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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기념일(1) (98/210)


98화 기념일(1)
2023.01.09.


최근 동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

“제국과 보석탑이…….”

심복이 어렵게 구해온 외신을 모두 읽어본 미오네는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뱉었다.

일리움은 닫힌 나라다. 외국과의 무역 정도야 평범하게 하지만, 정치적인 관계는 아예 없다시피 하다.

서대륙에서도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지리적 특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마전을 틀어막고 있다는 특수성 때문이다. ‘불가침’이라는 인식이 정치적으로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 일리움에게 서대륙도 아닌 동대륙의 정세는 어지간해서는 먹다 남은 빵부스러기만 한 가치도 없는 무관계한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주체가 프리엔 제국과 보석탑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클라비수스 황제. 분명 제5황자였던…… 그래, 10여 년 전에 일리움을 찾아온 적도 있었어.’

지금은 영락했다는 소리도 듣지만, 전성기 때 제국은 동대륙은 물론이고 동서를 가로막은 사막지대를 기어이 뚫고 서대륙에 진출해 지배력을 뻗치기도 했다.

제국이 손을 거둔 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몇몇 나라에는 그때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

‘마족에 지배당한 부패한 황실을 타도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 반역을 일으켰어? 그 남자가?’

오래된 기억을 되짚어 보고, 미오네는 위화감에 인상을 썼다. 능히 제국을 다스릴 역량을 가진 남자이기는 했으나, 반역을 일으킬 만큼 권력을 갈구하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남자가 반역을 일으킬 만큼 황실이 부패해 있었던 걸까. 마족은 어떤 은어 같은 건가?’

뭔가 추측을 하기에는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제국에 대한 생각을 뒤로하고 미오네는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법왕국과 보석탑의 전쟁. 성녀 재림. 미궁 붕괴. 보석탑의 비인도적 실험이 적발. 300명에 달하는 마법사가 처형. 보석탑의…… 멸망.’

뭔가 이상하다. 미오네는 다시 한번 인상을 썼다. 제국 때도 느낀 작은 위화감이 법왕국과 보석탑에 이르러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런 일들이 이렇게 급박하게 연달아 일어날 수가 있나?’

천문학적인 확률이 겹치고 겹쳐 우연히 일어날 가능성이, 그야 없지는 않다. 현실은 때로 소설이나 연극보다도 어처구니없는 우연으로 돌아가고는 하니까.

그러나 미오네는 도저히 그렇게 낙관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만한 힘과 의사를 가진 누군가, 혹은 집단이 각각의 사건에 개입했다는 게 더 현실적이지 싶었다.

‘좀 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해.’

심복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한 번 더 고생해줘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녀도 저택에서 멍청히 기다리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준비를 위해 시녀들을 불렀다.

‘우선 전하와 알현을…….’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잠시 멈칫했다. 과연 시모스 국왕은 귀담아들을 것인가? 자이안의 죽음을 확실히 확인해야 한다던 말을 결국 끝까지 무시한 그가?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자칫 왕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불씨로 자랄지도 몰라. 듣지 않으신다면, 귀담아들으실 때까지 찾아갈 수밖에.’

가능한 모든 역량을 발휘해 정치적 입지를 넓혀나갔으나 아직도 그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많았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자신이라면 저들보다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자신이라면 저들보다 더 일리움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 텐데.

‘나라면, 일리움을 위해 그 어떤 일이라도 망설이지 않을 텐데.’
 

* * *

유리아는 흐트러지는 호흡을 필사적으로 가다듬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얼굴 표정이 제멋대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아주 잠깐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란히 선 자이안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만큼 위험한 상대라는 뜻이지만, 자이안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유리아는 반대로 마음이 조금 놓였다.

“지금.”

“……!”

자이안이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유리아는 온 의식을 집중하며 전속력으로 쏘아져 나갔다. 시야가 좁아지며 오직 상대의 모습만이 보인다.

유리아는 단검을 휘둘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아마 색욕과 싸웠을 때도 이런 식으로 단검을 휘두르진 못했을 것이다. 공기가 가늘게 떨리며 무색, 무형, 무음의 진동파가 쏘아졌다.

턱, 하고 맥없는 소리가 났다. 막힌 것이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걷어내기라도 하는 것 같은 가벼운 손동작에. 그러나 유리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대의 주위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끊임없이 단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녀의 역할은 공격이 아니었다. 견제, 그리고 시선 분산. 속도와 유연함, 그리고 적의 취약점을 찌르는 날카로운 공격이야말로 그녀의 가장 큰 무기였다.

제아무리 튼튼한 상대라도 방어에 신경 쓸 수밖에 없으리라는 게 둘의 예상이었다.

“…….”

자이안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며 기회를 가늠했다. 아마 그 시간은 몇 초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자이안에게는 마치 억겁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아냐. 지금도. 지금도 아냐. 그리고…….’

어느 순간 자이안의 눈이 번뜩이듯 빛났다. 온몸에 힘을 불어넣은 자이안이 땅을 박찼다. 펜던트가 변형하며 극채색 오로라를 흩뿌렸다.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확신하며, 장검을 휘둘렀다. 쩌어엉! 철판을 후려치는 것 같은 강렬한 소리가 울렸다.

“측면이 비었네요.”

‘측’까지 들은 순간 자이안의 시야가 걷잡을 수 없이 핑그르르 돌았다. 나머지 뒷말은 공중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귀에 들어왔다.

“유리아는 아직 공격이 가볍고요. 약점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어도, 공격이 거기 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죠.”

“헤꺄악!”

균형 감각이 엉망이 된 와중에 묘하게 귀여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마 유리아도 자신과 비슷한 꼴이 되었으리라. 바닥에 엎어진 채 허우적거리던 자이안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의 평가는…… 10점 만점에 3.5점입니다.”

팔짱을 낀 크룩스가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 표정에 부드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자이안도 솔직하게 웃었다.

10점 만점에 3.5점. 누가 들으면 부끄러워할 점수이지만, 상대가 근접전 최강의 각성자인 아틀라스라면? 게다가 첫날 점수가 10점 만점에 1점이었음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검토하는 시간을 좀 가진 다음 쉬도록 하죠. 유리아, 자이안.”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낸 둘이 쪼르르 모였다. 말 잘 듣는 학생이 된 둘에게 크룩스는 기분 좋게 강의를 시작했다.

「괜찮냐?」

조금 뒤.

피드백을 모두 마치고, 둘을 먼저 돌려보낸 뒤 공터에 혼자 남은 크룩스에게 지구에 남은 프레이가 물었다. 잠시 말을 아꼈던 크룩스가 이내 작게 웃음을 머금었다.

“괜찮냐고요?”

몸에 힘을 빼자 피부 곳곳에 감춰져 있던 상처들이 드러나며 희미하게 핏방울이 맺혔다. 자이안의 공격을 직접 막은 팔뚝은 좀 더 상처가 컸다.

실전 형식의 훈련을 제안한 것도, 훈련용이 아니라 진짜 무기를 써도 된다고 허가한 것도 모두 크룩스였다.

마족마저도 단칼에 가르는 스펙트럼을 크룩스에게 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이안은 부담스러워했다. 크룩스는 어차피 자이안은 스펙트럼의 힘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하고 있으니 자기가 다칠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설득했다.

며칠 전만 해도 그 말은 자이안을 안심시키기 위한 허세가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긁힌 상처라고 하기에도 뭐한 생채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상처의 주인이 크룩스라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무거웠다.

“괜찮을 리가 있겠어요?”

자이안과 유리아에게는 알리지 않았지만, 사실 지구에서 크룩스의 평가 기준은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이는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크룩스의 본인의 자가 채점은 10점 만점에 5.5점. 유민과 아르스가 마찬가지로 5.5점. 프레이가 6.5점. 생전의 나이아가 7.5점이었다. 10점 만점에 3.5점은 어지간히 날고기는 일류 각성자들도 버거운 영역이다.

내력을 집중하자 상처는 삽시간에 아물었다. 체온이 높아지며 피가 빠르게 증발해, 이윽고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된다고 머리로 생각은 하는데…… 지금 최고로 끝내주는 기분이에요.”

그러나 단 하나, 크룩스의 가슴에 불씨를 피운 기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 둘이 얼른 커서, 저와 똑같은 전선에 서서 저와 함께 싸울 날이 기다려지는데요.”
 

* * *

초원을 가로지르는 길을 마차가 느긋하게 나아간다.

빠르게 달리면 보석탑 영역을 벗어나 세계수의 숲에 도달하기까지 3일도 걸리지 않겠지만, 사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는 여정이었다.

제국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계속 고생만 했으니 좀 쉬어도 된다는 게 자이안을 제외한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쉬어도 된다는 걸 자이안은 여전히 어려워했지만, 프레이가 보기에는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지나치게 자기 부정적이고 강박적이었던 그의 성격도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이다.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보석탑에서 있었던 일이 도움이 됐어.’

시기가 준 서클릿을 통해 받아들인 원죄의 힘. 전쟁을 겪으면서 일어난 자이안의 심정적 변화가 이와 엮이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는 자칫 깊은 상처로 남을 수도 있는 전쟁을 잘 극복해내고 다음 목적지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성격이 좀 바뀌기는 했지만…….’

좋게 말하면 홀가분해지고, 나쁘게 말하면 좀 뻔뻔해졌다. 졸트의 처형을 자진해서 맡은 것도, 처형 직전에 굳이 졸트에게 안 해도 될 말을 한 것도, 사실상 자살이나 다름없는 법왕의 결단을 얌전히 받아들인 것도. 모두 그 변화의 영향이었다.

‘너무 답답하기만 했던 예전보단 이게 낫지. 케이 말처럼, 본질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사람 성격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지만, 그것도 다 크고 머리가 굳은 상태의 얘기다.

‘이제 겨우 열여섯…… 아니지. 곧 열일곱인가? 잠깐만. 이놈 생일이 언제더라?’

잠시 생각했던 프레이는 기겁했다.

‘이런 맙소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카 놈 생일도 모르고 있었네.’

「자이안. 너 생일이 언제냐?」

“네?”

뜬금없는 질문에 자이안은 의아해하면서도 생각에 잠겼다. 그도 프레이와 비슷했다. 그동안 하도 많은 일을 겪다 보니 생일 같은 사소한 일은 그대로 뒷전으로 밀려버렸다.

애초에 나이아가 죽은 이후로 생일을 챙긴 적이 없기도 했고.

“어라.”

간신히 자기 생일을 떠올린 자이안이 멍하니 탄성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지났네요?”

「…….」

어떻게 보면 예상 그대로의 대답에 프레이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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