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엘프를 수식하는 말들(1) (104/210)


104화 엘프를 수식하는 말들(1)
2023.01.15.


“여기서부터는 차량을 통해 이동하겠습니다. 휴먼에게는 다소 절차가 복잡할 수 있으니 집중해서 따라오십시오.”

눈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광경에 넋을 잃은 일행을 엘프들은 자비 없이 끌고 갔다. 태도 자체는 정중했으나, 절차를 어그러뜨리는 행동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단단한 벽돌이 깔린 도로변 보도를 따라 걷기를 얼마간, 그들의 곁에 유난히 커다란 사각형 차량이 낮은 엔진음을 내며 정차했다. 펜던트 너머로 지켜보고 있던 각성자들은 그 차량의 이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승합 버스였다.

“타십시오, 휴먼. 아무 자리나 자유롭게 앉아도 좋습니다.”

일행들이 어리둥절한 채로 등을 떠밀리듯 각자 자리에 앉자, 자동으로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했다. 운전석이 있어야 할 자리는 휑하니 깨끗했다. 프레이가 참지 못하고 감탄성을 토했다.

「자동주행 차량이잖아. 버스에 저걸 탑재했다고? 저거 대형용 인공지능 더럽게 비싸지 않냐?」

「요즘은 그래도 단가가 많이 싸진 편이죠. 아르스 마그나 랩의 지원 덕분에 아티팩트를 이용해 생산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거든요.」

「뭐? 아르스 너 그런 것도 하고 있었냐?」

「마물 재해는 완전 종식이 선언된 지 좀 됐잖아? 우리 같은 각성자들이 냉혹한 현대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먹고살려면 이것저것 해야지, 뭐어.」

「이것 봐라. 지금 10년 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잠수 탄 나 디스하는 거냐?」

「에이, 말은 바로 해야죠, 아저씨. 디스가 아니라 팩트 폭력! 솔직히 아저씨가 잠수 안 타고 제대로 협력했으면 마물 재해 종식 선언이 적어도 5년은 더 빨라졌을걸요.」

「아니 뭐, 누가 잘했다고 자랑이라도 했냐? 나도 내가 잘못한 거 안다. 이것들이 왜 나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가차 없이 쏟아지는 전방위 폭격에 프레이가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프레이가 빠진 공백을 채우느라 10년 넘게 고생한 셋의 값진 승리였다.

‘너무 안 좋게만 말씀하시지 마세요. 아무렴 삼촌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러셨을까요? 분명 사정이 있으셨을 겁니다.’

「끄어어억……!」

자이안의 순수한 변론이 마무리 일격을 가했다. 양심을 얻어맞은 프레이는 가슴을 움켜쥐며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이런 커다란 철 덩어리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달리지? 마차보다 서너 배는 더 빠른 것 같은데. 이런 게 상용화되면 유통에 혁명이 일어날 거야! ……기술만 몰래 가지고 나갈 순 없을까?”

다른 일행들은 연달아 마주한 신비한 경험을 만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호기심이 강한 유리아는 물론이고, 소아레스도 참지 못하고 몇 번이나 밖을 흘끔거리거나 버스 내부 구조를 유심히 살폈다.

그나마 태연한 건 케이 정도였다. 까마득한 과거이긴 했지만, 선주인류 시절 그들의 기술력은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도화되어 있었으니까. 케이도 이제는 그때의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자이안도 나름대로 점잖은 편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처럼 보이는 광경에 놀라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익숙한 듯 행동하는 각성자들의 대화를 듣다 보니 침착해질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각성자들이 바로 ‘다른 세계’의 사람이기도 했다.

「선주인류가 현대 지구보다도 더 선진적인 문명을 쌓아 올렸다면, 그리고 엘프들이 그 유산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물이 아니라 기계일지도 모른다니…… 겉으로만 봐서는 그냥 살아있는 사람 같은데요.’

「원래 이런 기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겉으로 봐서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실제 인간과 똑같은 존재를 창조하는 거예요. 자이안이 알고 있는 호문클루스 역시 바로 그걸 위한 비술이잖아요?」

자이안은 침음을 뱉으면서도 설득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시기가 말한 그들의 기술력이 사실이라면, 완전한 호문클루스나 각성자들이 말하는 ‘로봇’을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휴먼.”

한동안 도심을 달리다가 다시 외곽으로 빠져나온 버스가 천천히 멈췄다. 각성자들과의 대화에 집중하던 자이안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다소 갑갑한 느낌인 도심과 달리 외곽은 주변이 시원하게 탁 트여 있었다. 담장으로 둘러싼 부지 안쪽에는 지금껏 본 엘프들의 건축 양식과는 전혀 다른, 화려한 성처럼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에…….

“우와아아.”

유리아가 멍청히 입을 벌리고 얼빠진 탄성을 뱉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벽인 줄 알았다. 세상의 끝을 가로막고 있다는 끝없이 펼쳐진 장벽.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벽이 아니라 나무였다. 족히 수 킬로미터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야 일면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나무였다.

“이게…… 세계수.”

지금껏 전설로만 전해졌던 그 실체가 그들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 * *

“여기가 당신들이 지낼 숙소입니다. 현재 당신들의 문명 수준과 건축 양식을 참고로 하여 지어졌으니, 생활에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휴먼.”

지금까지 일행들을 이끌었던 엘프들은 간단한 설명을 마친 후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도심과 크게 떨어진 변두리에 지어진 외딴 성. 머무는 이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하도록 고립시키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사실 각성자의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맨몸으로도 돌아가는 건 그다지 어려울 게 없었으나, 당장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게다가 대우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성내에는 사소한 것까지 시중을 들어주는 엘프 시종이 수십 명 이상 대기하고 있었고, 매 끼니마다 온갖 신선한 재료들을 아낌없이 사용한 호화로운 요리가 제공되었다.

오는 동안에는 차고 있던 수갑도 그냥 풀어주었고, 각자 배정받은 침실이 있기는 했으나 서로 만나도 딱히 아무런 제지도 없었다. 단 하나, 유일하게 금지된 사항은 부지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정중한 건 좋은데…… 도무지 의도를 모르겠구만.」

“물어봐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는 어렵겠죠.”

「그렇겠지. 특히나 여기 시종들은 아예 대화가 통한다는 느낌조차 없으니. 목적이 있으니 닥치고 부수며 깽판을 부릴 수도 없고. 이거 상황이 영 이상하게 돌아간다.」

프레이는 이런 식으로 이도 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을 몹시 싫어했다. 반면 자이안은 느긋한 마음가짐이었다.

처음에는 무작정 숲 밖으로 내쫓으려던 엘프들이 신스 웰플레인의 이름을 듣고 반응을 바꿨다. 자이안이 그녀의 제자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다소 이상한 형태이긴 해도 그들의 도시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락했다.

이대로 마음 편히 기다리기만 해도 언젠가 스승과의 재회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게 자이안의 예상이었다.

「맞는 말이네요. 좀 태평하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어차피 여행도 막바지잖아요? 좀 느긋해져도 괜찮지 않을까요?」

「쯧.」

프레이는 혀를 차면서도 자이안의 방침에 동의했다. 일리움 국경 요새를 시작으로, 웨코스에 제국에 보석탑과 법왕국에 마지막으로 세계수의 숲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내달리기만 했다.

자이안이 그동안 구한 나라가 몇 개고 구한 목숨이 몇 명인데, 숨 좀 돌린다고 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할 일도 없겠다 훈련이나 좀 할까요? 성 앞에 공터가 엄청 넓어서 훈련에 쓰기 딱 좋겠더라고요.”

「뭐, 이 미친놈아?」

이런 상황에서도 자이안은 한결같았다. 프레이는 그걸 강박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쯤 되면 그냥 성격이고 개성이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나이아가 죽은 뒤 스승도 없이 혼자 훈련했다는 것도 그냥 자기가 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선 넘었나? 근데 진짜 그럴 것 같은 걸 어쩌겠어?’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시작되었다.

할 일이 없으니 훈련이나 하겠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이안이 정말로 하루 종일 훈련만 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일행들이 억지로 그를 쉬게 했다. 몸을 쓰는 훈련 하루 2시간 이상 금지. 마찬가지로 교재를 이용한 공부도 하루 4시간 이상 금지.

자이안은 처음에는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불편해했지만, 날이 지나자 조금씩 적응했다. 그는 그렇게 빈 자리를 일행과 함께 보내는 시간으로 채워 넣었다.

“자이안, 이거 한 번 먹어봐.”

“갑자기 웬 스튜예요? ……음, 맛있네요. 토마토 스튠가 봐요.”

“히히. 내가 만든 거야.”

“진짜요?”

스튜는 아무거나 되는 대로 넣고 대충 끓이면 완성되는 요리라는 오해를 사기 쉽고, 실제로 그게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지만 제대로 맛을 내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정성을 쏟아야 한다.

화력 관리와 시간 엄수, 그리고 요리가 완성될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는 인내심. 요리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또 가장 중요한 세 요소를 정직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원래 요리할 줄 알았어요?”

“에이, 그럴 리가. 나 원래 상회 영애인 거 알잖아. 아빠가 하도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성화라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는 것도 어려웠다구.”

“정말요? 유리아, 요리에 소질이 있네요.”

“그, 그런가?”

솔직한 칭찬에 입이 귀밑까지 걸린 유리아가 이번엔 다른 요리에 도전해 보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자이안 님, 갈아입을 옷을 준비했습니다. 갈아입으시고, 지금 입고 계신 옷은 제게 주시지요. 소매 끝이 해져 있으니 수선해드리겠습니다.”

소아레스는 한결같이 고마웠다. 스스로의 일을 후순위로 놓고 자이안과 유리아의 보좌에 매진하는 그 모습은 때때로 안타깝기도 했으나, 그런 것보다는 고마운 마음이 훨씬 컸다.

소아레스는 둘을 보필하는 것이 자신의 당연한 역할이라고 말했지만, 자이안은 그걸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라고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 진짜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소아레스. 매번 신세만 지네요.”

“괘념치 마시지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동행 초기에는 소아레스의 보좌를 거부하고 혼자서 해결하려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그녀의 작은 즐거움을 뺏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뒤로는, 그 대신 이렇게 그녀의 고마움을 잊지 않도록 매번 감사를 전했다.

“그러고 보니 소아레스, 아까 훈련 때 보여줬던 움직임 있잖아요. 손목을 이렇게…… 아니, 이렇게? 이렇겐가?”

“이렇게 말씀이십니까?”

“아, 맞아요! 그거예요. 배우고 싶은데, 가르쳐주실 수 있을까요?”

“자이안 님은 단검은 잘 사용하시지 않지 않습니까?”

“응용하면 다른 무기로도 비슷하게 쓸 수 있을 것 같고, 기술이라는 건 일단 배워 놓으면 언젠가 도움이 될 날이 오는 법이니까요.”

“후후, 알겠습니다. 내일 훈련 때 시간을 내서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지만, 소아레스는 유리아와 자이안이 이렇게 자신을 의지할 때마다 작은 충실감을 느끼고는 했다.

“케이, 오늘은 이쪽 첨탑에서 쉬는 거야?”

앞의 둘과는 달리 초탈하고 자유분방한 케이는 어디 숨어있는지 찾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본인 말로는 매일 매 시간 햇볕이 예쁘게 드는 위치가 다르고, 자기는 그걸 찾아다니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자이안은 케이의 입장이 되어서 그가 어디에서 쉬고 있을지 추측해보는 걸 일종의 놀이로 생각하며 즐기고 있었다.

“오늘은 엄청 빨리 찾았네.”

“운이 좋았지. 자, 그러면 자리를 옮길 때까지 어제 했던 이야기를 이어서 해줘.”

“알았어! 근데 우리가 어제 무슨 얘길 했더라?”

“자기가 만든 호문클루스한테 반해버린 선주인류 얘기.”

“맞다. 그 사람이 막 호문클루스를 완성한 것까지 얘기했었지? 사실 그 사람은 처음에는 그 호문클루스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어. 개인이 허가 없이 호문클루스를 만드는 것부터가 불법이라서, 만들자마자 바로 파기할 작정이었지…….”

선주인류 시대부터 살아온 케이는 그 어마어마한 세월답게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온갖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도 대단했지만, 그냥 이야기꾼으로서의 소질도 훌륭했다.

게다가 그가 해주는 이야기는 모두가 선주인류 시대의 실화를 기반으로 한 것이라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있었다. 시기가 알았다면 모처럼 지상에 보내줬더니 동족의 흑역사나 파헤치고 있다며 탄식했을지도 모르지만.

“자이안 알레프…… 알코스. 장로님들이 당신을 보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얼마간 온화한 시간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는 일행들에게, 마침내 변화가 방문했다.

“어서 준비를 하고 나와라, 휴먼.”
 

16737659799281.png

1673765979928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