금 적자로 추앙받는 건 제 배다른 동생, 바란드 알레프일 겁니다. 저는 어머니의 불치병을 물려받아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거든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얘기를 모두 들은 에일레나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 세상에.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네. 아니지, 어떻게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인가? 네 동생이 축복을 받지 못하면 맹약은 자연스럽게 깨질 거고, 그러면 어머니를 묶고 있는 족쇄가 하나 사라지는 셈이니.”
“왜 알레프 가가 스승님과 맹약을 맺고 있는 거죠?”
“정말로 몰라? 구인류와 만났다면서. 너희 가문이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길 중 하나를 막고 있잖아.”
상상도 못 한 대답에 자이안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복마전 말씀이세요? 거기에 마계……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고?”
“아, 그래, 복마전. 너희는 그 땅을 그렇게 불렀지. 맞아. 정확히는, 구인류가 대책 없이 차원을 뚫고 넘어가면서 세계 곳곳에 생긴 균열 중 하나가 거기에 있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되겠지만, 그러려면 인간은 물론이고 우리 기준으로도 까마득하게 오랜 시간이 필요해. 일리움은 그걸 틀어막으려고 만들어진 나라야.”
터무니없는 사실에 자이안은 작게 침음했다.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시기에게 마족에 관한 진실을 들었을 때였다.
“난 그때는 태어나지도 않아서 잘 모르지만…… 초기에는 어머니 혼자서 세계 곳곳에 생긴 균열들을 처리하려 하셨다고 해. 어려운 일이었지. 아무리 어머니께서 강대한 권능을 가지셨어도 몸은 하나니까.”
한계에 봉착한 그녀는 결국 당시 원시적인 수준의 문명에 불과했던 인간들과 협력하기로 했다. 스스로의 힘을 쪼개 축복이라는 형태로 일부의 인간에게 부여하여, 그들로 하여금 균열이 닫힐 때까지 마물들과 싸우는 역할을 맡겼다.
그로부터 까마득하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균열이 모두 닫히고 복마전과 알레프 가문이 남았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저한테 해줘도 돼요?”
“뭐? ……아차.”
에일레나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이건, 그러니까, 어어…… 네, 네가 맹약의 대상인 이상 어차피 알아야 하는 일이잖아? 일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인 거지. 맞아! 그리고 어차피 너랑 나밖에 모르는 얘기고. 그러니까…… 그, 비, 비밀이다? 다른 엘프들한테 얘기하면 안 돼?”
“하하.”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에일레나의 반응은 첫인상과 달리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걱정 마세요. 엘프들에게는 말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 대신 저도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스승님은 어디 계신 거죠?”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에일레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답할 수 없어.”
“대답할 수 없는 건가요? 아님 모르고 있는 건가요?”
“그건…….”
운전대를 쥔 손을 초조하게 쥐락펴락하던 에일레나가 결국 한숨을 뱉었다.
“사실 나도 잘 몰라. 아마 장로님들도 비슷할 거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자이안은 말없이 납득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자주는 아냐. 하지만 가끔 있어. 아까 내가 균열 얘기했지? 대륙 어디보다도 가장 많은 균열이 남아있는 게 여기야. 어머니께서는 정기적으로 숲이나 그 너머를 순회하며 균열에서 나타나는 마물들을 정리하고 있어.”
그 말은, 대륙 어디보다도 세계수의 숲에 마물이 많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다짜고짜 맹약을 이행하라는 장로들의 말도, 경고의 의미가 담긴 강한 MP의 파동도 이해가 됐다.
“마물들이 여기를 습격하고 있군요.”
“지금은 아마 부락에서 떨어진 지점에 방위선을 펼치고 적들을 막고 있을 거야. 네가 할 일은 별로 많지 않을 거야. 어쩌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될 수도 있고. 막아내는 것뿐이라면, 우린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 않으니까.”
에일레나의 말은 드물게도 자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자이안도 그냥 구경만 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마물을 죽이는 건 각성자가 강해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무엇보다도, 이 숲 어딘가에 있을 스승께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 *
“발사 준비! 5! 4! 3! 2! 1! 제3포문 일제 포격!”
투두두두둥! 천둥소리를 연상케 하는 엄청난 굉음이 연달아 몰아쳤다.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며 낮게 울부짖었다.
“다연장 미사일 포대라니. 내가 이걸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추진체가 쏟아내는 흰 연기를 꼬리처럼 뻗으며 날아간 수십 발의 미사일이 산맥 중턱에 꽂혔다.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치솟았다. 수 킬로미터는 떨어진 거리까지 공기가 찌르르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엄청난 방위체계이기는 하지만…… 마물을 상대로는 조금 부족하죠, 아무래도.”
마물에게는 화력 병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 지구에서는 상식으로 통한다.
그러나 엄밀히는 반대다. 제아무리 강한 생명력을 가진 마물이라도 기관총을 쏟아부어 벌집으로 만들면 맥없이 죽는다. 중소형 마물 따위는 흔적도 없이 날려버리는 폭격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 하나하나가 돈이라는 사실이다. 미사일 하나, 하다못해 탄환 하나도 만드는 데 돈과 시간이 든다.
각성자는 그렇지 않다. 각성자의 힘은 마물의 생명력의 근간이 되는 MP에 간섭해, 그 질긴 생명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때문에 화력 병기에 비하면 아주 적은 노력으로 마물을 죽일 수 있고, 소재도 비교적 온전히 남는다.
“그렇다면 곧 저희 차례가 올 거라는 말씀이군요.”
스펙트럼을 쥔 자이안이 의욕에 차 말했다. 나란히 선 각성자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대륙 최북단으로 여겨지는 세계수의 숲. 그보다 더 북쪽에는 마치 거대한 벽을 연상케 하는 크고 긴 산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물들은 바로 그 산맥을 타고 끝도 없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엘프들의 방위선은 인상적이었다. 각종 화력 병기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원거리 섬멸에 집중했다. 대부분의 마물들이 산맥을 다 내려오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 병력! 거리를 유지하며 2차 방어선까지 후퇴! 남은 적은 2차 방어선에서 저지한다!”
그러나 압도적인 화력 투사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마물들이 존재했다. 다른 마물의 시체를 방패로 운 좋게 살아남은 중소형 마물들. 미사일 한두 발 정도로는 쉽게 죽일 수 없는 대형 마물들.
그리고 마물들의 가장 후미에, 대형 마물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압도적인 크기의 마물이 하나 있었다. 세 쌍의 다리를 가지고, 거북을 연상케 하는 몸체에, 등껍질 위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진 마물.
놈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산맥이 비명을 질렀고 지면의 흔들림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엄청 크네에. 나 초대형하고 직접 싸우는 건 처음인데.”
“그런 것치고는 하나도 긴장 안 한 거 같네요, 언니. 전 지금 떨려서 죽겠어요.”
“걱정 마라. 예전 한 번 잡아봤는데 별거 아니더라고.”
프레이의 농담에 자이안을 제외한 모두가 작게 웃었다. 그때 프레이의 곁에는 지구 최강의 각성자가 함께하고 있었다.
엘프들이 후퇴하자 자연스럽게 자이안 일행만 돌출되듯 툭 튀어나왔다. 엘프들 일부가 뒤늦게 이를 알아차리고 그들을 후퇴시키려 했으나 프레이가 펼친 결계에 막혔다.
“저 사람인지 로봇인지도 모를 놈들은 솔직히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프레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도 마물 놈들이 아무나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는 걸 구경만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아저씨, 그냥 솔직하게 사람 구하고 싶다고 말해요.”
“난 사람을 구하고 싶은 게 아니라 마물을 때려죽이고 싶을 뿐이다.”
프레이가 장갑을 죄었다. 아르스가 백팩을 전개하고, 크룩스가 하얗게 불타오르는 두 주먹을 맞부딪쳤다. 유민이 빠르게 축언을 읊어 모두에게 축복을 내렸다.
헤일로를 밝게 불태우며,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