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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엘프를 수식하는 말들(2) (105/210)


105화 엘프를 수식하는 말들(2)
2023.01.16.


일행들이 다 같이 뒤따르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엘프는 어디까지나 자이안만을 지목하며 다른 이들을 막았다. 유리아가 특히 납득할 수 없다는 투였으나 자이안은 괜찮을 거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게다가 펜던트가 있으니 정말로 혼자인 것도 아니었다. 유리아도 결국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성자들이 보고 있는데 위험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생활은 불편하지 않은가, 휴먼? 건의 사항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라. 적극적으로 검토할 것을 고려해보겠다.”

“괜찮아요. 아주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런가? 그럼 됐다.”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몇 번 어설프게 대화가 이어지려다가 말았다. 엘프는 첫인상에서 예측했지만 그다지 붙임성 있는 성격은 아닌 듯했다. 어쩌면 자이안을 경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77호 님…… 이 맞죠?”

엘프의 얼굴을 유심히 살핀 자이안이 문득 익숙함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숲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 때 자이안의 말이 사실이라고 증명해준 그 엘프였다.

“날 물건처럼 부르지 마.”

돌아온 것은 뜻밖에도 날 선 대답이었다.

“네? 하지만 다른 엘프가 당신을 77호라고…….”

“그건 명령을 효율적으로 내리기 위한 단순한 식별명이야. 이름은 따로 있고.”

깜짝 놀란 자이안은 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실수를 하고 말았어요. 그러면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에일레나.”

잠시 머뭇거린 엘프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예쁘지만, 어떻게 보면 그냥 평범한 이름이었다. 일련의 대화에 가장 놀란 건 각성자들이었다.

「뭐야. 얘네 로봇 아니었어?」

「설마 지금까지 말투가 그냥 컨셉이라거나 그런 걸까요?」

「펜던트의 번역 기능이 제 할 일을 못 하는 걸지도 몰라. 미지의 언어를 처음 접하면 어학적 구조를 파악해서 번역을 최적화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니까.」

「엘프의 말이 독자적인 언어라면 자이안이 자연스럽게 알아듣는 건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에.」

‘엘프들은 저와 똑같은 로터스 공용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자이안의 말에 각성자들은 점점 더 미궁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크룩스가 돌연 새로운 의문을 떠올렸다.

「잠깐만요. 저쪽 세계 사람들, 지역이나 나라 구분 없이 모두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거죠, 지금?」

「응? ……어?」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모를 만큼 식견이 모자라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한 사람, 날 때부터 그런 환경에 놓여 있었던 자이안을 제외하고.

‘그게 이상한 건가요?’

「말도 안 되게 이상한 거다. 아니 뭐, 그렇다고 안 좋은 일이라는 건 아니다. 그냥 우리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될 뿐이지.」

「하하. 사실 지금 생각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죠. 자이안이 궁금할 테니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래요. 나라 하나만 넘어가도 식생활이나 복식이 크게 바뀌죠? 이름을 짓는 방식이 다르기도 하고. 언어도 비슷해요. 심지어 같은 나라 안에서도 각 지방의 특색에 따라 조금씩 구조적 차이를 보이기도 하죠. 이런 걸 지구에서는 방언이라고 하는데…… 아마 자이안의 세계에는 없는 개념이겠죠?」

‘처음 듣는 개념이에요.’

자이안의 대답에 크룩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말했듯이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다만 저희 입장에서는 제법 재미있는 화제거든요. 이런 현상이 자연적으로 일어났을 것 같지는 않고…… 누가 개입했을까? 선주인류? 세계수? 엘프와 하이엘프?」

「어느 쪽이 됐든 그 스승 하이엘프를 만나면 해결된다는 소리구만.」

「저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다른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되겠죠.」

그러는 동안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 앞에 차량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버스가 아니라 4인승 중형차였다. 엘프, 에일레나가 먼저 앞 좌석에 앉았고, 자이안은 잠시 고민 끝에 그 혹은 그녀의 옆에 탔다.

“……뒤에도 자리 있는데.”

“옆에 앉으면 친해지기 쉬울 것 같아서요.”

“불필요한 짓을…….”

불평하듯 중얼거리면서도 에일레나는 딱히 자이안을 내쫓지는 않았다. 이윽고 문이 스르륵 닫히고 안전벨트가 자동으로 뻗어 나와 둘의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 운전대를 쥔 에일레나가 가속페달을 밟았다.

「문이랑 벨트는 자동인데 운전은 또 수동이네. 뭐 저런 차가 다 있냐?」

「차주의 취향 아닐까요? 이쪽에도 손맛이 없다며 일부러 자동주행 끄고 다니는 사람들 많잖아요.」

무거운 엔진음과 함께 차가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무표정으로 전방을 응시하는 에일레나는 자기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려는 의사는 조금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이안이 과감하게 나서기로 했다.

“말투가 바뀌셨네요.”

“뭐?”

“전에는 저희를 휴먼이라고 부르면서 딱딱하게 말씀하셨잖아요.”

“그건…….”

에일레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을 흐렸다. 자이안이 한발 늦게 말을 덧붙였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안 하셔도 돼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내가 너와 대화를 해도 되는지 판단이 안 돼서.”

“규칙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래.”

“그 이상…… 신기한 말투도?”

“이상하다고 말해도 돼. 그건 그냥 내가 아직 어린 엘프라서 그런 거야.”

이상한 대답이었다. 엘프는 나이를 먹으면 그런 말투로 변하기라도 한다는 뜻인가?

“비슷해. 엘프가 성인이 됐다는 증명이기도 하지.”

“하지만 저는 지금 말투가 더 마음에 드는데…….”

“뭐?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차가 한 차례 속도를 높였다 줄였다 하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놀라서 돌아본 에일레나는 새하얀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건 불공평해. 나도 질문 좀 하자.”

“네? 아, 네. 그러세요.”

“어머니한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지. 어떻게?”

“그렇게 물으셔도…… 아버님께서 제게 스승님을 소개하셨고, 그 자리에서 스승님이 저를 가르쳐보겠다고 말씀하신 게 다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머니가 알레프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잖아?”

“스승님이 알레프 가를 싫어하신다고요?”

“뭐? 잠깐만. 너 ‘맹약’을 몰라?”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뉘앙스로 봐서는 알레프 가문과 신스 웰플레인 사이의 모종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 같았으나, 자이안은 그런 얘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미오네의 간계로 고립된 탓에 들어야 할 얘기를 놓친 것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모르면서 여길 찾아온 거야? 대체 왜? 어떻게?”

“스승님께 다시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요. 어떻게 왔냐면…… 평범하게 마차로 왔습니다. 여러분들도 보셨잖아요.”

“일리움은 대륙 서쪽 끝. 여긴 대륙 북동쪽 끝이잖아.”

“오래 걸리기는 했죠.”

자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에일레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스승님을 왜 어머니라고 부르는 건가요?”

다시 자이안의 차례가 돌아왔다. 질문을 들은 에일레나는 곤혹스러운 기색이었다.

“그건 대답할 수 없어. 신인류 보호조약에 저촉돼.”

“엘프들이 만들어진 존재이고, 스승님이 그 창조자라는 의미인가요?”

“…….”

에일레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두 눈에 놀라움과 경계심이 일렁거렸다. 입은 열지 않았지만, 그 표정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선주인류…… 당신들이 저희를 신인류라고 부르니까, 구인류라고 부르는 게 알아듣기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그를 만난 적이 있어요. 보석탑 지하에 자리 잡은 거대한 미궁의 심장부에서였죠.”

“그건 불가능한데.”

“그에게서 선주인류의 문명과 그들이 멸망하기까지의 과정, 그들이 차원을 떠나면서 만약을 대비해 세계수를 만들었다는 사실까지 모두 들었어요. 그걸 기반으로 엘프와 하이엘프라는 종족이 세계수의 관리를 위해 인위적으로 창조된 존재라고 유추할 수 있었죠.”

“…….”

“만약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그건 조약에 저촉돼.”

돌아온 것은 힘없는 대답이었다. 자이안의 추측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맹약 같은 게 문제가 아니었네. 장로님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후우.”

에일레나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긴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엄한 눈으로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가서는 되도록 그런 말은 하지 마. 잘못하면 보호 감찰이 아니라 구금을 당할 수도 있어.”

“제가 알아서는 안 될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에일레나는 굳은 얼굴로 대답을 피했다. 납득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일행과 떨어져 구금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자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끊어졌다. 에일레나가 속도를 높였다. 차는 세계수를 향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 * *

의자에 앉은 자이안을 중심으로 반원형의 탁상이 빙 둘러서 있었다. 마치 그를 포위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문득 자이안은 일전에 웨코스에서 본 공개 재판 광경을 떠올렸다.

차가 세계수 앞에 멈추고, 에일레나는 그를 세계수 내부로 안내했다. 놀랍게도 세계수는 복도와 방, 계단과 승강기가 존재하는 평범한 건물 내부 같은 구조였다.

에일레나는, 적어도 자신이 알기로는 처음부터 이런 구조였다며 자이안의 의문에 답했다.

승강기를 타고 곧장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최상층은 긴 복도와 그 끝, 단 하나의 방으로만 이루어진 간결한 구조였다. 에일레나는 자신의 안내는 여기까지라며 승강기 앞에 멈춰 섰고, 자이안 혼자 복도를 가로질러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자이안 알레프.”

탁상 중 한 자리에 빛이 비쳤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중장년으로 보이는 엘프가 무기질적인 표정으로 자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이안 알코스입니다.”

“이름에는 의미가 없다. 네가 알레프의 피를 이어받았는지가 중요하다. 페르지오 알레프의 자식 자이안 알레프. 맞는가?”

자이안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맹약을 이행하러 왔나?”

“맹약을 이행하기에는 많이 어려 보인다.”

이어 두 자리에 연달아 빛이 비춰지고 또 다른 엘프들이 말을 꺼냈다. 자이안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맹약이 뭔지도 모릅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분위기가 불안하게 술렁거렸다. 몇 개의 자리에 빛이 비치고, 마찬가지로 모습을 드러낸 엘프들이 낯은 목소리로 빠르게 대화를 나눴다.

「언제까지 이 웃기지도 않는 연극에 어울릴 셈이냐?」

결국 프레이가 참지 못하고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엘프들의 도시에 발을 들인 뒤로 지금까지, 비록 생활은 편했으나 목적에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못했다.

‘저들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때까진 어울려야죠.’

자이안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장로라는 칭호, 그리고 세계수 내부 최상층이라는 위치. 그들이라면 십중팔구 원하는 답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걸 순순히 들을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이기는 했지만.

“맹약이 뭔지도 알지 못하면서 여기를 찾아왔다고? 대체 무슨 이유로?”

“스승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자이안은 모습을 드러낸 엘프들을 쭉 둘러보았다. 신스 웰플레인의 모습은 여기에도 없었다.

“스승님은 어디 계십니까?”

이제 슬슬 대답을 들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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