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전쟁이 끝난 뒤에(3) (97/210)


97화 전쟁이 끝난 뒤에(3)
2023.01.08.


법왕국에서는 거센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라기오르타 추기경. 아니, 죄인 베르테 라기오르타! 당신을 신성자 모독 및 성금 횡령, 살인 교사, 간통, 기타 여죄 31개의 혐의로 고발한다!”

성도로 돌아와 종전을 선포한 뒤, 법왕 야울 요르딕 펠하네스 2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성녀의 재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당초에는 고위 사제들 사이에서 불신의 분위기가 팽배했으나 눈앞에서 기적을 목도하자 그런 목소리는 귀신같이 사라졌다.

뒤이어 법왕은 그동안 숨겨져 있었던 고위 사제들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냈다.

엄청난 반발이 뒤따랐다. 그러나 법왕은 성녀들의 지지를 뒷받침 삼아 일을 강행했다.

당대 성녀는 물론이고 재림 성녀까지 법왕의 행동을 옹호하고 증거들이 진실임을 증언하자,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 반발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사제들이 겸허히 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성녀를 앞세운 법왕에게 정면으로 반박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뒤에서 은밀히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계획은 이랬다. 먼저 뜻을 같이하는 신성기사단원들을 통해 법왕을 은밀히 모셔온다. 그 뒤 칼과 불로 법왕을 설득하고, 이어 성녀 둘도 같은 방식으로 설득한다. 요컨대 역모였다.

“권력에 취한 것들은 어째 하나같이 하는 짓이 다 똑같을 수가 있냐? 이쯤 되면 신기하구만.”

그들의 원대한 계획은 애석하게도 빛을 볼 새도 없이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어느 깊은 밤, 계획을 검토하기 위해 모인 그들에게 프레이가 찾아왔다.

법왕에게 미리 그들의 얼굴과 이름, 죄목을 모두 전해들은 프레이는 그 자리에서 형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형벌은 모두 사형이었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발버둥이라도 쳐 봐야죠. 운이 좋으면 판세를 뒤엎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흥. 나쁜 짓인 걸 알면 애초에 처음부터 하질 말았어야지. 그게 싫으면 얌전히 벌을 받든가.”

“하하. 처음엔 별로 안 내켜 하시더니, 지금은 또 열심히 하시네요, 형.”

“원래 쓰레기를 치울 때는 샅샅이 뒤져서 먼지 하나 안 남게 깨끗이 정리해야 돼. 안 그러면 언제 구석에서 바퀴벌레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날 밤 원인불명의 화재로 총 16명의 주교와 수도사제가 목숨을 잃었다. 전소된 저택이 완전히 무너져 시신조차 제대로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협력해주어 고맙소. 이제 허튼 생각을 하는 사제들은 더 이상 없는 모양이오.”

비슷한 사건이 두 차례 더 일어난 뒤, 법왕은 자이안 일행이 머문 별궁에 직접 찾아가 감사를 전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파리한 안색이었다. 과중한 업무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있는 탓이었다.

“쉬엄쉬엄해라. 그러다 쓰러지면 지금까지 한 게 다 허사가 될 수도 있다.”

“프레이 공께 이런 말을 들을 날이 올 줄은 몰랐군. 걱정 마시오. 어차피 이게 마지막이니까.”

그 모습을 말없이 시켜보며, 자이안은 문득 그가 죽음을 목표로 달리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죄를 받아들이고, 벌을 받을 각오도 모두 마친 것이리라.

“성녀님과 퀴나스 님은 잘 지내고 계시나요?”

“두 분께선 한창 공부에 열을 올리고 계시오. 퀴나스 님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기는 하오만…….”

“앓는 소리가 난다는 건 아직 힘이 넘친다는 증거지.”

“내 말이 그 말이오.”

둘은 첫날 이후로 공식 석상에는 나타나지 않고 성녀의 처소에 거의 틀어박히듯 지내고 있었다. 정치학, 수학, 경제 논리, 역사, 법률 등 나라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다스리는 데 필요한 많은 지식을 익혀야 했다.

퀴나스가 순수하게 배우는 입장이라면, 성녀는 이를 가르치며 복습하는 입장이었다.

퀴나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녀의 뛰어난 이해력이 독이 됐다. 공부를 시작한 첫날 퀴나스의 비상한 이해력을 알아본 성녀는 앞으로의 일정을 큰 폭으로 수정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식사와 수면, 잠깐의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전부가 공부로 점철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성녀라는 지위도 호락호락하지는 않네요. 그걸 다 알고 있어야 한다니.”

한때 상회를 계승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던 유리아가 감탄을 터뜨렸다. 익혀야 할 지식의 깊이는 분명 그녀가 배웠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리라.

“그렇지는 않소. 성녀님께서 특별하셨던 거지. 앞으로는 그게 특별하다고 여겨지지는 않겠지만 말이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마치 법왕국의 앞날이 지금과는 크게 달라질 거라고 은유하는 듯했다.

한편, 아르스가 맡은 성유물 수리 작업은 순조로웠다. 작업 10일 차. 네 장로의 협력 덕분에 이제 마지막 공정만 남겨놓고 있었다.

“너, 너, 너, 너. 이렇게 순서대로 5분 간격으로 들어가. 질풍, 네가 마지막이야.”

“아…… 으…….”

“머리…… 가…… 아파…….”

“내가…… 사라진다…….”

손가락질을 하며 말해도 네 장로는 별 대답 없이 멍한 목소리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나마 질풍만은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역시 제대로 대답을 할 여유는 없었다.

‘딱 계산 그대로 됐네.’

애초부터 그들 네 장로는 소모품이었다.

불완전하다고는 하나 자아를 가진 아티팩트다. 오히려 불완전해서 더 위험했다. 장로들이 내부로 들어간 순간 아티팩트의 자아는 그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순화해서 표현하면 의식의 동화, 혹은 흡수라고 할 수도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내부로 들어간 순간 통째로 잡아먹혀 흔적도 없이 자아가 사라졌으리라. 그리 생각하면 장로들은 분명 강한 정신력을 가졌다 할 수 있었다. 지난 수백 년을 헛살지는 않은 모양이다.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계속할 거니까 의미는 없지만.’

아르스는 ‘잘 협조하면 죽을 수 있다’는 말로 그들을 현혹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너지 그 자체가 된 그들이 죽는 방법은 많지 않다. 이런 식으로 존재가 먹혀 사라지는 것 또한 일종의 죽음이다.

이미 업화, 맹목, 중압은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5분 간격으로 원통형의 접속기에 들어가는 장로들을 보는 질풍의 눈에도 강한 의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질풍은 처음부터 묘하게 협조적이기는 했다. 자이안과 잠깐 함께 지내면서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만, 들을 생각은 없었다. 관심도 없었고.

“보석탑 말인데.”

그러니까, 이 행동 역시 별 뜻 없는 변덕에 불과하다.

“원로교수, 정교수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처형당했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그 아래 마법사들은 제법 많이 살아남은 모양이야. 죄질이 약한 사람들도 있고, 명령 때문에 억지로 할 수밖에 없었거나, 아예 그런 일들이 싫어서 좌천되었던 마법사들도 있는 모양이니까. 듣기로는, 연수생들을 이끌고 대륙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다던데.”

“그럼…… 탑은 이제…….”

“탑이라는 장소는 없어졌지만, 마법사 전부가 멸망한 건 아니라는 거지. 아니면, 지금까지 일궈놓은 게 허망하게 무너져서 아쉬워?”

“…….”

질풍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접속기로 들어갔다. 접속기로부터 성유물로 이어진 관으로 그녀의 몸이 빨려 들어가고, 곧 성유물이 흐릿하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백팩을 전개해 성유물에 직접 접속하며, 아르스는 머리 한구석에 잠깐 잡념을 떠올렸다.

언젠가, 아마도 머지않은 미래. 성유물의 자아가 완전히 안정화되고, 다른 도움 없이 자정작용이 가능해지면 내부에 남아있던 불순물 역시 자연히 밖으로 배출될 것이다.

그때 네 장로 중 누군가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유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과연 있을까?

‘……0은 아니네.’

거기서 상념을 접었다. 아르스에게 장로들의 앞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에 불과했다. 혹시 그들이 또 비슷한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그보다는 눈앞의 말썽꾸러기를 얌전하게 만드는 게 훨씬 중요했다.

“좋아. 최종 공정을 시작하자.”

네 장로를 잡아먹은 아티팩트의 자아는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할 만큼 성장했을 터.

에고 아티팩트와 대화를 나누는 건 펜던트를 포함해 이번이 두 번째지만 여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르스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탐구심으로 반짝였다.

* * *

“슬슬 내 처형일을 정해야겠군. 일주일 후가 어떨까 싶소만.”

자이안 일행이 태양궁에 머무른 지 보름째. 성유물을 완전히 고쳤다는 소식을 들은 법왕이 태연하게 그런 말을 꺼냈다.

“처, 처형이라뇨?”

유리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러다가 급히 자이안을 바라보고, 그 표정에 불현듯 여러 가지를 이해했다.

“아직 국내는 다소 어수선하지만, 성유물도 고쳐졌고 퀴나스 님의 교육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더 미룰 이유가 없지.”

제 몸을 아끼지 않고 과중한 업무를 짊어졌던 건, 자신이 처형된 뒤에도 나라가 흔들리지 않도록 여러 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법왕은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심이 크게 요동치지 않을까요? 좀 더 여유를 두고 진행하는 게…….”

“성녀님과 퀴나스 님이 계시는 이상 그런 걱정은 무의미하오. 두 분은 나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한 구심점이 되어주실 거요.”

실제로 법왕국은, 물론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수뇌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재림 성녀의 기적, 그에 대한 민중의 믿음이 절대적이었다.

“퀴나스 그 여자…… 부담이 꽤 클 것 같은데.”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무지한 농민의 자식에 불과했다. 제아무리 강한 각오를 품어도, 실제로 맞닥뜨리고 나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나도 그 점은 다소 우려했소. 하지만 그분께서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한 분이시더군. 게다가 혼자도 아니고, 성녀님…… 이젠 전대 성녀님이라고 불러야겠군. 아무튼 성녀님께서 함께 계시는 이상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것 같소.”

“전대 성녀? 정식으로 계승 일자가 정해졌나요?”

“내가 죽고 보름 뒤로 계획하고 있소. 이미 고위 사제들 간에는 다 알려진 사실이고. 지금은 민간에 조금씩 소문을 퍼뜨리면서 민심을 다스리고 있소.”

“그러냐. 그래, 그럼…… 뭐. 남은 일주일, 후회 없이 보내라.”

“후후후. 성녀님께서 무사히 살아나셨는데 내가 후회할 일이 뭐가 있겠소?”

그리 말하는 법왕의 눈은 봄날의 잔잔한 호수처럼 온화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눈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일주일 뒤. 법왕의 말대로 그의 처형이 집행되었다. 처형은 성도의 가장 큰 광장에서 열렸다. 성도민은 물론 법왕국 각지에서 소식을 듣고 몰려온 순례자들로 인해 광장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가득 찼다.

「……어찌 보면, 이 전쟁의 유일한 승자는 바로 저놈일지도 모르겠구만.」

지금까지 고발된 고위 사제들이 참수형을 당했던 것에 반해, 법왕의 형은 화형으로 결정되었다.

태양을 숭배하는 교리로부터 예측할 수 있듯, 법왕국에게 화형은 신성한 형벌이었다. 똑같은 죄인이라도 생전에 많은 선행을 쌓고 만인에게 성인으로 인정받아야만 받을 수 있었다.

“성인이라…….”

솔직히 말하면 자이안은 이 결과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법왕국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많은 증거를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고위 사제들을 심판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법왕의 덕이지만, 그 또한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자이안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예정대로 성녀를 양산해 보석탑을 침공했더라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것 따위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이해했다.

「모두 철저하게 계산한 거겠죠.」

나라의 최고 지도자의 처형. 자칫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불미스러운 일이다. 법왕은 이를 성스러운 화형으로 포장해, 민심을 뒤흔들기는커녕 더욱 굳게 다잡는 결과를 낳았다.

국민들이 정치체제의 격변을 큰 반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아마 성녀님의 입김이 좀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분 알게 모르게,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자는 주의인 것 같던데.」

「성유물이 고장 나지 않고 성녀님이 무사했더라면…… 그래서 두 분께서 힘을 합할 수 있었더라면, 법왕국은 어쩌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나라가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유민은 지그시 눈을 감고 죽은 이의 넋을 기렸다.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프레이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 과거의 가정 따위, 아무짝에도 쓸데없다. ……라고 말하고 싶다만, 그래. 분명 그랬겠지.」

신성력이 깃든 하얀 불이 높이 치솟았다. 불꽃 속에서, 교황은 신음 하나 없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기도가 신을 향한 것인지, 그토록 존경하던 성녀를 향한 것인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불은 법왕의 온몸이 완전히 재가 될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형장 뒤편 단상 아래에서, 성녀는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힘이 깃든 강한 시선으로, 그러나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당신은 끝까지 아둔한 남자였군요, 야울.’

며칠 뒤.

법왕국의 정세가 많이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자이안 일행은 다시 여정을 준비했다.

“법왕국은 괜찮아요. 아니, 어떻게든 괜찮게 만들 거예요. 그 아둔한 남자가 기껏 깔아준 판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는 없죠.”

법왕의 처형과 함께 법왕국의 정치체제는 격변을 겪게 됐다. 사제들의 지위가 단순화되고, 법왕이라는 직책이 없어지며, 성녀가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된 것이다.

격동의 시기, 성녀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을 모두 보고 듣고 시기적절한 지시를 내리며 큰 탈 없이 나라를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놀라운 능력과 식견, 지혜를 가진 여성이었다. 법왕이 왜 그토록 존경했는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그 옆에 선 퀴나스는 그동안 얼마나 시달렸는지 얼굴이 반쪽이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기가 세진 것 같기도 했다.

“소아레스, 날 이런 꼴로 만들다니…… 절대 용서 안 할 거예요.”

어찌 보면 그녀가 이런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 근본적인 원흉이 바로 소아레스였다. 원망스러운 시선에 소아레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자기 선택을 후회하고 계십니까?”

“그, 그건…… 흐, 흥, 여기 사람들이 너무 무능해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나서는 거라고요. 아, 성녀님은 빼고요. 성녀님이 안 계시면 전 바로 내일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성녀님…….”

“후후, 퀴나스도 참. 제가 당신을 버릴 리가 없잖아요? 착하지, 착하지.”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을 한 퀴나스를 성녀가 어린애 달래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동안 둘 사이에 정말 많은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뭐라도 좀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게 많지가 않네요. 아, 이런 건 어때요?”

말로는 많지 않다면서 성녀는 음식에 여행용 물자에 여비에 뭐에, 마차가 가득 찰 만큼 이것저것 챙겨줬다. 점액질 몸으로 돌아가 마차 바닥에 늘어져 쉬고 있던 케이가 봉변을 당할 뻔했다.

“넌 왜 그런 데서 쉬고 있어?”

“인간들의 얘기는 듣고 있어봤자 귀찮고 지루하고 재미없는걸. 옛날부터 생각했지만, 너희 종족의 삶의 방식은 쓸데없이 복잡해.”

꾸물거리며 기어 나온 케이는 이번에는 마차 뒤쪽 벽에 달라붙어 자리를 잡았다. 유리아가 마차 지붕 위 지정석에 올라서고, 소아레스가 마부석에 앉았다.

자이안은 짐을 절반 정도 덜어내 억지로 성녀들에게 되돌려준 다음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언젠가 다시 올게요. 그때 법왕국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고 있을게요.”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뒤 자이안이 마차 문을 닫았다. 소아레스와 유리아도 저마다 짧게 인사를 하고, 이윽고 마차가 북동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목적지, 세계수의 숲은 이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