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기적의 재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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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기적의 재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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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기적의 재림(4)
2023.01.05.
“예를 지키고 올바른 경칭을 사용하도록, 마법사 졸트. 본래 불로써 정화해 이 땅에서 모조리 없애버려야 하는 너희들을 살려두는 대가다. 싼 편이지 않은가?”
“그게 고약한 농담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나는 당신들의 모자란 머리를 동정할 수밖에 없겠군. 우린 이 조약서의 어떠한 내용에도 동의할 수 없다.”
“착각하지 마라, 사악한 마법사. 나는 너희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틴디아 추기경이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그의 다섯 손가락에 하나씩 끼어 있던 반지가 눈 부신 빛을 발했다.
뻗어 나온 빛의 끈이 졸트와 질풍, 그리고 자이안을 삽시간에 구속했다. 즉시 마안을 열고 분석을 시작한 프레이가 이내 탄성을 터뜨렸다.
「꼴에 믿는 구석이 있었군. 호오, 제법 대단한데? 그야말로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특화된 신성술이다. 대상이 강한 마력을 가질수록 강한 구속력을 갖게 되는 구조야.」
손가락을 꿈틀거리던 졸트의 표정에 낭패가 어렸다. 질풍은 태연했고, 자이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숨을 죽이고 셋의 동향을 살핀 틴디아 추기경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욕망과 살의로 뒤틀린, 사악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크하하하! 멍청한 마법사들 같으니! 뭐? 정전? 우리가 정말 네놈들의 사악한 망발에 귀를 기울일 거라 생각했나!”
천막 바깥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그대로 지체 없이 무기를 뽑고는 자이안과 질풍, 졸트를 빈틈없이 포위했다.
자이안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에 아무런 위협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틴디아 추기경은 몇 가지 착각을 했다.
하나. 자이안을 그저 강력한 마법사라고 생각했다.
둘. 그를 인질로 삼아 용을 다스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셋. 자이안을 강한 힘을 가지긴 했으나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무른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착각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줄곧 성도에 있다가 법왕과 함께 어제 처음 전장에 왔기 때문에 자이안이 그동안 어떻게 활약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이안 일행이 성유물의 폭격을 막아내는 모습 역시, 가호가 파괴된 반동으로 탈진해 있었던 터라 보지 못했다.
그가 자이안에게 가진 인상이라고는, 성녀를 불쌍히 여긴 나머지 적일 터인 법왕마저 용서해 버리는 나약한 마음을 가진 소년이라는 것뿐이었다.
‘어쩔 수 없나.’
자이안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로교수들을 제압했을 때와 비슷했다. 이런 종류의 인간은 두 번 다시 허튼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밑바닥까지 떨어뜨려야 한다.
어느 한 명을 본보기로 삼는 것도 효과가 좋았다. 아르스가 헤이젤을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뭐야, 알고 있었냐? 아르스 그 녀석, 일부러 죽인 거 너한테 들키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했는데 말이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다른 수단이 없나 한 번 더 생각해봤겠지만,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라는 건 인정해요.’
“어, 어어……?”
“어, 어서 막아!”
놀라 굳어있던 기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휘둘렀다. 자이안은 그 공격을 맨손으로 쳐냈다. 신성력이 깃든 칼날이 피부를 때리며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동시에 기사들의 무기가 마치 마술처럼 절반으로 쪼개져 바닥으로 쏟아졌다.
“질풍, 당신 제자를 지켜요.”
짧게 말하고 자이안은 그대로 원탁을 훌쩍 뛰어넘어 틴디아 추기경의 옆에 착지했다. 그가 뭔가 반응하는 것보다 먼저, 그의 목을 한 손으로 붙잡고 남은 한 손으로 손날을 만든다.
칼날처럼 벼려낸 내력을 일순간만 방출해, 그대로 그의 두 팔을 어깻죽지부터 절단했다.
“히……! 흐……!”
기도가 막힌 그가 새된 바람 소리를 내며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자이안은 MP를 가다듬어 그의 양어깨에 백마법을 걸었다. 절단면이 빠르게 막히고, 그럴수록 그는 더 거세게 버둥거렸다.
보통 백마법에는 대상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효과가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이번에는 그 효과를 의도적으로 뺐다. 치유가 빠를수록 더 큰 격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끄…… 윽…….”
급기야 바지를 적시며 실금한 추기경이 결국 힘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기절한 그를 담담히 내려다보다가, 자이안은 기사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모셔 가세요.”
“…….”
“어서요.”
기사들이 흠칫거리며 다가왔다. 천적을 눈앞에 둔 초식동물 같은 움직임이었다. 자이안이 인상을 쓰며 틴디아 추기경을 내밀자, 기사들을 조심조심 그를 부축하며 물러났다.
“저걸 살려? 뭐 하러?”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로 돌아온 자이안에게 질풍이 물었다. 자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철저히 구분하기로 했거든요. 죽이든 살리든, 그 결정을 제가 독단하지 말자고. 피해자든, 법률이든, 그를 처벌해야 하는 이에게 맡기자고.”
보석탑을 제압하면서 결심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무의미한 고집이라고도 할지도 몰랐다. 실제로 질풍의 표정이 바로 그랬다.
“넌 뭐랄까…… 쉬운 길도 어렵게 돌아가는 걸 좋아하는구나.”
질풍의 말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여태까지의 자이안의 여정을 아주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었다.
천막의 분위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어붙은 채였다. 자이안은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했다가, 그냥 수습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는 마지막으로 유리아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준비는 어떻게 됐어요?
-이쪽은 완벽해! 자이안이 신호하면 바로 움직일 수 있어!
-그럼 지금 바로 부탁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이 걷잡을 수 없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자이안이 밖으로 향했다. 나가기 직전, 사제들을 돌아보고는 말없이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사제들은 혼란스러워하며 서로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하나둘 천막을 나가기 시작했다.
동쪽에서 강한 빛이 쏟아졌다. 사제들은 저마다 그 방향을 바라보고,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표정이 되었다. 한 명이 먼저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그 행동이 전염되는 것처럼 다른 사제들에게 퍼져나갔다.
그들의 얼굴에 조금 전까지와 같은 욕망, 적개심 따위는 흔적조차 없었다. 그들이 숭배하는 태양이 환한 빛으로 그들의 마음을 불태워 정화한 것처럼.
* * *
태초에, 암흑천지의 지상에 태양이 내려왔다.
지상의 존재들은 본래 끝없는 암흑 속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영원히 고통 받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천상의 거주자 중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가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 되는 태양을 찾아가 지상을 구하고자 하는 속내를 밝혔다.
천상의 거주자에게 본래 지상은 결코 간섭해서는 안 되는 금기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여인의 선함과 고결함에 끝내 태양이 뜻을 굽히고,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 여인에게 전해주었다.
이를 받은 여인은 같은 뜻을 가진 종자 한 명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왔다.
“고전적이고 표준적인 신화네요. 차원이 달라도 사람의 사고방식은 변하지 않는 걸까요?”
“그러게에. 어떻게 보면 신기한걸. 이쪽의 인간과 지구의 인간이라는 게 겉모습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도 완전히 일치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누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인거얼.”
퀴나스에게 태양신교의 신화를 전해 들은 각성자들의 반응은 이랬다.
신화의 내용을 어디까지 구현해야 할까? 쟁점은 그것이었다. 잠시 갑론을박이 오갔으나, 최종적으로는 모든 내용을 되도록 빠짐없이 구현하기로 했다. 퀴나스의 의견이 결정적이었다.
“저는 잘 이해를 못 하겠는데…… 어디까지 구현해야 할지 구별하는 게 왜 필요한 거죠? 설마 당신들, 성서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
맹점이었다. 지구에서는 독실한 교인들조차 성서의 내용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지 치열하게 검증하지만, 여기는 지구보다 문명이 더딘 세계였다.
권력에 타락했다는 고위 사제들마저도 성서의 내용을 검증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성녀 역할은 퀴나스 양이 제격이네요.”
그리고 이렇게 방침 결정에 지대한 공헌을 한 퀴나스는…….
‘추, 춥고, 뜨겁고, 발밑은 허전하고……! 으으,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겠다고 나서서!’
상공 수백 미터.
몸을 지탱해주는 끈 하나 없이 공중에 뜬 퀴나스는 이대로 떨어져 버리면 어쩌나 상상할 때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아르스의 아티팩트로 보호받는 이상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은 없지만, 각성자들에 대해 모르는 그녀로선 당연한 우려였다.
농부의 딸인 그녀에게는 각성자들이 비범한 존재임을 깨달을 만한 직감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추측할 기반 지식이 부족했다.
‘떠, 떨어지면 유민 님이 고쳐주시겠지. 아니지, 그 전에 소아레스가 받아주려나.’
억지로 긍정적으로 생각을 돌리며 퀴나스는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유리아의 말에 의하면 발아래 보이는 집단이 보석탑의 마법사들, 눈을 들어 정면에 보이는 집단이 법왕국의 군대라고 했다.
두 집단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고, 그사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천막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멀어서 잘 알아보기 힘들지만 익숙한 인상의 소년이 서 있었다.
‘저런 애가 전쟁을 막는다고 고생하고 있는데…….’
퀴나스가 이 미친 짓을 하고자 결심하는 계기가 된 소년, 자이안이었다.
‘다 큰 어른인 내가 그 등 뒤에 숨어있기만 하는 건, 너무 부끄럽잖아.’
퀴나스는 어찌 보면 운이 좋았다.
국민들에 대한 법왕국의 우민화, 세뇌에 가까운 종교 교육은 성도에 가까워질수록 심해진다. 반면 변방, 특히 보석탑과의 국경 근처는 상대적으로 중앙의 손길이 잘 미치지 않는다.
언제 보석탑과의 ‘약조’에 의해 사라질지 모르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녀는 한직으로 좌천되어 의욕이라곤 쥐뿔도 없는 마을 사제에게 가끔 설교를 듣는 것 말고는 흔한 농부의 딸로 자라게 됐고, 백지에 가까운 유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신들을 납치해 전쟁 병기로 쓰려 했던 법왕국의 작태에 거리낌 없이 분노할 수 있었다.
비단 퀴나스뿐 아니라 그녀와 같은 시기 납치당했다가 소아레스가 구한 다른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잡음을 줄이기 위해 변방의 주민들을 납치한다는 법왕국의 계획이, 소아레스의 개입이라는 변수 탓에 거꾸로 자신들에게 창을 향한 것이다.
-퀴나스 양? 제 말 들려요?
갑자기 머릿속에 울린 목소리에 퀴나스는 비명을 터뜨릴 뻔했다. 크룩스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필요하다면 이쪽에서 지시를 내릴 테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대신 머릿속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도 놀라지 말라고.
“드, 들려요.”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인 것 같아서요. 성서에 쓰인 성녀의 첫 마디, 지금 똑같이 읊으면 효과가 탁월할 거예요. 혹시 기억이 안 난다면 제가 말해줄 테니, 그대로 따라…….
“기억하고 있어요. 괜찮아요.”
-하핫. 믿음직스럽네요. 그럼 퀴나스 양에게 맡길게요.
성서에 기록된 성녀의 모든 말씀을 퀴나스는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필사적으로 외운 것이다.
‘실패하면 안 돼.’
퀴나스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몸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등에 짊어진 태양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환한 빛이었다.
-빛은 암흑 속에서 더욱 찬란히 빛나는 법이니, 그대들의 고통 또한 암흑과 함께 걷힐 것입니다.
그 빛은 날개가 돋아난, 자애로운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형상을 띠고 있었다. 성서에 묘사된 ‘천상에 거주하는 이’의 모습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내가 그대들과 함께 걷겠습니다.
퀴나스가 짊어진, 태양을 연상케 하는 빛의 구체가 소리도 없이 무너졌다.
압축된 백마법이 담긴 빛의 파도가 양쪽 진영을 공평하게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