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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기적의 재림(3) (93/210)


93화 기적의 재림(3)
2023.01.04.


자연스럽게 뒤따르기 시작한 자이안 일행을 법왕은 제지하지 않았다. 기사와 사제들은 극도로 경계했으나 법왕의 눈치를 살피는 것인지 직접 행동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따라가서 뭘 어쩔 셈이냐?”

“어찌 보면 이 모든 일의 원인이잖아요.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요. 위험한 상태라는 말도 좀 마음에 걸리고…….”

아무래도 하해와 같이 넓은 오지랖이 또 꿈틀거리는 모양이었다. 프레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 따로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우려가 없지는 않았다.

‘아까 봤을 때는 성녀의 상태가 영 이상해 보였는데…… 흠, 직접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왔던 길을 되돌아오는 법왕에게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예를 갖췄다. 그러나 얼굴에는 아직 곤혹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자이안과 프레이는 물론이고, 케이까지 허공에 뜬 채 그들을 뒤따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성하! 성녀님께서……!”

진영 뒤쪽의 마차에 가까워지자 사제 하나가 절박하게 달려왔다. 법왕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는 각오를 다잡기 위해 한 번 눈을 감았다 뜬 다음, 천천히 마차의 문을 열었다.

“윽……!”

빛이 쏟아졌다. 자이안이 펜던트를 쥐고 프레이가 재빠르게 결계를 폈다. 그러나 공격적인 빛은 아니었다. 잠시 경계한 둘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차 안쪽에 시선을 향했다.

성유물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조만간 폭발하기라도 할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성녀는 무섭지도 않은지 그걸 두 손으로 가슴에 끌어안은 채, 창백한 안색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법왕이 사제를 돌아보았고, 사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법왕은 짧은 한숨을 뱉은 뒤 자이안 일행에게 말했다.

“성녀님 앞에서는 되도록 정숙을 지켜 주시길 바라오. 자칫 성녀님을 놀라게 할지도 모르니.”

눈을 바라보고, 자이안은 위화감에 인상을 썼다. 마차가 열리고 많은 이들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녀는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 흐리멍덩한 눈빛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어느 한 점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실례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자이안은 어느 한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백치.

“성녀님께선 오래전부터 이지를 잃고 계시오. 아니, 그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만들었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성녀님의 정신이 파괴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오. 보통은 진정제로 쓰이는 약초의 약효를 일부러 강하게 배합하고 꾸준히 먹여, 정신을 극도로 이완시켜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도록 했지. 해독 수단은 이미 있으니, 언젠가 성유물이 폭주를 멈추고 안정화되면 그때 다시 되돌리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말에서 무언가를 연상한 자이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소아레스가 보고로 전한, 납치한 성녀 후보들을 세뇌하기 위해 사용한 마약 중 일부와 효과가 같았다.

“성녀님을 하루빨리 되돌려주고 싶었소. 하지만 성유물의 폭주는 점점 더 심해지고, 주기도 짧아졌지. 대책을 찾기 위해 나는 온갖 문헌을 뒤지고 사방으로 첩자들을 보내 정보를 모았소. 많은 이들이 희생됐지만, 마침내 단서를 찾았소. 보석탑 아래의 미궁, 그 안에 머물고 있는 신화시대의 존재였지.”

대체 왜 이런 얘기를 자기 입으로 술술 풀어놓고 있을까? 법왕은 문득 자신의 행동이 우스워졌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아무 상관없는 여행자임에도, 전쟁에서 죽어가는 목숨을 두고 보지 못해 이를 막으려고 행동한 그들이. 자신은 몰라도 성녀는 아무 죄 없는 선하고 고결한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쩌면.

“전쟁을 벌인 진짜 이유가 그거였나.”

“적어도 나는 그렇소. 다른 고위 사제들 역시 저마다 전쟁을 통해 바라는 바가 있겠지만 말이오.”

고개를 끄덕이는 프레이의 눈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성녀와 성유물을 유심히 살핀 그가 낮게 탄식하며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아티팩트다. MP를 사용하는 진짜 아티팩트. 소유자의 생명에 기생하는 대신, 소유자가 가진 백마법 자질을 아주 크게 증폭시켜 주지. 기생이라고는 해도 따로 불이익을 주는 건 아니다. 그저 평생을 함께하다가, 소유자가 죽으면 다른 소유자를 찾아 나설 뿐이다. ……원래대로라면 그랬겠지.”

아티팩트는 섬세한 도구다. 괜히 지구에서 관련 기술이 ‘공학’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변변찮은 점검도, 기능 개선도 없이 몇 천 년을 방치했는데 제 기능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었다.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오히려 오래 버틴 거지. 내부 구조를 한 번 살펴봐라. 아마 너도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회로가 엉망일 거다.”

잠시 망설인 자이안이 법왕에게 허가를 구했다. 법왕은 마음대로 하라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모든 생살여탈권은 자이안 일행 손에 있었다. 마지막 고집으로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잠깐만…… 으앗?!”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댄 순간 성유물이 뿜어내는 빛이 갑자기 격렬하게 요동쳤다. 전류가 튀는 소리와 함께 자이안의 손이 거칠게 튕겨 나갔다.

단련된 각성자의 피부에 상처를 입힐 정도는 아니지만, 손가락 끝은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소유자가 아닌 이의 손길을 거부하고 있군. 아니지, 아까 법왕이 아티팩트를 썼는데? 설마 자기를 건드려도 좋은 사람, 아닌 사람을 자의로 구분하고 있는 건가?”

잠시 프레이와 자이안은 말없이 시선을 나눴다. 이어 법왕에게서 잠시 떨어진 뒤 짧게 얘기를 나눴다. 합의점은 금방 나왔다. 자이안의 결심은 이미 확고했고 프레이 역시 이를 예상하고 있었으니.

“제안이 있어요.”

다시 법왕에게 온 자이안이 말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 일행이 성유물을 고치고 성녀님을 낫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

법왕은 무표정이었다. 자이안의 말을 아예 듣지 못하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전쟁을 멈추고, 지금까지 당신들이 저지른 크고 작은 죄를 모두 공표하고, 죗값을 치를 것. 단 한 명도 도망치거나 죗값을 적게 받아서는 안 돼요. 약속할 수 있다면, 성녀님은 도와드릴게요.”

그 순간 법왕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주위가 깜짝 놀라는 것도 개의치 않고, 흙바닥에 엎드린 그가 오열하듯 목소리를 쥐어짰다.

“부디…… 부디 성녀님을, 부탁드립니다.”
 

* * *

자이안은 두 진영 사이에 야영지를 만들고 하룻밤을 보냈다. 밤중에 눈에 띄는 큰 움직임은 없었다. 이미 양측 모두, 적어도 말단 병력은 전쟁을 계속할 의지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 짓거리도 정말로 끝이구만. 고생 많았다, 자이안.」

오랜만에 지구로 돌아간 프레이가 침대 위에서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자이안은 야영지 앞에 서서 양측 진영을 한 차례 돌아보았다.

정전 협상은 오늘 오전 중에 진행하기로 결정됐다. 어제, 한 차례 이성을 잃은 법왕이 제정신을 되찾은 뒤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도사제 한 명이 사자로서 몇 번 두 진영을 오갔고, 보석탑 측 대표인 졸트는 두말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 자이안은 유리아에게 통신을 걸었다. 이대로도 문제없이 전쟁이 끝날 거라고 낙관적으로 예측할 수도 있지만, 확실하게 끝을 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야 했다.

서로 정보를 공유한 뒤, 유리아가 딱 하루만 더 시간을 달라는 유민의 말을 전했다. 자이안은 그 말을 믿고 협상 일시를 바로 다음 날로 제안했다.

「슬슬 오는군.」

정해진 시간이 가까워지자 법왕국 측에서 일단의 기사들이 먼저 자이안의 야영지에 가까워졌다. 자이안의 천막을 손보고, 안에 의자와 테이블을 배치하고, 천막 입구에 법왕국을 상징하는 태양을 형상화한 표식을 세워놓았다.

「이런 때까지 허세를 부리고 싶은가? 하여간 이해 못 할 놈들이야.」

“줄곧 그런 방식으로만 살아왔던 게 아닐까요?”

「하. 그렇게 생각하면 불쌍한 놈들이긴 하네.」

문득 자이안은 옛날 생각이 났다. 프레이와 만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날 때부터 평생 귀족의 의무에 묶여 있던 나머지 ‘자유로운 삶’이 뭔지도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

협상 시간이 가까워지는 동안 자이안은 몇 번 더 유리아와 연락을 나눴다. 저쪽도 순조로웠다. 다만 변수가 하나 있었다.

질풍을 제외한 세 장로, 중압, 업화, 맹목이 그들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난 솔직히 잘 이해를 못 하겠는데…… 그 사람들은 아무래도 진심으로 죽고 싶은 것 같아. 우리가 싫다고 했더니 그럼 자이안이랑 얘기해보고 싶대.

자이안이라고 그들의 심리가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자이안은 조금 고민했으나 결국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짐을 떠안기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크룩스에게 맡기기로 했다.

「10분 남았다.」

보석탑 측에서 먼저 졸트와 질풍이 날아왔다. 졸트는 어디서 구했는지 그동안 전장에서 구르느라 헤진 로브를 버리고 깔끔한 새 로브를 입고 있었다.

반면 질풍은 바람이 의인화한 모습 그대로였다. 어차피 무슨 옷을 입혀도 안 어울릴 것 같았고, 저 모습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게 직관적으로 느껴져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두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왕국 측에서도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러나 그 면면을 살핀 자이안은 의아함에 눈썹을 모았다. 가장 중요한 법왕이 없었다.

대신 총 6명의 고위 사제가 적의를 숨기지도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들도 흉흉한 분위기였다.

“성하께서는 성녀님의 용태가 위급해진 나머지 한발 앞서 성도로 귀환하셨다. 나는 성하께 정전 협상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은 파엘로 틴디아 추기경이다.”

일방적으로 제 할 말만 마치고 그는 바로 천막으로 들어갔다. 남은 사제들이 그 뒤를 따르고, 기사들이 천막 주변을 보호하듯 빙 둘러섰다.

「아니 잠깐, 이게 무슨 냄새지? 오호, 이건 거짓말을 하는 냄새잖아?」

‘사제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요?’

「그래. 분위기를 보아하니 기사들도 모두 한통속이다. 잠깐, 이러면 법왕과 성녀도 이미…… 아니, 이건 지나친 생각이겠군. 하지만 협상 결과에 따라서는 둘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프레이의 말은 반역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자이안은 한숨을 삼키며 마지막으로 천막으로 들어갔다.

천막 내부는 미묘한 분위기였다. 사제들은 질풍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자이안의 의도가 먹혀들어 간 모양이었다. 사제들 사이에 감돌던 적의가 곤혹과 불안으로 한풀 꺾였다.

“크흠. 그, 그럼 회담을 시작하지.”

사제들이 간신히 혼란을 수습한 뒤, 마침내 협상이 시작되었다.

사실 의견을 나눌 것도 없었다. 어차피 보석탑은 이미 완전히 무너진 상태. 거점을 잃은 마법사들은 조만간 일부는 죽고 일부는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법왕국은 그렇게 보석탑이 와해될 때까지만 병력을 물리고 있으면 된다. 그렇게 되면 전쟁을 하고 싶어도 전쟁을 일으킬 상대가 아예 없어지니까.

“기술 제공? 포로? 틴디아 사제, 이걸 지금 조약서라고 휘갈겨 쓴 건가?”

그러나 사제들이 내민 조약서는 그야말로 엉뚱한 내용이었다. 보석탑이 독점하고 있는 마법 기술을 공유하고 마법사 일부를 전쟁 포로로 데려가겠다는 등 일방적인 내용으로 가득했다.

말이 정전이지, 대놓고 속국이 되라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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