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엘프와의 조우(3) (103/210)


103화 엘프와의 조우(3)
2023.01.14.


자이안과, 그와 대치하고 있던 엘프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대뜸 끼어든 엘프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겉으로만 봐서는 구분하기 힘든 외모에, 머리 위에 나뭇가지를 닮은 더듬이 한 쌍이 비죽 솟아 있었다.

자이안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런 더듬이는 없었던 것 같은데?

“77호. 또 허락 없이 외부입력 처리기관을 사용했습니까?”

“덕분에 저 휴먼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장도 해봐라.”

대장이라 불린 엘프의 표정에 미미하게 인상이 졌다. 그러나 그, 혹은 그녀는 별말 없이 다시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다음 순간 엘프의 머리카락 일부가 두 갈래로 삐죽 솟아오르더니,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뭉쳐 나뭇가지처럼 생긴 한 쌍의 더듬이로 변했다.

동시에 평범한 갈색이던 눈동자가 마치 먹물을 떨어뜨린 것처럼 깊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엘프의 더듬이나 검은 눈에 관한 전설은 이 모습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

더듬이 끝을 자이안에게 향하고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대장 엘프가 눈을 크게 치켜떴다. 대장 역시 부하와 마찬가지로 자이안의 말이 사실임을 알아차린 듯했다.

“휴먼, 정직하게 대답하십시오. 어머니와 무슨 관계입니까?”

“어머니라뇨? 혹시 스승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무슨 관계입니까?”

무덤덤하게 재차 되묻는 그 목소리에 은근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자이안은 두서없는 머릿속을 정리한 뒤 신스 웰플레인과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저택에서 아버지의 소개로 처음 만난 날부터, 제자로서 온갖 분야의 학문과 무술을 배웠다는 사실까지 모두.

“잠깐. 휴먼, 알레프의 혈통입니까?”

“어, 네. 맞아요.”

“조금 전에는 알코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거짓말입니까, 휴먼?”

“거짓말이 아니라, 알레프라는 이름은 버렸어요. 지금은 자이안 알코스예요.”

“어쨌든 그 혈통을 이어받기는 했다는 뜻이 아닙니까?”

자이안은 잠시 고민했으나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과의 연을 끊었다고 해서 피까지 모두 새 걸로 갈아치운 건 아니었으니까.

미오네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지만, 어디까지나 미오네 개인의 잘못일 뿐 알레프라는 이름에는 죄가 없기도 했다.

“미안합니다, 휴먼. 우리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대장이 엘프들을 향해 수신호를 한 번 하자, 그들은 들고 있던 금속 봉을 자로 잰 듯 조금의 오차도 없는 동작으로 등에 멨다.

자이안은 내심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프레이의 불길한 예언이 현실이 되지는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기계적인 속도로 다가온 대장 엘프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위해 자연스럽게 손을 붙잡은 순간, 철컥하고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자이안은 별생각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냉담한 은빛 금속광을 발하는 수갑이 자이안과 대장 엘프의 손목을 빈틈없이 연결하고 있었다.

“엥?”

대장이 자이안을 내려다보며 도저히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무덤덤한 투로 말했다.

“지금부터는 신인류 보호조약 제2조 7항에 의거해 휴먼들의 구속 및 감시, 인도 절차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엥?”
 

***

당장이라도 전투를 준비하려는 일행들을 자이안이 급히 말리는 사이, 소리도 없이 다가온 엘프들이 자이안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구속했다.

고작해야 한쪽 손목이 묶였을 뿐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싸울 마음이 수그러졌다. 상대에게서 이상하리만치 적의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좀…… 으음…….”

“감정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소, 소아레스! 은유, 은유!”

유리아는 기겁하며 엘프들의 눈치를 살폈으나, 정작 그들은 소아레스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유리아는 안도하면서도 내심 묘한 기분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소아레스에게 다가가 소곤소곤 말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감정이 없는 걸까?”

“지금까지의 행동을 살펴보면 감정이 전혀 없지는 않아 보입니다만, 매우 희박한 것 같습니다. 마치……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 감정을 절제하는 훈련을 받은 것 같군요.”

“소아레스가 어렸을 때 받았다는 훈련 같은 거?”

“훈련의 내용까지는 모르겠군요.”

“으, 응. 그렇겠지. 내가 괜한 소릴 꺼냈네.”

부주의하게 예민한 화제에 접했다고 생각한 유리아가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그러나 사실 소아레스에게 어릴 때 받은 훈련 같은 건 그렇게 예민한 화제도 아니었다.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말하지 않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거 꼭 해야 돼? 어차피 나한텐 아무 의미도 없는 건데.”

“이는 신인류 보호조약 제2조 7항을 이행하기 위한 정당한 절차입니다. 규칙은 지켜질 때 의미를 갖습니다. 얌전히 따르십시오, 휴먼.”

“난 애초에 사람도 아닌데?”

“규칙은 규칙입니다.”

“……자이안. 이거 어떡해?”

도무지 대화가 통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케이는 결국 자이안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자이안은 잠시 고민했으나 결국 쓰게 웃으며 그를 달랬다.

“일단은 순순히 따르는 게 좋겠어요. 불필요한 마찰은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

“어휴. 어쩔 수 없네.”

케이를 마지막으로 모든 일행이 구속을 받아들였다. 절차를 모두 마쳤음을 확인한 엘프 대장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땅이 움직였다.

쿠구구궁. 낮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일행들이 밟고 있던 지면이 통째로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닥이 갈라지며 나무뿌리가 솟아 나와 일행들의 허리를 단단히 고정하고, 이어 움직이는 바닥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말이 전력으로 달리는 것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휴먼의 다리로는 몇 년이 걸려도 부락에 도착할 수 없을 테니 이번만 특별히 태워주는 겁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휴먼.”

“어…… 고, 고맙습니다.”

선두에 선 대장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자이안은 얼떨떨해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저 장난치는 것 같은 말투도 그렇고, 묘하게 생물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한편, 각성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엘프의 정체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생물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하면 내가 좀 이상한 놈으로 보일 거라는 거 나도 잘 아는데, 저건 생물이라기보다는 마치…….」

말을 흐린 프레이가 세 사람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 행동을 크룩스가 이어받고, 뒤이어 유민과 아르스 순으로 각자 한 번씩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마침내 서로가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확신한 네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로봇.』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히 일치한 그 단어에 프레이가 피식 웃었다.

「다행이구만. 나 혼자 이상한 놈은 아니라서.」

「저쪽 세계의 문명 수준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우린 그 정도의 기술력을 가진 존재와 이미 만난 적이 있어요.」

「마족, 그러니까 선주인류 얘기죠?」

「정답이에요, 유민 씨.」

시기의 말에 따르면, 세계수가 바로 그의 동료인 대속자 중 한 명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세계수의 숲에만 살고 있는 엘프와 하이엘프라는 종족 역시 선주인류와 관련되었으리라는 건 논리적인 추측이리라.

‘로봇이라는 게 뭐예요?’

조용히 듣고 있던 자이안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지극히 당연한 그 질문에 각성자들의 말문이 막혔다.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아무 기반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로봇의 개념을 설명해주는 것. 막상 닥쳐보니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인공 생명체?」

「으음…… 아무래도 그거하곤 결이 좀 다르죠. 로봇의 정의를 어디까지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좀 다르긴 한데.」

‘인공 생명체라면, 호문클루스 말씀이세요?’

「호문클루스는 기본적으로 유기 생명체잖니? 로봇은 기본적으로 기계의 하위 범주니까, 그거하곤 개념이 좀 달라.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그렇지, 아티팩트를 예로 들어볼까?」

각성자들이 자이안에게 열심히 로봇의 개념을 알려주는 사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지면이 조금씩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이동 시간은 약 1시간 남짓. 그러나 엘프 대장이 호언한 대로, 이동 거리는 평범한 사람의 다리로는 몇 달이 걸려도 도착할 수 없을 만큼 멀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휴먼.”

마침내 지면이 완전히 멈추자 이번에는 엘프들이 일행을 직접 인도하기 시작했다. 수갑에 묶인 터라 영 좋지 않은 모양새이기는 했지만, 엘프들의 안내는 뜻밖에도 정중했다.

“경계하지 마십시오, 휴먼. 저희는 당신들을 해칠 의사가 없습니다. 당신들은 손님 자격으로 저희와 동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 좀 풀어주면 안 될까요?”

“규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휴먼. 자의적인 판단으로 규칙에 경중을 정해 이를 무시하는 것, 휴먼의 안 좋은 버릇입니다.”

일행들은 이전에 자이안이 엘프에 대해 했던 말들이 슬슬 납득되기 시작했다. 융통성의 천적.

대장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희미하게 흔들리며 나무들이 길을 만들어주었다. 뒤따르며 그를 지켜보던 자이안은 문득 숲 전체가 생물처럼 살아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시야가 갑작스럽게 탁 트였다.

“도착했습니다.”

“…….”

자이안은 멍청히 입을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전면이 유리로 뒤덮여 빛을 반사하는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그보다는 조금 낮은,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각을 맞춘 석조 건물들이 규칙적으로 서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재질의 돌이었다.

격자형으로 반듯하게 구역이 나뉜 건물들 사이로, 마찬가지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질의 석재로 깔린 도로가 트여 있었다.

마차 네 대는 너끈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은 도로였다. 그 도로 위를 마차가 아니라 바퀴가 달린 금속 덩어리들이 기수도 없이 저 혼자 달리고 있었다.

「허. 이런 세상에. 빌딩에, 포장도로에, 전기 자동차라고?」

넋이 나가 있던 각성자들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비록 자이안과는 다른 의미였으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희 부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휴먼.”

대장 엘프가 일행들을 돌아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중하게 환영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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