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엘프와의 조우(2)
(102/210)
102화 엘프와의 조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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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엘프와의 조우(2)
2023.01.13.
마지막 마을에 들러 부족한 물품을 보충하는 등의 준비를 마친 뒤, 마차는 다시 북쪽으로 나아갔다.
탁 트인 초원, 그리고 시선 끄트머리에 펼쳐진 광활한 숲이 보이는 전부였다. 나아가도 나아가도 똑같은 광경에,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으으, 추워라.”
영원히 같은 광경이 반복될 것만 같았으나,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마을을 나온 지 3일 정도가 지나자 날씨가 급격하게 싸늘해졌다. 기후를 조율하는 대결계의 범위를 마침내 벗어난 것이다.
“엘프들은 이런 추운 곳에서 어떻게 살지? 사실 다들 털북숭이인 게 아닐까?”
“글쎄요. 제 생각에는 아마…….”
며칠이 지나자 또다시 변화가 찾아왔다. 방한용품을 둘둘 매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찬바람이 어느새 잔잔해지고, 다시 기온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방심하지 않겠다며 오전 내내 방한용품을 두르고 있던 유리아는 결국 땀을 뻘뻘 흘리며 패배를 선언했다.
“자이안, 날씨가 자꾸 나만 괴롭혀.”
“망토 빌려드릴까요?”
“으…… 아냐, 됐어. 그래도 연장자로서 염치가 있지. 생일선물을 뺏어가는 건 좀.”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한 서대륙, 그중에서도 남쪽 반도 웨코스 출신인 유리아는 일행 중 특히 추위에 약했다. 그나마 각성자가 되어서 이 정도지, 평범한 몸이었다면 첫날부터 추위를 못 견디고 앓아누웠을 거라며 몸서리를 쳤다.
날이 따뜻해졌는데 방한용품을 두르고 있던 것도 그런 자신의 체질을 알고 있기에 한 행동이었다.
“숲을 중심으로 대결계와 비슷한 마법이…… 아니, 흐음. 마법? 이걸 마법이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슷한 일을 하는 무언가가 펼쳐져 있는 건 확실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프레이가 마안을 열고 주변을 둘러본 뒤 기후 변화의 원인을 밝혔다.
마법이라 단언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린 건, 이런 대규모 기후 조절을 만들어낸 것치고는 마력과 MP의 흐름이 지나치게 잠잠했기 때문이었다.
인위적인 마법이 아니라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기적적인 자연현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잠깐만, 이거…… 그렇구만. 마법사들이 만든 대결계라는 게 숲을 중심으로 펼쳐진 이 현상을 모방해서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겠어.”
“오, 그러고 보니…… 엘프들을 만나러 왔던 마법사들이 쫓겨난 다음 세운 게 보석탑이라고 그랬던가요? 그럴듯한 가설이네요.”
“이걸 엘프들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낸 게 확실하다면…… 제법 기대할 만하겠는데.”
그로부터 며칠을 더 나아간 끝에 마침내 마차는 숲의 초입이라 할 수 있는 지점에 다다랐다. 가까이에서 숲의 전경을 마주한 일행들은 말을 잃고 압도되었다.
가장 작은 것도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들이 마치 성벽을 연상케 할 만큼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어떠한 외부의 손길도 거절하겠다는 고집스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곳에 생물이 살고 있으리라는 상상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동물의 발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리는군요. 현재로서는 그것뿐입니다.”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집중한 소아레스가 말했다. 자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여기부터는 제가 앞장설게요.”
사전에 합의된 사항이었다. 일행 중에서 그나마 엘프와 간접적으로나마 접점이 있는 게 자이안이었고, 어릴 적 일이긴 하지만 스승 신스 웰플레인에게서 엘프와 만났을 때 필요한 예법을 배우기도 했다.
자이안이 앞장서서 엘프들을 만나고, 그들을 설득해 일행 모두의 방문을 허락받는 게 목표였다.
“말과 마차는…… 놔두고 가야겠군요. 도저히 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말이라도 어떻게 데리고 갈 수 없을까?”
그러나 자이안이 선두에 서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빼곡히 들어서 있던 나무들이 땅울림을 일으키며 천천히 움직이더니, 좌우로 비켜서서 길을 만들어낸 것이다.
일행들은 깜짝 놀라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정작 자이안도 깜짝 놀란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대단하다, 자이안! 나무들이 널 알아보나 봐!”
“아니, 이게 대체…… 전 여기 온 건 오늘이 처음인데요.”
“네 스승님이 미리 조치를 취해놓은 게 아닐까? 언젠가 자이안이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올지도~ 하면서.”
“그런 성격은 아니셨는데…….”
자이안이 조심스럽게 나무들 사이로 들어서자, 잎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마치 손을 흔들어주는 것처럼.
그러나 다른 일행들이 그 뒤를 따르려는 순간에는 나뭇가지들이 마치 쇠창살처럼 교차하며 거칠게 그들을 가로막았다.
“으엥?”
“자이안 님, 이건…….”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곤혹스러워하며 나뭇가지 너머로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점액질 몸으로 변해 밑으로 기어가려던 케이 역시 빈틈없이 바닥까지 가로막는 나무를 보고 다시 인간 형태로 변해 어깨만 으쓱였다.
「호불호 확실한 친구들이네요.」
「날아서 들어가면 어떨까요?」
「글쎄다. 모르긴 몰라도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은데. 그것보단 본보기로 한 놈 잡아다 태우는 건 어떠냐?」
「무시무시한 소릴 하네에……. 숲이랑 싸울 일 있어?」
「하. 바라던 바다.」
“그……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불온한 이야기를 듣다못해, 자이안이 용기를 내기로 했다. 가장 선두의 나무에 다가간 자이안이 조심스럽게 나무껍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무는 지금 바쁘니까 방해하지 말라는 듯 한 차례 몸을 흔들었으나, 그래도 자이안을 떨쳐내지는 않았다.
“저분들을 들여보내 주실 수 있을까요?”
-…….
“제 소중한 동료들이에요. 여러분들이 왜 저희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께서 우려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드릴게요.”
-…….
“만약 그래도 들여보내 주시지 않는다면, 저 역시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잠시 멈췄다. 자이안은 말없이 나무들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결국 고집을 꺾은 것처럼 나뭇가지가 좌우로 벌어졌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놈들이구만. 불타 죽기는 싫었나 보지?」
「형, 그거 삼림 파괴예요.」
「어쩌라고? 눈치 없는 놈이 나대다가 먼저 죽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니냐? 내가 그런 식으로 훅 간 놈들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이게 또 틀린 말은 아니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이안은 나무들을 향해 웃었다.
“제 고집을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남은 일행들이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자, 나무들이 마치 위협하는 것처럼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일행은 다시 자이안을 필두로 천천히 숲속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무는 그렇다 치고, 엘프들은 괜찮을까?”
“나무들이 허락했으니 그들이 뭐라고 하지는 못할 거예요. 엘프는 근본적으로 숲의 하수인이니까요.”
“그래? 신기하다. 나는 숲의 지배자라고 알고 있는데.”
“제국에서는 숲의 대리자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구전에 불과하긴 합니다만.”
“케이 너는? 뭐 아는 거 없어?”
“전혀 모르겠는걸! 엘프라는 종족은 내가 지상에 살고 있을 적엔 존재하지도 않았거든.”
저마다 엘프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얼마나 나아갔을까. 반복되는 경치에 질린 프레이가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뭣 좀 일어났으면 좋겠네.」
“삼촌, 좀…… 왜 항상 그런 불길한 말씀만 하세요?”
「아무 일도 없어서 멍하니 있는 것보단 그게 나으니까. 근데 충분히 가능성 있는 거 아니냐? 지구의 창작물에서는, 숲에 숨어 사는 엘프들이 낯선 인간의 접근을 경계해 다짜고짜 공격부터 하는 전개가 흔하거든.」
불안한 예감에 자이안은 낮게 침음했다. 사실 자이안의 세계에도 그런 내용의 문학이나 노래 같은 것들이 없지는 않았다.
엘프의 지나친 폐쇄성 탓에 진실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었고, 사실 자이안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는 게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불경스러울 수도 있는데…… 스승님이 여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으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네게 별말을 안 한 거다? 언젠가 네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거기에 관해서 말씀이 없지는 않으셨어요. 그렇다고 엘프들과 협상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신 건 아니고, 저는 당신의 제자니까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라, 숲도 엘프도 막지 않을 거다, 그런 식으로만 말씀하셨죠.”
숲이 자이안을 알아보고 길을 열어줌으로써, 그 말은 적어도 절반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스승님이 그러셨어요. 엘프는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니까, 숲이 허락한 이상 독단적으로 뭘 어쩌지는 못할 거라고. 다만 워낙에 융통성이 없는 종족이라, 어쩌면 사소한 마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긴 하셨는데…….”
문득 고개를 든 자이안이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이어 소아레스를 돌아보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의 무리들이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 사이를 바람처럼 가로지르며 가까워지는 소리가 났다.
“혹시 모르니 세 분은 물러서 계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 중에선 평범한 편인 유리아의 귀에도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이안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 프?”
미리 준비하고 있던 유리아가 감탄성을 터뜨리려다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말꼬리가 어중간하게 올라갔다. 그도 그럴 게 나무뿌리 같은 더듬이가 튀어나와 있지도 않고, 눈도 그냥 평범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였다.
자세히 보니 귀 끝이 사람과는 달리 뾰족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머리카락에 가려져 티도 잘 안 났다. 그나마 눈에 띄는 건 재질을 알 수 없는 독특한 복식.
그마저도 프레이를 비롯한 지구 쪽 각성자들이 평소 입는 옷과 비슷해서, 그렇게 신기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지? 지구 사람들처럼 입고 다닌다는 건 엄청 신기한 거 아닌가?’
“멈추십시오, 휴먼. 이 숲은 신인류보호조약 제1조 3항에 의거해 접근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막지 않을 테니 얌전히 돌아가십시오, 휴먼.”
그리 말하며 엘프들이 기다란 금속 봉을 꺼내 그 끝을 일행에게 겨눴다. 프레이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이런 미친. 저거 총 아냐?」
「에이, 설마요. 엘프들이 쓰는 특수한 마법 지팡이 같은 거겠죠.」
유민은 말도 안 된다며 웃어넘겼으나 다른 각성자들의 표정엔 한 줌의 웃음기도 없었다. 그러자 유민도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개인화기 같은 게 지금 자이안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엘프들이 현대화기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래. 바로 그거지.」
프레이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고 몇 가지 추측이 조립되었다가 다시 사라졌다.
“저는 자이안 알코스라고 합니다. 제 스승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자이안 역시 프레이와 의견을 나누고 싶었으나,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는 엘프들을 가만둘 수도 없었다. 그가 나서서 침착하게 말하자, 엘프들은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고 똑같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휴먼, 자기소개는 필요 없습니다. 임시 기억장치에도 남지 않을 불필요한 정보입니다.”
“제 스승님은 하이엘프인 신스 웰플레인입니다.”
“아, 거짓말. 휴먼의 안 좋은 습성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휴먼? 거짓말은 눈앞의 위기를 넘기는 대가로 그보다 더 큰 재앙을 가져옵니다. 매우 비효율적이며 근시안적인 습성…….”
“대장. 저 휴먼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