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전쟁이 끝난 뒤에(1)
(95/210)
95화 전쟁이 끝난 뒤에(1)
(95/210)
95화 전쟁이 끝난 뒤에(1)
2023.01.06.
아르스와 유민이 합작한 아티팩트의 위력은 경이적이었다. 빛의 파도가 전장을 덮친 순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이들이 빠르게 치유되기 시작했다.
떨어져 나간 팔다리와 함께 미래를 잃은 이들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게 유민 누나의, 성자의 힘…….’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으며 감탄이 섞인 작은 숨을 뱉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각성자들의 힘은 이렇게 직접 마주할 때마다 놀라웠다.
동시에 지금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고무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상념을 접고 자이안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제들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듯 열띤 얼굴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의외였다. 물질적 풍요에 취해 부패한 그들에게 이런 신앙심이 남아있을 줄이야.
「흥. 저러니까 두 배로 더 괘씸하구만.」
프레이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작은 쓴웃음을 터뜨리며, 자이안도 그 말에 내심 공감했다.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기적 앞에 겸손해지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들은 처음부터 이런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됐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아까 두 팔을 잘라낸 채 방치한 틴디아 추기경이 생각났다. 마지막 소동의 주동자인 그는 분명 법왕과 성녀의 행방을 알고 있을 터. 문제는 그 역시 유민의 강력한 백마법 때문에 두 팔이 회복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었다.
‘……한 번 더 자르면 얌전해지려나.’
그때 천막 입구가 걷히고 틴디아 추기경이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자이안은 펜던트를 쥐며 경계했으나, 그의 창백한 안색에 적의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홀린 듯한 눈으로 동쪽을 바라볼 뿐.
“오오…… 오오오오……!”
급기야 무릎을 꿇은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낮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자이안은 잠시 난감한 기분이었으나, 그냥 단호하게 나가기로 했다.
이제 와서 기적을 목도하고 참회한들 그가 조금 전까지 저지른 잘못은 지워지지 않는다.
“틴디아 추기경. 법왕과 성녀가 어디 있는지 말하세요.”
흠칫 어깨를 떤 그가 천천히 일어났다. 자이안을 돌아보는 두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마, 말하겠습니다.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녀의 재림을 목도한 충격, 자이안을 마주한 두려움 등으로 반쯤 넋이 나간 추기경은 거짓말 따위는 추호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자이안이 그가 말한 대로 법왕국 진영의 후방으로 향하는 동안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놀라우리만치 쉬웠다. 지난 고생이 맥없게 느껴질 정도로. 아니, 그렇게 고생했으니 이렇게 쉬워진 것이리라. 고생한 보답을 받을 때였다.
“법왕 성하와 성녀님께서 쉬고 계신 마차다. 성하께서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저는 두 분을 마주할 자격이 있어요. 비키세요.”
전장에서 좀 떨어진 탓인지 마차를 감시하고 있는 기사들은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력을 불어넣은 검을 맨손으로 쥐어 부러뜨리는 자이안의 모습을 보며,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마차를 지키는 기사들은 틴디아 추기경의 파벌이 아니었다. 대부분 협박에 굴복해 억지로 그 지시를 따르고 있었고, 누군가 이 진퇴양난을 타파해주길 바라는 이도 더러 있었다.
“당신, 분명 베르디르크 경이었죠?”
와중에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자이안이 말을 걸었다. 법왕과 처음 만났을 때, 성녀가 위급하다며 그를 급히 부르러 온 기사였다. 군율을 어기고서라도 직접 달려온 그 행동력을 생각하면 말이 통할 것 같았다.
“두 분은 무사한 건가요? 제 말은, 틴디아 추기경이 혹시…….”
“두, 두 분께선 무사하시다. 엄중히 보호받고 계시니까.”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작은 안도로 미소 지은 자이안이 마차 문을 열었다. 안은 조용했다. 성유물로부터는 여전히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나 강도는 전에 비해 많이 흐렸다.
성녀는 성유물을 안은 채 마치 어린아이처럼 법왕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프레이가 마안으로 빠르게 성녀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아직 안 늦었다.」
고개를 든 법왕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가, 이내 뭔가를 추측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틴디아 추기경이 실패했군.”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럴 리가. 애꿎은 목숨, 허망하게 죽지나 않았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오.”
“당신을 무너뜨리려 한 정적인데도 동정하는군요. 그 마음을 당신의 국민들에게도 향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통렬한 일침에 법왕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이었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내 선택은 같았을 거요.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성녀님의 안위니까.”
옅은 숨소리를 내는 성녀를 내려다보며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죽더라도, 성녀님께서 살아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오. 법왕국에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분명 성녀님 같은 분이니.”
자이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를 설득하는 건 그 어떤 말로도 불가능하리라. 잘못을 저지르고 만 지금도, 설령 잘못을 저지르기 전 과거였더라도.
“약속을 지킬 준비는 됐나요?”
“물론이오.”
다만 지금은 서로 해야 할 일을 끝마칠 뿐.
* * *
두 진영 사이에 펼친 천막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법왕과 성녀, 이를 호위하는 신성기사단. 원로교수 졸트 타기온과 질풍, 업화, 맹목, 중압 네 장로. 유민과 퀴나스를 선두로 한 자이안 일행까지.
그러나 일부를 제외하면 협상을 위해 모인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전쟁을 끝내고 서로 간의 약속이 지켜졌음을 증명하기 위한 입회인의 입장이었다.
“……됐어요. 아니, 된 건 아니지만, 일단은 됐어요.”
가진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성녀를 치유한 퀴나스가 다소 지리멸렬하게 말했다. 곁에서 그녀의 백마법을 감독하던 유민은 어렵지 않게 속뜻을 알아들었다. 그녀가 좌중에게 그 말을 대신 번역했다.
“치유 자체는 깔끔하게 끝났지만, 원인이 남아있는 이상 언젠가 똑같은 일이 일어날 거란 소리예요.”
탄식, 혹은 탄성이 여기저기에서 새었다. 법왕은 꿈을 꾸는 듯한 심정이었다. 지난 수십 년 그를 괴롭힌 문제가 맥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의자를 이어 붙여 임시로 만든 침상에 법왕이 천천히 다가갔다. 퀴나스와 유민은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성녀의 상태는 안정적이다. 법왕이 갑자기 미쳐서 성녀를 죽이려 들기라도 하지 않는 한 괜찮을 것이다.
“성녀님, 접니다. 매일 같이 당신께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던, 아둔한 야울입니다. 제 말 들리십니까? 성녀님…….”
성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손가락 끝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바로 눈을 뜨지는 못했다.
법왕은 실망하지 않았다. 성녀의 체내에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들끓던 성력도, 혈관을 돌며 끊임없이 정신을 파먹던 독기도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감사…… 감사합니다. 주여, 나의 태양이시여. 으흑…….”
치유된 것이다. 이렇게 간단히, 거짓말처럼.
소리 죽여 오열하던 법왕이 이윽고 유민과 퀴나스를 돌아보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둘에게도 연거푸 감사 인사를 했다. 유민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퀴나스는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기분이었다.
“퀴나스, 이런 일은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아요.”
유민이 작은 목소리로 귀띔했다. 퀴나스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백마법을 배우면서 자신에게 놀라운 힘이 잠들어 있었음을 실감했다. 이 힘을 드러내면 지금처럼 부담스러운 상황을 자주 맞닥뜨리게 될 거란 것도.
“그, 그게 그러니까…… 벼,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부리지 마세요.”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옆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퀴나스는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정도는 저한테 별거 아닌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쯤하고 일어나요. 애초에 당신을 위해서 한 일도 아니거든요? 그냥 환자가 거기 있으니까, 옆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고요.”
“푸핫.”
갑자기 크룩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선이 모이자 그는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잠깐 츤…… 옛날에 읽은 소설들 생각이 좀 나서. 미안해요. 제가 분위기를 망친 것 같네요.”
“저거 또 지 혼자 아는 걸로 낄낄거리네.”
자칫 경직될 수도 있던 분위기가 다소 풀어졌다. 만약 거기까지 계산한 것이라면, 그 사려 깊은 행동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으리라.
크룩스를 바라보는 자이안의 시선이 존경으로 빛났다. 정작 크룩스는 갑작스런 시선에 영문을 몰라 부담스러워졌다.
“응…… 으으…….”
작은 소란이 자극이 된 것인지, 성녀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없던 법왕이 번개처럼 성녀의 곁에 달라붙었다. 다른 이들도 숨죽이고 성녀의 동향을 살폈다.
“여기…… 는…….”
마침내 성녀가 눈을 떴다.
“성녀님? 서, 성녀님! 드, 들리십니까?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시끄…… 러워요. 머, 머리가…….”
머리를 감싸 쥔 성녀의 고통스러운 한 마디에 법왕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성녀의 시선이 천천히 주위를 훑었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켜, 이어붙인 의자 몇 개를 치우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았다.
“야울…… 야울 요르딕.”
마침내 성녀의 시선이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은 법왕에게 향했다. 이름이 불리자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성녀가, 별안간 법왕의 뺨을 후려치고 그의 몸을 힘껏 걷어찼다.
“똑바로 서세요, 야울 요르딕.”
상상도 못 한 사태에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버린 가운데 성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로 나동그라져 있던 법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신속한 동작으로 그녀의 앞에 섰다.
그 모습은 사제가 아니라 기사, 아니 차라리 훈련 중인 신병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표정만은 곤혹으로 가득했다. 의식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몸에 밴 조건반사적 행동이라는 증거였다.
“야울 요르딕. 당신의 머리통 속에 들어있는 그건 뇌가 아니라 녹아내린 치즈라도 되나요? 그래서 제 가르침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요? 자신의 목숨을 다른 이의 목숨과 저울질할 수밖에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죠?”
“서, 성녀님, 설마…… 기, 기억하고 계십니까?”
“야울, 아둔한 야울. 불쌍하기도 해라. 이제는 자기가 했던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요? 당신이 제게 처음 약을 먹였을 때 그랬잖아요? ‘이지를 봉하는 약’이라고. 기억을 잃는다거나, 보고들은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거나, 그런 말을 한마디라도 한 적이 있나요? 그게 그런 약효를 가진 약이었나요?”
법왕은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성녀가 결국 대놓고 한숨을 쉬며 시선을 뗐다. 아직도 얼어붙은 분위기 속, 자이안 일행을 바라보고는 꽃이 피듯 웃었다.
“여러분께는 얼마만큼 감사를 전하고, 얼마만큼 사죄를 해도 모자라겠죠. 여러분께서 저를 고쳐주신 것, 이 멍청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애써주신 것, 모두 알고 있어요.”
“이 전쟁은 성녀님을 고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야울 요르딕? 전 당신에게 발언을 허가한 기억이 없는데요?”
정강이를 걷어차인 법왕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입을 다물었다. 일행들은 솔직히 법왕이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라? 잠깐.’
그 순간 크룩스가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그의 머릿속이 활발하게 돌아가며 한 가지 추론을 짜 맞췄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성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행동이 법왕을 위한 것이라면? 그를 강하게 매도해서, 반대로 다른 이들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우연히, 성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니, 크룩스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우연일 리가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 시선을 교차하며 둘은 마치 공방을 나누듯 치열하게 서로를 헤아렸다.
“어차피 기대를 하고 한 일은 아니었어요. 다만…… 그렇다고 아무 손도 쓰지 않고 성하를 내칠 수는 없었을 뿐이죠.”
갑작스러운 말을 온전히 이해한 건 크룩스 한 명뿐이었다. 그가 텔레파시로 다른 일행에게 전모를 전하자 그제야 다들 알아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죄송해요. 어쩌면 여러분들을 경계시키는 행동이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의 심정은…… 공감할 수 있어요.”
조용히 고개를 저은 자이안이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공감해도 죄를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흔들림 없는 자이안의 눈동자를 보며 성녀는 힘이 빠진 듯 웃었다.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어린 여행자. 자이안 알코스라고 했죠? 당신 같은 분이 우리나라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때, 한동안 잠잠한 듯하던 성유물이 다시 흐린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미약한 빛이었으나 성녀의 표정은 고통을 참는 듯 일그러졌다.
유민과 퀴나스가 쏜살같이 달라붙어 백마법을 사용했다. 성녀의 상태는 곧바로 호전됐지만, 성유물은 여전히 빛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역시…… 백마법만 가지고서는 안 돼요. 저희가 24시간 내내 붙어서 관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유민은 성유물을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성녀의 상태가 호전되면 성유물의 반응도 바뀔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애초에 성유물은 일부러 주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노후화된 나머지 기능이 오작동해 주인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 부담이란 것도 유민 자신, 하다못해 퀴나스만 해도 어렵잖게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주인의 목숨에 기생해 평생을 함께한다는 그 특성이 문제였다. 이대로 성유물을 파괴하는 것도, 무작정 멀리 떨어뜨리는 것도 모두 좋은 방법이 아니다.
성유물의 기능을 근본부터 손봐야 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 그런 작업의 전문가가 있었다.
“좋아, 좋다구우. 말 안 듣고 말썽만 부리는 아티팩트는 이 언니한테 맡기면 모두 해결된단 말씀!”
백팩을 완전 전개한 아르스가 두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