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기념일(3)
(100/210)
100화 기념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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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기념일(3)
2023.01.11.
“히에에에에엑……!”
유리아가 한심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옆에 선 소아레스 역시, 그녀처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지친 기색은 마찬가지였다.
“잘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라.”
아르스와 함께 아티팩트의 상태를 살핀 프레이가 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둘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긴 했지만, 애초에 참아야 한다거나 억지로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자이안을 위한 일이었으니.
-아주 특별한 아티팩트를 만들 거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어차피 생일은 이미 지나가버렸는데 며칠 더 걸린들 뭐 어때.
프레이의 아이디어는 이랬다. 케이에게 받은 천룡의 소재로 우선 아티팩트의 뼈대를 완성하고, 핵심회로에는 각자의 특성을 조금씩 옮겨 담는다.
설계대로 완성되기만 한다면 자이안은 아티팩트를 통해 일행들 각자의 특성을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다.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자신감이 넘쳤던 아르스가 직접 설계도를 짜고는 그 난이도에 난색을 표했을 정도였다.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에도 소재가 변성되어 버린다는 아티팩트 공학 특유의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용의 소재는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 소재의 초월적인 내구력은 거듭된 실수에도 변성을 허락하지 않고 견고하게 버텼다.
게다가 제공자인 케이에게 비늘 몇 개, 갈기나 수염 몇 가닥 정도는 크게 중요한 소재도 아니었다. 그 결과 일행들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 있게 되었다.
아르스와 프레이가 아티팩트를 설계하고, 유민이나 유리아를 비롯한 남은 일행은 각자의 특성을 아티팩트에 담기 위해 회로의 일부분을 직접 그렸다.
특성상 이런 일에 도움을 주기 힘든 크룩스 역시 프레이 덕분에 어떻게든 회로를 그려 넣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며칠간을 다 같이 고생한 끝에…….
“마무리 공정…… 종료. 완벽해.”
안경을 벗은 아르스가 빙긋 웃으며 여정의 마무리를 알렸다. 긴장하며 지켜보던 이들은 저마다 안도 섞인 숨을 내뱉었다.
아르스의 앞에 영롱한 빛을 은은하게 흩뿌리는 둥근 보옥이 둥둥 떠 있었다.
“코어는 끝났고, 이제 이걸 심을 만한 프레임을 만들어야겠는데…… 뭐가 어울릴까?”
코어가 엔진이라면 프레임은 차체다. 비슷한 기능을 하는 아티팩트 코어라도 무기에 심어 공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장신구나 방어구에 심어 다른 방향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무기는 필요 없겠죠. 스펙트럼이 있으니까. 장신구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역시 방어구가 좋지 않을까요?”
“방어구라…… 흐음.”
“망토는 어떨까요?”
유리아의 의견에 턱을 매만지던 프레이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머릿속을 굴린 프레이가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바로 그거야.”
* * *
“자이안, 잠깐 망토 좀 빌려줄 수 있을까?”
화창한 정오였다. 일행들은 여전히 자이안을 피했고, 자이안은 아직도 원인을 알지 못했다. 유리아와 프레이 덕분에 불안은 사라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증은 더 커졌다.
“망토요? 괜찮긴 한데…….”
자이안은 망토의 왼쪽 가슴께에 새겨진 자수를 매만지다가 유리아에게 벗어서 전해주었다. 꽃과 당근과 검의 자수가 새겨진 그 망토는, 자이안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행을 시작한 계기가 된 소중한 물건이었다.
“망토가 좀 해진 것 같아서 고쳐주려고.”
오랫동안 여정을 함께한 망토는 빈말로도 깨끗하다고는 못 할 상태였다. 좋게 말하면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여행자의 친구 같았고, 나쁘게 말하면 누더기에 가까웠다.
격렬한 전투 속에서, 아무리 망토가 다치지 않게 신경을 써도 한계란 게 있었다. 뜯어지고 찢어질 때마다 열심히 수선했지만 처음 모습과는 점점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자이안이 여정을 거치며 조금씩 변한 것처럼.
“그 정도는 제가 할게요.”
“괜찮아. 어려울 거 없는 일인데.”
망토를 건네받은 유리아가 쪼르르 멀어졌다. 어쩐지 묘하게 서두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이안은 얌전히 그녀를 배웅했다.
그로부터 30분 정도 뒤, 이번에는 프레이가 찾아왔다. 항상 여유가 넘치는 그답지 않게 지친 표정이었다.
“자이안, 잠깐 갈 데가 있다.”
“네? 갑자기 어디를요?”
“우리가 그동안 왜 널 피해 다녔는지 알 수 있는 곳.”
생각지 못한 말에 자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쪽이다. 가다 보면 유리아가 길을 안내해줄 거다. 그동안 마차는 내가 지키고 있으마.”
“삼촌은요? 같이 안 가세요?”
“난…… 됐다. 그런 건 내 취향도 아니고. 너 혼자 가봐. 미적거리지 말고 얼른.”
영문 모를 말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자이안은 프레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간 나아가자, 정말로 유리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이안, 이쪽이야!”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응후후후. 궁금해? 궁금하구나? 히히, 안 알려줄 거야.”
“어…… 기분 좋아 보이네요, 유리아.”
목적지는 숲속 얕은 곳에 펼쳐진 공터였다. 일행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있었다. 쪼르르 달려간 유리아가 왜인지 아르스에게서 자이안의 망토를 건네받았다.
수선을 했다면 소아레스나 유민에게서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누굴 대표로 할지 결정하는 게 애를 좀 먹었거든. 난 프레이 아저씨가 제격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의견이었는데, 정작 아저씨는 자기는 그런 건 안 어울린다면서 끝까지 거절하더라고. 그래서 결국 내가 됐어. 자이안이 여행하면서 가장 처음 만난 동료니까, 그럴 자격이 있다면서.”
유리아가 망토를 내밀었다. 영문 모를 말에 의아해하며 망토를 건네받은 자이안은 깜짝 놀랐다.
원래 그의 망토는 빈말로라도 고급스럽다고는 못할 투박한 가죽 망토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달랐다. 비단처럼 부드럽고, 동시에 질기고 단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티팩트?”
자수가 새겨진 부분을 중심으로 정교한 MP 회로의 존재가 느껴졌다. 자수 자체가 마치 보석처럼 햇빛을 반사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망토 자체가 강력한 아티팩트가 된 것이다. 자이안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수준의 회로였다.
“선물이야.”
“선물?”
“생일 축하해, 자이안!”
“……생일?”
앵무새처럼 유리아의 말을 따라 하던 자이안이 얼빠진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환하게 웃는 유리아를 중심으로, 모두가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그를 피했던 게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제 생일은 두 달 전이었는데요?”
“지나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이안 생일인데! ……라고 프레이 아저씨가 그랬어.”
“하지만…… 저는…… 그게…….”
말문이 막힌 자이안이 고개를 숙였다.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망토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갑자기 저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지금 이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고, 참아서도 안 될 것 같았다. 자이안은 망토를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고개를 들어 일행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이런 일을 너무 오랜만에 겪어서, 대체 무슨 말로 이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그냥, 저는…… 여러분들이…….”
횡설수설하는 말이었으나 일행 중 그 진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유리아가 자연스럽게 다가가, 자이안에게서 망토를 건네받아 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망토에 새겨진 자수를 중심으로 연녹색 파동이 퍼져나가 한 차례 그의 전신을 뒤덮고 사라졌다. 아티팩트가 된 망토의 기본 기능이 작동하며 주인을 보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방인, 방탄 기능이 완비돼있고, 내열, 내한, 내독 기능도 완벽해. 고급 아티팩트의 필수 기능인 자가 수복 기능도 당연히 부가돼있고. 그 외에 약하긴 하지만 신체 능력 보정 기능도 있고, 특히 펜던트의 힘을 네가 좀 더 쉽게 끌어낼 수 있도록 보조하는 데 중점을 뒀어.”
아르스의 설명을 들으며 자이안은 자수를 매만졌다. 망토를 둘러 그 주인으로 인식되고 나니 아티팩트의 회로가 어떤 구조인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르스가 설명한 기능들이 그대로 담겨 있었고, 따로 설명하지 않은 자잘한 기능도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으음. 이건 내가 말하면 좀 재미없을 것 같은데에. 한 번 직접 해볼래? 어때?”
회로를 해석하던 자이안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한 회로로 이뤄진 여섯 개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르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물러났고, 자이안은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해 아티팩트의 회로와 직접 접속했다.
그리 어려운 난이도는 아니었다. 아르스에게 처음 아티팩트 공학을 배우던 때라면 모를까, 지금 역량으로는 시간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거…… 아르스 누나가 직접 만든 회로가 아닌 것 같은데.’
구조 자체는 완벽했으나 회로를 그리는 MP의 선에 묘한 어설픔이 느껴졌다. 자이안의 의식이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모든 구조를 파헤치고자 집중한 그의 머릿속에 별안간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유리아의…….’
-생일 축하해, 자이안!
친애가 담긴 밝은 목소리.
-이거 되게 신기하다. 프레이 아저씨가 알려준 건데, 아티팩트의 회로에 1회용 전언을 담을 수 있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무래도 부끄럽지만, 이건 너밖에 못 듣는 거니까 괜찮겠지?
청각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회로를 통해 직접 느껴졌다.
-자이안, 고마워. 내 앞에 나타나 줘서. 널 만나고 기쁜 일도, 힘든 일도, 아픈 일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난 이 만남을 절대 후회하지 않아.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헤헤.
‘저도 마찬가지예요, 유리아. 유리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전 분명 지금과는 크게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겠죠.’
잠시 정적. 이어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자이안 님. 소아레스입니다. 음…… 그러니까…… 이거 생각보다 부끄럽군요.
담담함 속에 곤혹이 깃든 그 표정이 상상되어 자이안은 작게 웃었다.
-하지만…… 좋은 기회군요.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자이안 님께 제 진심을 드러내 보이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감사드립니다, 자이안 님. 당신께서 그날 전하와 만나고 오지랖을 부려 저희를 돕고자 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지금과는 많은 것이 달랐을 겁니다.
‘폐하께서는 분명 잘 해내셨을 거예요. 전 그 등을 밀어준 것에 불과해요.’
-제게 먼저 다가와 주신 것, 그저 의심뿐이었던 제게 진심을 보여주신 것, 그 행동이 제 마음의 짐을 얼마나 크게 덜어내 주었는지 자이안 님은 결코 상상하지 못하실 겁니다. 후후, 자이안 님께 있어서는 평소와 같은 행동일 뿐이었겠지만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저도 많이 고민했고, 불안했고, 그래서 소아레스가 마음을 열어줘서 기뻤어요.’
-폐하와 저와 제국은 언제 어느 때에든 자이안 님의 아군으로 있을 것이며, 제 모든 것을 걸고 충정을 바칠 주군은 오직 자이안 님뿐입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저의 주군이시여.
그 뒤는 각성자들의 차례였다.
-요즘 훈련이 짧아져서 많이 불만이었죠? 걱정 말아요. 내일부터는 이제까지보다 배는 더 어려워질 거예요.
‘바라던 바예요, 크룩스 형.’
-생일 축하해요, 자이안. 그, 그나저나…… 우리도 이제 많이 친해졌는데, 슬슬 말을 놓는 건 어떨까요? ……어, 어떨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유민 누나. 비록 피는 통하지 않았어도, 저는 누나도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자이안, 그동안 정말 정말 고생 많았어어! 앞으로도 고생길이 좀 남은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아티팩트가 있으면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이 누나 오랜만에 좋은 일 했다, 그치?
‘오랜만이라뇨. 아르스 님께는 항상 도움만 받고 있는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니, 난 그러니까 이런 건 성격이 아니라…… 아, 젠장. 그래, 내가 졌다. 졌다고, 이 망할 꼴통들아! ……후우. 자이안. 그러니까, 거 뭐냐. 흠. 생일 축하한다.
일견 무뚝뚝하게 들리는, 그러나 그 일면에 서툰 친애가 드러나는 목소리.
-난 뭐 길게 할 말은 없고…… 내년 생일은 안 놓치고 제때 챙겨주마.
그 말에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이 놀랍고도 멋진 선물의 발안자가 바로 프레이였던 것이다.
“어때? 잘 됐어?”
다시 눈을 뜬 자이안이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프레이가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으나, 또 달리 생각해보면 더없이 프레이다운 행동이었다.
“고마워요, 여러분.”
흘러넘치는 웃음을 그대로 놔둔 채 자이안이 말했다.
“제가 받아본 최고의 선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