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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기적의 재림(1) (91/210)


91화 기적의 재림(1)
2023.01.02.


법왕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조금 전.

“스승님? 대체 어떻게 여기에…… 아아.”

자이안의 호출에 진영 후방으로 빠져나간 졸트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질풍과 동행한 자이안의 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납득했다는 듯 탄성을 터뜨렸다.

“넌 스승을 수십 년 만에 봤는데 한다는 말이 그것뿐이야?”

“제가 감격에 겨워 환영하길 바라기라도 하셨습니까? 스승님, 제 나이가 내일모레 여든입니다.”

“그래? 한창 애네.”

“하아…….”

졸트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지긋지긋함 반, 그리움 반이 섞인 표정이었다.

“왜 일어나셨습니까? 그냥 저희한테 맡기고 계속 쉬시지.”

“탑이 그 꼴이 났는데 어떻게 그래? 우리가 그렇게 되라고 너희한테 탑의 관리를 맡긴 줄 알아?”

악우처럼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며 자이안은 신선한 기분이었다. 질풍이야 그렇다 치고, 졸트는 지금까지 오만하거나, 근엄하거나, 그도 아니면 비굴할 정도로 저자세인 모습밖에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한 꺼풀 벗어내면 결국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저희는 잘못을 잘못이라고 눈치채지 못했고, 스승님께선 저희에게 그것을 잘못이라고 가르쳐주지 않으셨지요.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쌓인 게 많으니 갚을 것도 많아진 겁니다.”

졸트의 담담한 말에 질풍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첫 번째’라고 말하기는 애매했지만 졸트 역시 아끼는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그는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좀 변했나? 넌 원래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숭고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잖아. 사람 하나의 목숨은 우주 전체와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라면서.”

“스승님, 사람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습니다.”

졸트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똑같습니다. 그저…… 제 생각을 부정하는 이들 역시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틀리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됐을 뿐이지요.”

“그래. 확실히 변했네.”

두 스승과 제자는 거의 동시에 자이안을 돌아보았다. 이목이 모이자 자이안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시선을 돌렸다.

“딱히 칭찬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게. 저렇게 힘으로 억지로 사람 생각을 뜯어고치는 것도 어떻게 보면 폭력이지. 그렇지 않니, 제자야?”

“전 그렇게까지 과격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자이안 님, 전 아닙니다. 그냥 스승님 혼자 이렇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눈앞에서 대놓고 뒤통수를 맞은 질풍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자를 노려보았다. 자이안은 솔직히 아무래도 좋았다. 안타깝지만, 이제 와서 그의 생각이 바뀐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둘은 회포를 풀려는 듯 여러 화제로 대화를 나눴다. 자이안에 대한 것, 탑에 대한 것, 전쟁에 대한 것, 저지른 죄에 대한 것, 피해자들에 대한 것.

미궁에 대한 것을 포함해, 장로들이 그동안 감추고 있었던 것도 모두.

“장로님들께선 미궁의 주인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걸 저희에게 비밀로 하셨고?”

“너무 많은 사람이 비밀을 알게 되면, 언젠가 밖으로 새어 나갈 거라고 생각했거든. 우리 넷만 알고 있으면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안심할 수 있었어.”

수백 년 전, 가장 처음 미궁을 발견하고 탐사를 시작한 네 마법사에게 미궁의 주인 ― 시기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본인은 단순한 호기심이었으나, 정작 그를 마주한 네 마법사는 두려움에 빠졌다.

당시 자신이 짊어진 감정에 깊이 침식되어 있던 시기는 문자 그대로 걸어 다니는 폭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말이 아예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네 마법사는 사력을 다해 대화를 시도했다.

시기의 언동은 지리멸렬했으나, 네 마법사는 어찌어찌 그의 바람을 알게 되어 이를 이뤄주는 것을 대가로 일종의 거래 관계를 구축했다.

그들이 어설프게나마 불멸의 영역에 발을 디딘 것도 거래의 일환이었고, 탑의 각종 교육과 연구 과정에도 시기에게서 얻은 지식이 많이 섞여 있었다.

장로들의 행동은 어찌 보면 제자들에 대한 기만이었다. 그들이 미궁의 정보를 통제하지 않았더라면 탑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을 것이다.

그러나 졸트는 장로들의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급격한 발전은 그만큼 큰 부작용을 불러오기도 하고, 무엇보다 시기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장로들은 위험한 모험보다 안정을 선택한 것이다.

“어휴. 이래서는 안 되겠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졸트를 빤히 바라보던 질풍이 문득 쓰게 웃으며 말했다.

“너한테 부탁 하나만 좀 할 생각이었는데.”

“음?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스승의 부탁을 들어보지도 않고 매몰차게 거절할 만큼 박정한 제자는 아닙니다.”

“그래? 그럼 나 좀 도와줘.”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둘을 감독하고 있던 자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아직 포기한 게 아니었나? 그러나 아까 전 그녀는 완전히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제자들을…… 살리고 싶어.”

“그건 어렵겠군요.”

졸트는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저기 저 친구 좀 보십시오. 눈에 불을 켜고 저희를 지켜보고 있는 게 안 보이십니까? 조금만 허튼 행동을 했다간 저희를 아주 묵사발로 만들어버릴 겁니다.”

“……그렇게까지 폭력적이지는 않아요. 그야 뭐, 막기는 할 테지만.”

“본인도 저렇게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렇지만…… 그럼 나는 제자들이 죽는 걸 지켜만 보라고?”

“저는 도망칠 생각 없습니다.”

그 말은 단호했다. 질풍은 황망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요.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저는 제 손으로 만들어낸 희생으로부터 눈을 돌릴 생각이 없었어요. 그 희생이 옳든, 불합리하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저는 그 모든 목숨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그 무게가 설령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저를 눌러 죽일지라도, 그것 또한 결말 중 하나라고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지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인데, 그동안 저는 너무나 먼 곳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대의를 좇느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어요.”

질풍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울음을 쏟아내려는 것도 같았고, 화를 참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결국 눈을 지그시 감고 침묵을 지켰다.

자이안은 직감했다. 이제야말로 그녀는 완전히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다른 제자들이라고 다 너랑 같은 생각은 아닐 거 아냐?”

“글쎄요? 코앞에 닥친 위험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멍청이들 머릿속이 어떻든 솔직히 별로 관심 없습니다만. 그 멍청이들이 인정하든 말든 이미 저지른 과거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너 이 녀석, 얌전해진 줄 알았더니 또 슬슬 성격 나오…….”

별안간 질풍이 말을 멈췄다. 먼 서쪽을 바라보는 질풍의 표정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자이안도 조금 늦게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서쪽, 법왕국 측 진영에서 거대한 힘이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었다. 신성력이 분명했으나, 신성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하고 마치 활화산처럼 들끓고 있었다.

“이건…….”

장검으로 변형시킨 스펙트럼을 손에 쥐고, 자이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성녀가 처음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강했다.

‘성녀를 대규모로 모아 한 번에…… 아냐, 뭔가 이상해. 성녀의 힘은 몇 명이 모이든 아티팩트에 의해 무효화될 텐데. 성녀와 비슷하지만 더 강력하고, 아티팩트의 효과가 통하지 않는 무언가……?’

“……성유물!”

버럭 소리친 자이안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크룩스에게 배운 MP 방출 요령을 응용해 발밑에 발판을 만들고 연거푸 위로 솟아오르며, 그는 졸트와 질풍에게 급히 말했다.

“마법사들의 대피를 서둘러주세요! 저건 아마 아티팩트로는 막을 수 없어요!”

“자이안 님?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넌 어떡할 셈인데?”

질풍의 물음에 자이안은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법왕국 진영의 후방에서 눈 부신 빛이 사방으로 폭발했다. 공중에서 크게 꺾여 마법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의 궤적을 보며 자이안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막을 수 있는 데까지 막아볼게요.”

발판을 박찬 자이안의 몸이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동시에 날아드는 빛의 궤적과 숫자,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다. 총 21개. 넓게 확산되어, 아예 전장 전체를 초토화할 기세다.

일전에 성녀의 기습 공격에 한 차례 당한 뒤로 마법사들은 철저하게 산개 진영을 유지해 왔지만, 그래도 저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면 90%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되리라.

-자이안! 4개만 맡아라! 나머지는 나와 케이가 어떻게든 할 테니!

프레이의 텔레파시에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가장 가까운 위치의 빛의 궤적으로 날아든 자이안이 온 힘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터무니없는 열량이 정면으로 쏟아졌다. 즉시 온몸에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지속 치유 마법을 걸었지만, 그래도 격통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자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맞댄 이빨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스스로를 고무시키기 위해 낸 기합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굉음이 들렸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빛과 열과 압력과, 그리고 자이안 자신의 움직임만이 느껴졌다.

두 팔에 재차 힘을 불어넣었다. 스펙트럼은 한결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녹아내리기는커녕 날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
그 견고함이 더없이 든든했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지지 말라고, 대신해서 자신을 고무해주는 것 같았다.

“……흐읍!”

스펙트럼이 가로로 무지갯빛 궤적을 그렸다. 눈앞에서 폭발이 일어났으나, 미리 대비한 자이안의 피해는 최소한에 그쳤다.

의식을 잃지도 않았고 백마법도 유지되고 있었다. 녹아내린 피부가 급속도로 재생되며 온몸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제 하나……!’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실제로 폭발 하나를 막아내는 데 든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힘들긴 했으나 도저히 못 할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교만이나 음욕과 싸울 때보다는 나았다.

압력에 떠밀려 뒤로 휙 날아간 자이안은 허공에 발판을 만들어 다음 목표를 찾았다. 방향을 정하고 다시 도약. 두 번째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마법사들의 진영에 가까웠다.

‘무작정 베어 없애면 시간이 모자랄 거야. 더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해보자.’

빛의 궤적을 향해 날아들며 자이안은 칼날을 옆으로 눕혔다. 내력에 의식을 집중해 특수한 순환 루트를 그리고, 이를 스펙트럼에도 동일하게 재현했다. 그의 등 뒤로 헤일로가 마치 불꽃처럼 펼쳐졌다.

“하아아아!”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칼의 측면이 빛의 궤적의 앞부분과 충돌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빛의 궤적이 마치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다른 방향으로 휙 꺾여 날아갔다.

‘성공했다! 아틀라스식 타격술!’

실체가 없는 에너지 따위를 마치 실물이 있는 것처럼 손으로 직접 만지고 타격하는 것은 크룩스를 대표하는 기술 중 하나였다.

자이안은 오래 전부터 이론을 배워 알고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는 감을 잡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지난번 서클릿의 힘을 처리할 때 그 힘을 맨손으로 직접 만지는 크룩스의 모습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

“큭, 팔이…….”

무리하게 힘을 담은 두 팔의 뼈가 엉망으로 부서져 끔찍한 각도로 뒤틀려 있었다. 크룩스였다면 똑같은 짓을 수억 번을 반복해도 이런 사고는 결코 내지 않을 것이다.

급하게 흉내만 냈을 뿐, 아직 기술적으로 그의 발끝에도 못 미칠 만큼 미숙했다.

그러나 자이안은 실망하지 않았다. 백마법을 집중시킨 두 팔이 마치 시간을 거꾸로 감은 것처럼 빠르게 완치되었다.

한 가지 기술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 백마법도, 흑마법도, 아티팩트 기술도 모두 자이안의 힘이었으니까.

‘이제 두 개…… 할 수 있어.’

프레이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자이안은 즉시 다음 목표를 향해 뛰었다.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비쳤다. 하늘로 날아오른 질풍이 빛의 궤적 하나를 정면으로 막아서고 있었다.

“멋대로…… 둘 줄 알고!”

그녀의 몸이 정해진 형체를 잃고 광포한 폭풍이 되어 날뛰었다. 덕분에 조금 여유를 벌었다. 이렇게 되면 아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시험해 최대한 많이 막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삼촌은 괜한 무리 하지 말라고 하실 게 뻔하지만…… 알 게 뭐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묘하게 정신이 고양된 자이안이 속으로 소리치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세 개, 네 개, 연달아 다섯 개.

점점 처리가 손에 익었고 하나를 처리할 때마다 입는 상처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즈음 프레이의 텔레파시가 다시 전해졌다.

-고생 많았다! 이제 우리한테 맡겨!

속도를 줄인 자이안이 위쪽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갈라지며 거대한 용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불타오르는 백염을, 한 손에 창백한 번개를 두른 프레이가 케이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망할 자식들, 쓸데없이 애먹이기는.”

한쪽 손을 휘두르자, 손끝에서 뻗어나간 번개의 사슬이 사방으로 갈라져 아직 남아있는 빛의 궤적을 묶었다. 그대로 끌어당기자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속절없이 끌려갔다.

-너희는 가끔 정말 무서운 행동을 하는 것 같아.

케이가 짐짓 겁먹은 투로 말하며 콧김을 내뿜었다. 복잡하게 얽힌 두 뿔이 빛을 발하고 짙은 먹구름이 하늘 한 점에 부자연스럽게 몰렸다.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강렬한 빛이 쉴 새 없이 번쩍이며, 먹구름으로부터 쏟아진 번개가 프레이가 만들어낸 마법에 자연스럽게 섞였다.

“인간이 가끔 터무니없이 멍청한 생물인 건 부정하지 않겠는데…… 그렇다고 인간이 다 저런 등신 같은 짓을 하는 건 아니다. 착각하지 마라.”

-아하하. 나도 알아! 저런 사람도 있지만, 동시에 자이안 같은 사람도 있는 게 너희가 한때 이 행성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잖아?

프레이는 굳이 대답하는 대신 한 차례 코웃음을 치고는 이번에는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한층 견고해진 번개의 사슬이 따로따로 흩어져 있던 빛의 궤적을 공중에 한데 끌어 모았다.

빛이 거칠게 날뛸수록 사슬의 구속은 더욱 단단해졌다. 동시에 그렇게 모인 커다란 빛 위에 새하얀 불꽃이 작게 피어올랐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불꽃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번개의 사슬과 맞닿은 순간, 맑은 물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처럼 삽시간에 확산했다. 불꽃이 내부의 빛을 양분으로 삼아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한담. 야, 케이. 이거 우주로 쏘아 보내도 별 탈 없을 것 같냐?”

-우주는 내 주관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근데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우주에 비하면 별것 아닌 열량이고.

“그렇지? 역시 그렇겠지? 너만 믿는다?”

-아하하하. 프레이는 자기가 저지른 일의 책임을 남한테 떠넘기는 나쁜 사람이구나!

불꽃이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불꽃이 먹구름을 가르며 위로 떠오르는 그 모습은, 마치 법왕국이 숭상하는 태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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