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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기념일(2) (99/210)


99화 기념일(2)
2023.01.10.


“절대 좌시해서는 안 되는 비상사태다.”

펜던트를 통해 소환된 프레이가 함께 모인 면면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유리아, 소아레스, 케이는 물론 지구 측 각성자까지. 자이안을 제외한 일행 모두가 한곳에 모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챙기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자이안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은데에.”

“그래서 저놈 생일도 모른 척 어물쩍 넘어가자고? 아포칼립스의 자존심이 그런 걸 용납할 것 같냐!”

“네 자존심이랑 이게 뭔 상관이라고…….”

“시끄러, 이 자식아. 하기 싫음 빠지든가.”

“자, 잠까안. 누가 싫다고 그랬어? 자이안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본 것뿐이라구.”

흥, 하고 코웃음을 친 프레이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저놈은 어차피 우리가 언제 어떻게 뭘 명분으로 챙겨주든 똑같이 부담스러워할 거다. 어차피 부담스러워할 거, 그때그때 바로 챙겨주는 게 낫지.”

“형 말씀에는 저도 동의하는데…… 그러면 구체적으론 뭘 해줍니까? 파티라도 열어야 하나?”

파티라는 단어에 소아레스의 눈이 번뜩였다. 파티에 음식은 빠질 수 없는 요소. 그녀의 요리 솜씨가 불을 뿜을 시간이었다.

“흠…… 아니. 그건 진짜로 부담스러워할 거다. 챙겨준다고는 해도 정도는 있어야지.”

소아레스의 어깨가 조금 늘어졌다. 안타깝게도 아무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 선물이 좋겠네요?”

“그래. 다만 각자 하나씩 준비하는 건 상황상 한계가 있으니…… 다 같이 뭘 하나 만드는 게 어떨까 싶은데.”

“만든다면, 아티팩트?”

아르스가 바로 반응했다. 프레이는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했다. 아티팩트를 고려하지는 않았으나,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나쁘지 않은데요? 아르스 누나한테서 이런 건설적인 의견이 나왔다는 게 좀 의외기는 하지만.”

“크룩스으? 이 누난 항상 건설적인 의견밖에 안 꺼내거드은?”

“네?! 진짜요?!”

유민이 생전 처음 듣는 사실이라는 듯 깜짝 놀랐다. 그 순수한 반응에 아르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 꼴통은 놔두고,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있냐?”

“다른 의견이라기보다는…… 저와 소아레스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유리아가 손을 들고 소극적으로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각성자들이 보기에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티팩트라는 건 작정하고 만들기 시작하면 사람은 얼마든지 필요해. 그리고 너희 둘은 꽤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거다. 아니, 너희 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지.”

“모두 다요?”

“그럼 이 자식아, 자이안 줄 생일 선물인데 농땡이라도 피울 셈이냐?”

“형, 저 그쪽으론 능력 못 쓰는 거 아시잖아요.”

“걱정 마라. 내가 생각해 둔 방법이 있으니까.”

프레이가 대략적인 계획을 전했다. 모두가 각자 중요한 일을 하나씩 맡은 이상적인 역할 분담이었다.

“아티팩트라는 게, 지금 네가 끼고 있는 그 장갑 같은 거지? 쟤가 매고 있는 금속 상자나, 자이안이 가진 펜던트도 그렇고.”

“그렇지. 눈썰미가 좋구만.”

“그러면…… 흐음. 내 비늘을 몇 개 써볼래? 갈기도 좀 줄게.”

뜻밖이었던 것은 케이의 제안이었다. 별의 화신인 진짜 ‘천룡’의 비늘과 갈기라.

소재로 쓸 수 있다면 분명 엄청난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다루는 소재를 상대로 악전고투할 아르스를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니 아르스는 오히려 그런 거에 환장하니 상관없겠다 싶었다.

“넌 괜찮겠냐? 내 말은, 그러니까, 으음…….”

우려를 표하던 프레이가 말끝을 흐렸다.

지구의 창작물 따위에서 용은 강대한 존재이며 오만한 성격에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존재로 묘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결국 창작에 불과하다. 프레이가 직접 본 케이는 다소 맹한 성격에 가끔씩 초탈한 태도를 보이고는 했으나, 그래도 자이안을 친구로 여기는 마음은 진짜였다.

“음…… 그래. 그래 준다면 고맙지.”

“이 정도로 뭘! 너희 종족으로 치면 잘라낸 손톱이나 머리카락 같은 건데.”

그런 식으로 하나둘 의견을 조율하며 회의를 마친 뒤, 프레이는 마지막으로 일행들을 돌아보며 엄중하게 말했다.

“이건 자이안에게는 절대 비밀이다.”
 

* * *

최근 자이안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훈련은 이 정도로 끝낼까요?”

“벌써요? 하지만 아직 시간이…….”

“자이안은 괜찮아 보이는데, 유리아가 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요. 그렇죠, 유리아?”

“네? 아! 네, 맞아요! 체, 체력이 조금…….”

훈련 시간이 갑자기 짧아졌다. 실전을 상정한 크룩스나 프레이의 훈련은 물론이고, 이론 위주인 유민과 아르스의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유리아는 저랑 같이 가볍게 체력 단련을 하는 걸로 하고…… 아, 자이안은 먼저 마차로 돌아가도 돼요.”

그리고 이상하게 일행들이 자이안을 혼자 두는 일이 많아졌다. 단적으로 말하면, 자이안을 피하기 시작했다.

자이안을 혼자 두고 볼 일이 있다며 사라진 유리아나 소아레스가 기진맥진하며 돌아온 적도 있었다. 깜짝 놀란 자이안이 무슨 일이냐며 걱정했으나 둘은 그저 따로 훈련을 했을 뿐이라며 어설프게 얼버무렸다.

‘내가 뭔가 미움받을 일을…… 하진 않은 것 같은데.’

자이안은 타인의 악의에 민감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일행들은 자이안을 묘하게 피하고 있었지만, 딱히 자이안을 미워하지는 않는 것 같았으니까.

‘아닌가? 미움받는 게 맞나? 내가 저택을 떠난 지 오래돼서 감이 무뎌진 건가?’

한번 시작된 나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결국 읽고 있던 아티팩트 공학 중급 교본을 탁 덮었다. 이 상태로는 어차피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삼촌이라면 뭔가 알고 계실까?’

프레이라고 모든 걸 알고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적절한 조언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로 상담을 한번 해봐야겠다.’

그러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자이안의 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프레이 역시 마차에서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졌다. 온전히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건 식사 시간 정도였다.

‘설마 삼촌한테까지…….’

고민과 불안의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이안은 자신이 일행들에게 얼마나 크게 의지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미움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에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다니. 저택에서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악의가 당연하고, 반대로 호의를 보여주는 이들이 언제 갑자기 사라지거나 돌변할지 몰라 걱정했었는데.

‘내가 약해진 걸까?’

마부석에 혼자 앉아 마차를 몰며, 자이안은 천천히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저택에서의 나날. 저택을 떠나던 날. 프레이와 만나고, 함께 시작한 모든 여정을.

‘아니.’

자이안은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결론을 냈다.

‘약해진 게 아냐. 강해진 것도 아니고. 그저…… 변한 거야.’

그리고 자이안은 이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 우선 사과를 하자. 뭘 잘못한 건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사과를 받아봤자 기분 나쁠 뿐이겠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차라리 사과를 하고,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솔직하게 물어보는 거야. 더 미움받을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그게 나아.’

가장 먼저 돌아온 사람은 유리아였다. 뭘 하다 온 건지 오늘도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잠시 마차를 멈춘 자이안은 마지막으로 결의를 다잡고 유리아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유리아.”

“엥? 갑자기 웬 사과? 자, 잠깐만. 자이안 너 설마!”

유리아의 머릿속에 최악의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자이안은 일행들이 몰래 생일을 준비하는 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이어진 자이안의 말은 유리아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제가 뭘 잘못해서 여러분들이 저를 피하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이건 어쩌면 유리아가 듣기에는 불쾌한 말일지도 몰라요.”

“……으응?”

“하지만 그래도…… 죄송해요. 어쩌면 그냥 제 이기심일지도 몰라요. 여러분께 미움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유리아, 용서해달라는 주제넘은 말을 하지는 않을게요. 다만 괜찮다면…… 제가 뭘 잘못한 건지만 말씀해주세요.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여러분을 불쾌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

“으아앙!”

갑자기 유리아가 울기 시작했다.

“유, 유리아?”

“미안해, 자이안! 우리가 잘못했어!”

그를 와락 끌어안은 유리아가 머리며 등이며 여기저기를 마구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직도 이런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은 자이안이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쯧.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구만.”

머리 위에서 프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중을 날아 마차 근처에 가볍게 착지한 프레이가 둘을 번갈아 보고는 한숨을 뱉었다.

“유리아, 넌 일단 떨어져 봐. 애가 부담스러워 하잖냐.”

“우리 자이안, 누나가 미안해…….”

코를 훌쩍이면서도 유리아는 얌전히 자이안에게서 멀어졌다. 프레이는 머리를 긁으며 몇 번인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결국 체념한 것처럼 말을 꺼냈다.

“일단…… 미안하다.”

“삼촌이 왜 사과를 하세요?”

“널 오해하게 만들었으니까. 뭘 어떻게 생각을 했기에 그런 결론에 다다랐는지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지만, 아무튼 우리가 널 미워하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잠시 침묵한 끝에 자이안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마음 편히 기다리고 있어. 분명 너한테는 좋은 일이 될 테니까. 그럼 우린 다시 간다. 유리아, 그만 짜고 얼른 와라.”

유리아를 아무렇게나 붙잡은 프레이가 그대로 하늘을 휙 날아 다시 멀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이안은 작은 한숨을 뱉었다.

‘다행이다. 미움받은 게 아니었구나.’

아직 불안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유리아와 프레이의 태도는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자이안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결국 일행들이 나를 피하는 이유가 뭐지?’

그러다가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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