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엘프와의 조우 (1) (101/210)


101화 엘프와의 조우 (1)
2023.01.12.


대륙 서쪽 최북단에 위치한 드넓은 삼림 지대.

인류에게 세계수의 숲이라 이름 붙은 이 땅은 결코 접근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숲이 실제로 얼마나 넓은지, 동식물의 식생은 어떻게 되는지, 오직 이 숲에만 거주하고 있는 엘프라는 종족은 어떠한 자들인지 알고 있는 이들은 채 한 줌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지는 않다. 기원이 불분명한 오랜 전승으로나마, 숲과 엘프에 대한 얘기는 꾸준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별이…….”

깊은 밤. 한 줄기 희끄무레한 연기가 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며 솟아오른다.

“……제 위치를 찾아간다.”

탁! 눈을 가늘게 뜨고 밤하늘을 헤아리던 여성이 손에 든 담뱃대를 가볍게 털었다. 부스스 재가 흩날리며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무저갱처럼 깊고 검은 두 눈동자는 별의 운행을 더없이 명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인연이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아오고 있으니.”

몸을 일으킨 그녀가 앉아있던 그루터기로부터 훌쩍 뛰어 내려왔다.

“케케묵은 골동품들이 제 역할을 할 때가 되었군.”

그 순간, 숲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의 준동에 경계심을 끌어올리는 것처럼 사방에서 숨죽인 으르렁거림이 들렸다.

“소란 피우지 말게나. 밤이 많이 깊었네.”

길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별빛을 엮은 끈으로 한데 모아 묵었다. 희고 여린 목덜미가 드러나며 숲속에서 웅크린 것들이 입맛을 다셨다.

저 가느다란 목을 부러뜨려, 살과 뼈를 파먹고 피를 들이마시는 건 분명 최고의 쾌락일 터.

그러나 본능과 달리 그것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 강력한 본능을, 그보다 더 강하고 무거운 두려움이 짓눌렀다.

“그렇지, 그렇지. 예의를 아는 이들은 싫어하지 않는다네.”

여성이 손을 들어 올렸다. 건반을 두드리듯 허공을 쓰다듬자 바람이 휘몰아치며 온몸을 감쌌다. 반대쪽 손이 아래로 향하자 지면이 불쑥 솟으며 나무뿌리가 거꾸로 자라 그녀의 팔뚝을 휘감았다.

“얌전히 물러간다면 뒤쫓지는 않겠네. 훌륭한 거래라 생각하는데, 어떤가?”

-……!

웅성이는 소리가 급격하게 커졌다. 여성은 실망을 한숨에 담아 길게 내쉬었다.

“그게 자네들의 선택인가?”

-크르르륵……!

-키에에에엑!

-끼룩, 끼루루룩!

섬뜩한 울음소리가 숲을 가득 채웠다. 마물에 대해 박식한 이라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두가 단 하나만 모습을 드러내도 인간의 도시 따위는 삽시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강대한 마물의 울음소리라는 사실을.

“나는 무익한 살생은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 대상이 비록 그대들처럼 생명체라 칭하기에도 부끄러운 조잡한 존재들이라도 말일세.”

울음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에 따라 존재를 허락받지 않은 힘의 흐름 역시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여인은 빛바랜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이 옳다면, 아마 그 힘은 한때 ‘마나’라고 불렸을 것이다. 축복받은 힘이라 여겨졌지만, 결국 세계를 좀먹고만 불길한 힘.

“그런가. 정히 그러겠다면 더 이상 말리지는 않겠네. 다만…….”

여성이 딛고 선 지면이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땅속에서 온몸이 진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바람으로 이루어진 매와 나무뿌리가 엮여 탄생한 사슴, 암석으로 몸을 이룬 호랑이가 각각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으리란 기대는 버리게.”

동물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이내 그 수가 숲의 일면을 가득 채울 정도가 되자, 결국 분노와 살의가 두려움을 이기고 만 몇몇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수여. 해악을 멸하라.”

자연물로부터 탄생한 동물의 군단이 소리 없이 포효했다. 숲 전체가 공명하듯 진동했다. 그 위압감에 마물들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든 순간, 군단이 가차 없이 쇄도했다.

옛 전승에, 엘프는 숲의 하수인이라 불렸다.

그리고 그들이 모시는 하이엘프는, 숲의 화신이라 떠받들어졌다.

***

새벽이슬이 채 마르지도 않은 이른 오전. 거센 파열음과 숨소리, 금속음 따위가 숲의 정적을 요란하게 어지럽혔다.

“윽……!”

“마지막에 방향을 전환할 때 0.04초 정도 망설였네요. 자, 다시 해볼까요?”

눈으로 좇기도 어려운 속도로 내달린 자이안이 크룩스의 좌측 사각을 점했다. 그러나 사각이라고 생각했던 그 방향은 더 이상 사각이 아니었다. 시야 가득 날아오는 주먹을 본 자이안의 몸이 의식보다 먼저 반응했다.

거리를 벌리는 건 최악의 방책. 자세를 낮춘 자이안이 미끄러지듯 상대의 사정거리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이번엔 무릎이 인중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자이안은 두 손으로 무릎을 막은 뒤 옆으로 비껴내며 재차 거리를 좁혔다.

장검으로는 도저히 유효타를 먹이기 어려운 상황. 스펙트럼이 빛을 발하며 건틀릿으로 변했다. 콰앙! 서로의 주먹이 맞부딪치며 굉음이 공기를 찌르르 울렸다.

힘의 차이에 주르륵 밀려난 자이안은 곧장 자세를 정비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훈련이 지금보다 배는 더 어려워질 거라는 스스로의 말을 크룩스는 충실하게 지켰다. 이전까지 크룩스의 태도가 어린아이를 가르쳐주는 어른에 가까웠다면, 지금 자이안을 대하는 그 모습은 제자를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스승 그 자체였다.

‘으아아. 엄청 빨라.’

자기 몫의 훈련을 먼저 마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휴식을 겸해 둘의 훈련을 지켜보며 유리아는 눈이 팽팽 도는 것만 같았다.

속도는 분명 자신이 우위였다. 그러나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종횡무진으로 훈련장을 누비는 자이안의 움직임은 그 유리아마저 때때로 흠칫 놀랄 정도였다.

‘그보다 더 대단한 건 크룩스 오빠고.’

당연하지만 지금 크룩스는 진짜 실력의 편린조차 내고 있지 않다. 교육을 위해 자이안이 대응할 수 없는 절묘한 속도를 칼같이 유지하고 있다.

만약 자이안 대신 유리아가 저 자리에 있었더라면 크룩스는 지금보다 배는 더 빠르게 움직일 것이다.

‘큰일이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들어.’

문득 자기 손을 내려다본 유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크룩스에게 진심을 드러낸 이후, 지금처럼 자이안과의 격차가 어쩔 수 없이 신경 쓰일 때가 종종 찾아왔다.

소아레스나 다른 각성자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어이가 없어질 것이다. 자이안이 규격 외인 것처럼, 유리아 역시 훈련을 거듭하면서 착실하게 그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전투가 벌어졌을 때 자이안이 자신의 등을 허락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유리아를 최소한 다른 각성자들만큼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실 유리아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욕심인 것이다. 더 강해져서 지금보다도 더 자이안이 믿고 기댈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다는, 사람이 성장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마음가짐.

“두 분 모두, 고생 많았어요! 와, 배고프다. 얼른 가서 소아레스가 차려준 밥이나 먹죠!”

“오늘 아침은 유민 누나가 차려주신대요.”

“아, 그래요? 유민 씨 가사 능력도 훌륭하죠. 근데 음, 솔직히 말하면 전문직에는 못 당하는 것 같긴 해요.”

“그런 칭찬은 소아레스한테 직접 해주면 더 좋아할걸요? 유민 언니가 안 듣는 데서 해야겠지만.”

조금 전까지의 가혹한 훈련은 온데간데없이 셋은 화목하게 야영지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자진해서 아침 식사를 맡은 유민이 셋을 맞이했다.

“셋 다 고생 많았어! 자이안 너 완전 땀범벅이다. 세상에, 유리아는 더 하네. 크룩스, 유리아는 여자애라고요. 좀 점잖게 가르치면 어디가 덧나요?”

“하지만 근육은 점잖게 운동하면 안 자라는데요.”

“사람이랑 근육이랑 같아요?! 당신은 땀 냄새 나니까 저리 가요. 둘 다, 여기 수건. 갈아입을 옷이랑 속옷 준비했으니까 꼼꼼히 닦고 갈아입어.”

유민과 크룩스가 티격태격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몸가짐을 정리하고, 8명의 인원이 모두 모여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마차가 다시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전 마을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지금 향하게 될 마을이 북쪽의 마지막 마을이라고 합니다.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는 들어설 수 있을 겁니다.”

“세계수의 숲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네요.”

소아레스의 말에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몰고 있던 자이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여행의 종착점이 머지않았다는 실감이 났다.

자이안은 잠시 마부석 쪽에 난 작은 창틀로 마차 내부를 들여다봤다. 유리아와 소아레스, 그리고 케이. 그리고 지금은 지구로 돌아갔지만, 이 여정을 함께한 네 각성자까지.

그들을 만나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치밀었다. 자이안은 다시 앞을 돌아보며 저도 모르게 망토 자락을 죄었다.

“가면 정말 엘프들이 있을까?”

“글쎄요. 저도 엘프는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얘기만 들었을 뿐이라, 아마 알고 있는 지식도 다른 분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예요.”

“응? 어렸을 때 스승님이 하이엘프였다면서? 그런데 엘프를 본 적이 없어?”

“그건…… 스승님이 특별하신 거였으니까요.”

엘프의 비밀스러움은 음유시인들이 노래 소재로 삼을 만큼 유명하다. 좋게 말하면 신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폐쇄적이다.

오죽하면 겉모습을 묘사하는 것조차 어느 나라에서는 귀가 뾰족하다, 어느 나라에서는 무저갱 같은 새까만 눈을 가졌다, 어느 나라에서는 나무뿌리를 닮은 더듬이가 나 있다, 이런 식으로 제각각일 정도다.

엘프의 존재 자체는 적어도 천년도 더 전부터 알려졌지만, 명확하게 사실로 확인된 것이라고는 세계수의 숲에 숨어 살며 접근해오는 모든 인간을 가차 없이 거절한다는 것뿐이다.

「그래도 그 하이엘프 스승이 얘기해준 게 아예 없진 않을 거 아니냐?」

“그거야 뭐…….”

자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의 갈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과거를 되새겼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몇 개 있었다.

그때 스승님이…… 엘프를 가지고 뭐라 그랬더라?

“웬수 같은 귀쟁이들.”

“……응?”

“자기가 보모인 줄 착각하는 어린애들.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를 까먹는 꽉 막힌 고집쟁이들. 융통성의 천적. 지성의 반대말. 그리고 또…….”

기억을 뒤적이며 몇 가지 말을 꺼내던 자이안은 문득 주위가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일행들이 뭐라 형용하기 힘든 묘한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어? 그…… 아니…… 엘프에 대한 얘기, 맞지?”

“맞아요. 스승님이 어렸을 때 제게 하신 말씀들이죠. 스승님이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제가 스승님을 따라가고 싶다고 떼를 쓴 적이 있거든요. 그때 스승님이 저를 엘프와 부대끼는 환경 속에서 키우고 싶지는 않다면서 하신 말씀이에요.”

“아, 어…… 으, 응.”

유리아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이들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비슷한 표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엘프에 대한 환상을 자기도 모르게 산산조각으로 깨부순 자이안은 정작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하하. 자이안도 직접 보고 하는 말은 아니잖아요? 막상 보면 다른 느낌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난 자이안이 한 말을 들으니까 오히려 더 기대되는걸? 분명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재밌는 종족일 거야!”

크룩스와 케이의 격려에도 한 번 가라앉은 분위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복잡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마차는 꾸준하게 인간의 마지막 마을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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